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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행사로서의 예배와 최고 최상의 예배매정하신 하나님의 인간들을 향한 사랑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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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1월 28일 (월) 23:05:37
최종편집 : 2023년 03월 28일 (화) 00:19:02 [조회수 : 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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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영실 휴게소 부근

말구유의 아기 예수와 목자들의 궁합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들, 그것도 외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보는 아픔을 뒤로하여 멀찍이 날려버리시고, 그 죽음에 의해 인간들을 구원하신 기쁨으로 충일하셨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성탄절이 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다 같이 일어나 다 함께 찬양하는 성탄절이 옵니다. 영멸의 불지옥에 떨어질 우리 인간을 구해 하나님 나라로 데려다주실 구주가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셨으니 다 같이 찬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금쪽같은 외아들, 천지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지은 피조물인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보내신 일이 그토록 기뻐하며 찬양할 일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처럼, 아니 인간보다 더욱 풍성한 감성의 소유자이신데 그럴 수 있으실까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매정하실 수 있으실까요.

악하다는 인간들조차 자식이 군복무를 위해 입대하는 것마저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데 말입니다. 노숙자를 구하는 것 같은 좋은 일을 하려 자식을 같은 노숙자로 만드는 것도 못 하는 것이 인간인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눈물 한 방울 흘리시는 일 없이 그토록 기뻐하실 일인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그날 밤 그 지역 베들레헴 들에서 밤을 새워가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치며 천사가 나타나 그들 곁에 섰습니다. 목자들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시대는 죄로 더럽혀진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목자들은 일반의 보통 사람들로부터도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는 음식도 먹지 않을 만큼 정결을 중시했던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목욕이나 세면뿐 아니라 손발인들 제대로 씻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양들과 늘 붙어 지내야 했으니 그 상태가 어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뜻)은 인간들의 그것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 탄생을 경배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궁전 아닌 외양간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어울림(Chemistry)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그리고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고 하지 아니한 것이라 한 분이 바로 그분 예수님 아닙니까.

 

 

배부르지만 조금만 더 드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전능하시어 전지하신 그 전지전능도 그 속살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강자도 약자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다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눈길과 관심은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중심에는 항상 사회적 약자가 있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습니다만,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멸시와 천대를 다 받던 사회적 약자인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을 경배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지요. 여기에서도 보듯이 하나님 사랑의 중심에는 약자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중핵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그래야만 하는 것이고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외아들을 하늘 영광까지 버리게 하여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보내신 아픔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그 큰 고통도 뛰어넘어, 그로 인한 인간들의 구원을 기뻐하셨습니다. 아픔 같은 건 생각할 겨를조차도 없을 정도로 기뻐하고 또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모두가 다 그 은혜를 입어 하늘나라 백성,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이지요. 감사, 감사, 또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된 가르침입니다. ‘강령’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사람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자신의 신앙 정도를 알고 싶다면 타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재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사랑의 중심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 곧 사회적 약자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거나 있더라도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랑 또한 바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도 자기의 하나님 사랑을 재는, 신앙을 재는 척도가 됩니다.

도와주고 사랑을 주어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돕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배부르지만 조금만 더 드시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배가 곺아 기진한 사람에게는 한 술의 밥이 생명줄이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단이 따로 있고 사이비가 또 따로 있나

 

성경에는 우리가 예수님(하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 또는 ‘거하라’라고 하는 의미의 말씀들이 있습니다(요14:20 15:4, 15:7 15:9-7, 요일2:28, 3,24, 4:13 참조).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러기를 원치 않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께서 패역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의 품에 안아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억지로 그리하기를 바라시지는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그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에 많이들 나는 믿는 사람이니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 해도 정도에 따라 다르지요. 속된 말로 무늬만 교인이요 신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병아리가 어미 닭 날개 아래 있으면서 밖으로 나갈 생각만 한다 해도 어미 닭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과 결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상만을 바라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그분께서 가라는 길로 가는 것, 그것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분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호하시어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나의 안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철저하게 종이 되어 죽도록 사랑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각오로,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는 각오로 살며 섬기는 것입니다(롬14:8 참조).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면 반드시 사람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섭리입니다. 믿는다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가짜, 사이비입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각각 다 다르듯이 생각하는 것도 다 다릅니다. 자기와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다른 것이 틀린 것입니다. 설령 자기와 다른 사람이 틀린 사람이라 해도 미워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해도 사랑하려 노력만은 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틀림없습니다.

 

 

이뤄주시는 기도보다 안 이뤄주시는 기도가 더 많은 이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나 자신같이 사랑한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이 더 절절한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하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명령이니 우리의 의무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믿는 사람들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기본이 될, 소위 ‘성도의 3대 실천강목’이라고도 하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라는 등의 기도하라는 말씀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주신다 했는데, 그래서 열심히 정말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런데도 이뤄 주신 것보다 그러지 못한 기도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도 야고보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라고.

그렇다면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구하는 기도란 어떤 것일까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예수님의 말씀으로 후반의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이 세상을 육신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구하라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신구약 66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범위가 너무 넓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22:37-40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으로는 정작 가장 중요한, 그러니까 핵심 중의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그러니까 핵심 중의 핵심인 요3:16 말씀입니다. 그래서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작은 복음’ 또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결어를 대신하여 ― 예배지상주의가 신앙을 망친다 ―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터 위에 사랑의 집을 짓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그러므로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되, 그 중심에 사회적 약자가 있는 사랑의 집을 믿음이라는 터 위에 지어가는 것이 우리 기독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요, 영적 예배 곧 최고 최상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배 지상주의가 우리의 신앙을 망친다는 것을. 형식을 갖춰 드리는 예배가 일상의 삶과 괴리된다면 그건 예배가 아니라 한낱 종교행사에 불과합니다. 형식을 갖춘 예배가 예배로 드리는 일상의 삶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질 때, 그리고 그 예배가 일상의 삶으로 이어질 때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이라고 한다면 뭔가 조금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이니 육신적 소욕을 가지는 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만을 바라며 그것만을 구하라 한다면 어떻게 조금도 아쉬움이 없이 만족하기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하지 않으시고 그에 이어서 그렇게 구하면 육신적 필요까지 모두 채워 주신다 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 같은 하나님의 따스하고도 세심한 배려에 큰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로써 되는 것 아닙니까. 이에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믿어 얻은 구원을, 그 믿음의 터 위에 사랑의 집으로 지어감으로써 탄탄히 굳혀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까지 채워 주신다는데, 이보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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