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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신학노트9-시중(時中)신학1: 하나의 세계, 하나님
장경현  |  claremontkr@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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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2월 28일 (목) 00:00:00 [조회수 : 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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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사상 2007년 1월호에 (pp. 222-228) 실린 글을 "목회자의 신학노트9-시중(時中)신학1: 하나의 세계,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싣습니다. 앞으로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할 계획입니다.]


시중(時中)신학1


¶. 들어가는 말: 신학이란?

신학(神學)이란 신(神)에 대한 담론(theos-logy)이며, 기독교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神), 곧 하나님에 대한 담론입니다. 그런데 개념상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고 담론을 펴는 인간은 “상대적” 존재입니다. 논리적으로 상대적인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을 “절대”(완벽)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논할 수가 없습니다. 신학적인 담론을 논하면서 “절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철모르고 떼쓰는 아이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불경한 일이 됩니다. 때문에 신학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상대”를 담보하면서 전개해야 합니다. 저는 이 “상대”를 전제하면서,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신학이 그렇듯이) 많은 오류와 불완전함을 전제하면서 “시중(時中)신학”이라 이름하는 한 신학을 펼쳐보고자 합니다.

시중(時中)이라 함은 중국의 사서(四書) 삼경(三經)중, 사서가운데 하나인 중용(中庸)에 나오는 개념으로, 시(時)는 “때”의 개념이고 중(中)은 “절대 중심”의 개념인데, 저는 신학적 의미에서 중(中)은 절대 중심의 하나님, 그리고 시(時)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時,空間)의 삶의 자리로 해석하면서 “절대 중심의 하나님의 뜻(中)을 삶의 자리(時)에 맞춘다”는 의미에서 저의 신학을 “시중(時中)신학”이라 이름 붙입니다. 다른 말로 “때 맞춤의 신학”(a theology of kairos)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자리는 늘 “때 맞춤,” 곧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사실, 인간은 언제나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동물들도 판단이야 하겠지만 본능적이고 충동에 의존할 뿐,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는 못합니다.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물론 인간도 때로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판단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이성(理性)을 통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사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성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판단을 해 나가는 데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유일한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라고 적고 있습니다. “흙”뿐 아니라 “생기”를 받아서 생령이 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생기”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다른 면은 곧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만이 거울을 봅니다. 어떤 짐승도 거울을 보며 거울 속에 비친 “객관화 된 자신”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거울을 보며 빗질을 하거나 화장을 하는데 이는 인간만이 자신을 객관화 시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객관화 시켜서 본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 선(善)한지 혹은 선하지 않은지, 옳은지 혹은 옳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판단, 곧 그 때에 맞는 행동 혹은 자리매김을 합니다. 이 판단을 잘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는 (혹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할 것은 하고 (혹 하고 싶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올바른 판단인 까닭입니다. 전도서의 지혜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때가 있고 … 때가 있으며…” (전도서 3장 1절 이하)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표현대로 모든 것은 그 때가 있을 터인데 그 때마다 가장 적절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 그것을 저는 “시중”(時中)이라는 개념 속에 담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중(時中)신학을 전개하면서 I장에서, “하나의 세계, 하나님”; II장에서, “둘의 세계, 인간(人間)”; III장에서, “셋의 세계, 성령(聖靈)”; IV장에서, “넷과 다섯의 세계, 만유(萬有)와 신의섭리(攝理)”; 그리고 V장에서, “시중(時中)신학의 방법론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I. 하나의 세계, 하나님

1. 중(中), 하나됨

중(中)은 절대 중심의 개념으로 절대자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됨”을 뜻합니다. 모든 만물은 늘 중(中), 곧 “하나됨”을 그리워합니다. 그것은 행복을 쫒는 만물의 본성(本性)입니다. 예를 들면 사과가 행복한 것은 사과나무에 달려 있을 때입니다. 사과에 있어서 사과 가지는 행복한 “하나됨”을 제공합니다. 사과나무의 가지들은 사과나무에 달려 있을 때 행복합니다. 그 나무가 “하나됨”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흙과 바람과 비와 햇빛에 맡겨져 있을 때 행복합니다. 흙과 바람과 비와 햇빛이 사과나무의 “하나됨”인 까닭입니다. 흙과 바람과 비와 햇빛은 자연 혹은 우주의 흐름에 맡겨져 있을 때 행복할 것입니다. 자연 혹은 우주가 그들의 “하나됨”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와 자연은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하나됨”에 있을 때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늘 “하나됨”을 그리워 합니다. 어린이가 행복해 보일 때는 어머니(혹은 그에 준하는 어떤 이)와 “하나됨”에서 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큰 어른들도 사실 “하나됨”을 그리워 합니다. 어른들에게도 부모님이라는 (혹은 그에 준하는 어떤 이)와 “하나됨”이 있(었)을 터이고 또 그들의 부모님은 “하나됨”을 찾아 당신들의 부모님을 그리워 합니다. 이렇게 올라 가다 보면 인간은 누구나 “하나됨”을 그리워 하고 있고 아담과 하와도 그 “하나됨”을 그리워 했을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하나됨” 속에서 행복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됨”을 그리워 하는 것은 인간의 본래의 성품, 본성(本性)인 까닭입니다.

중용(中庸)에서 중(中)은 이 본성(本性)의 첫 번째 원인 (the proto-cause)이 되며 용(庸)은 일상적인 삶을 뜻하는데 도(道)와 교(敎)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도(道)는 잘 보이지 않는 것, 이를테면 “법 정신”을 뜻하며, 교(敎)는 눈에 보이는 것, 이를테면 “법 조문”을 뜻합니다. 중용(中庸)의 도(道)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명하는 바 성(性)을 쫓는 (잘 보이지 않는… 법 정신과 같은) 도(道)와 그 도(道)를 지켜주는 (잘 보이는… 법 조문과 같은) 교(敎)의 일상적 삶을 말합니다. 중용(中庸)의 사상을 총괄적으로 보여주는 1장에서… 하늘이 명함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쫓음을 도(道)라하고 [率性之謂道], 도를 지킴을 교(敎)라고 [修道之謂敎]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中)은 성(性)에 응하는 천하의 근본이 되고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중(中)을 화(和)하며 드러나게 하는 것이 도(道)가되는 것이며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이 도(道)를 지킴이 교(敎)가 [修道之謂敎]되는 것입니다. 즉, 중(中)은 “화(和)의 도(道)”[드러나되 제대로 드러나는 것]와 교(敎)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성(性)에 응하는 중(中), 곧 “하나됨”을 도(道)와 교(敎)를 통하여 나름대로 제공해 주는 것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자연을 “하나됨”으로 삼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인(道人)의 상(像)을 찾는 도교(道敎)나 하늘을 “하나됨”으로 삼고 군자(君子)의 상(像)을 찾는 유교(儒敎)나, “하나됨”의 연(緣)을 아예 해탈하여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무(無)와 “하나됨”을 찾는 불교(佛敎)나… 기타 많은 무속 종교들이… 사실은 인간의 본성인 “하나됨”에 대한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이나 하늘 혹은 우주 심지어 무(無)조차도… 창조하신 (다시 말하면 상대화 시키시는) 분으로 고백되는 신(神)에게서만 그 “궁극적 하나됨(中)”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神)을 진정 묵상하신다면 인간 삶의 궁극적 행복을 가져오는 “하나됨”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이 “하나”의 세계를 득(得)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궁극적 하나됨(中)”의 상태는 없었을까?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의 구별이 없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의 에덴 동산의 모습… 혹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요 14:11a) 정도의 경지가 궁극적인 하나됨을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혹은 선불교(禪佛敎)에 나오는 심우도(尋牛圖)의 여덟 번째 경지, “인우구망”이나 [人牛俱忘, 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는 모두 공(空)임을 깨닫는다는 뜻한다] 아홉 번째 경지, "반본환원”이 [返本還源,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산수풍경만이 그려져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이는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로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하나됨”의 표현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승불교의 서방정토로의 해탈, 도교(道敎)의 “도(道)를 도(道)라 부르지 않은 상태의 도(道)”에 이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인(道人), 하늘의 뜻에 온전히 순응할 수 있는 유교(儒敎)의 군자(君子)… 뭐 이런 정도의 세계를 “하나됨”의 세계로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 “하나됨”의 뜻 때문에 “신(神)”을 표현할 때에 “하느님”이라는 언어보다 “하나님”이라는 언어를 더 선호합니다. 하느님”은 “하늘”-님 이라는 뜻이고 하나님은 “하나”-님 이라는 뜻일 텐데 신(神)”을 하늘, 곧 우주 만물조차 창조하신 다시 말하면 상대화시키시는 분으로 고백한다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절대자 한 분이신 신(神), 곧 “하나”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단어가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하나"의 논리를 가지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리이며 온전함입니다. 하나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그 언어 그대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냥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이 하나의 세계를 맛보며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신앙인이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을 마치 그 실체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혹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독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신앙인에게는 (예를 들면) 어둠이라는 것은 없고 그저 빛만 있을 뿐입니다. 빛은 어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빛은 어떤 실체(태양이나 전구나…) 가 있기에 있는 것이고 어둠은 실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체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은 실체가 있는 것이고 어둠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그저 “빛의 부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녕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어둠 그 자체가 무엇인지 인지(認知)하지 못합니다. 그냥 빛일 뿐입니다. 때문에 “빛의 삶”과 “어둠이 아닌 삶”은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빛의 삶”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자체로 좋은 것입니다. “어둠이 아닌 삶”은 빛과 어둠을 인지하고 (어둠이 아닌) 빛을 택하는 삶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은 온전한 “하나됨”은 아닌 것입니다. 어둠의 인식 없이 그저 빛 가운데 있는 이가 복(福) 있다 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 자체가 없는 모두가 “이웃”인 하나님의 “하나”의 세계-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맛이 있다”는 말과 “맛이 없지는 않다”라는 말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맛이 있다”라는 말은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맛의 “있음과 없음”의 두 세계 속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은 온전한 하나의 세계와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시간은 “현재”라는 “하나”뿐입니다. 사람들은 특히 불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 하지만 기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시간은 늘 “하나” 곧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어거스틴을 다시 빌리면)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고 미래는 현재의 기대일 뿐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감성(感性)도 “하나”입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라는 말처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유가(儒家)는 기쁨,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싫어함, 그리고 탐냄의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일곱 가지 감성을 이야기 하고, 불가(佛家)는 육감(六感), 곧 (눈, 코, 입, 귀, 몸, 의지)의 좋고 나쁨과 좋고 나쁨이 없는 상태 그리고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상태(6)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3)를 붙여 108번뇌(6*6*3=108)를 이야기 하지만 사실 우리 신앙인은 “기쁨” 하나뿐인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하나님 나라는 삶, 혹은 생명의 세계로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린 아이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누룩의 비유” 등이 그 생명성을 보여줍니다. 삶 혹은 생명과 상반된 “죽음”이라는 것은 (삶 혹은 생명을 설명해 줄 수는 있어도) “하나”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둠이 그 실체가 없듯이) 실체가 없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 11:25-26)

하나님의 나라에는 죽음이 그 실체가 없듯이 지옥(地獄)도 실체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하나됨”을 무시하고 하나님 나라와 상반된 개념으로 지옥을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죽은 우상을 살아있는 것으로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에서 지옥은 그 실체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이라는 말 자체의 어원이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던 거짓 우상(하데스, 헬)에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거짓 우상과 죽은 자들의 무덤(게헨나/힌놈의 골짜기, 스올)이며, 실체가 없는 곳(아비스)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블레즈 파스칼은 “예술은 진실을 보여주는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빌리면 지옥은 (천국을 보여주는)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에 대한 언급 없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과 “하나됨”을 누리는 신앙인이 될텐데… 하나의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사는 것이 말처럼 쉽게 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둘이 있어야만 무엇인가 알 수 있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자아(self)는 타자(others)에 의해서만 인지(認知)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과 “맛 없음”과 “미움”과 “어둠”과 “원수”와 “지옥”을 이야기 합니다 만은… 기실 이들은 진짜 실체가 있는 “기쁨”과 “맛”과 “사랑”과 “빛”과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인지(認知)하기 위한 혹은 이야기 하기 위한… 그 실체가 없는 주변적 언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의 세계를 누리는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의 세계, 하나님 나라를 인지(認知) 혹은 맛보았으면… 이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들은 그 생각에서조차 버릴 일입니다.

“강을 건넌 이는 배를 돌아 보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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