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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재판30년] 불가결의 상호보충 - 하나의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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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1월 02일 (수) 02:48:53
최종편집 : 2022년 11월 02일 (수) 03:43:26 [조회수 :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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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철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 2부 종교재판 30년, 그 ‘ 以後 ’


발표1 불가결의 상호보충
― 하나의 시도

 

한인철(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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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환 교수가 기독교대한감리회로부터 종교재판을 받고 출교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개신교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변선환 교수로부터 계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학적 통찰은 무엇일까? 오늘의 발제는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불가결의 상호보충’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불가결의 상호보충’은 변선환 교수가 불교와의 대화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개념으로, 크게 세 가지를 함축한다고 본다. 첫째, 오늘의 한국 개신교는 심각한 한계에 직면해 있다는 것, 둘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셋째, 새로운 것을 배울 때 한국 개신교는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발제는 이 세 가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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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인들은 한국의 개신교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2022년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국민일보와 <사귐과섬김> 부설 코디연구소가 “기독교에 대한 대국민 이미지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먼저 가장 선호하는 종교를 물었다. 불교 1위, 천주교 2위, 개신교 3위였다.

천주교를 포함해 타종교에 구원이 있느냐고 물었던 개신교로서는 충격적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호감도였다. 불교는 66.3%, 천주교는 65.4% 그리고 개신교는 25.3%였다. 여기에 또 하나 충격적인 것은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였다. 신뢰도는 18.1%였다. 타종교의 구원을 묻는 개신교에는 과연 구원이 있느냐고 되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첫째는 교회 지도자들의 비윤리적인 삶, 둘째는 교인들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언행, 셋째는 재정 불투명성, 넷째는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삶이 그 이유였다. 한마디로 ‘삶의 결핍’이 불신의 핵심적 이유였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왜 그 삶은 결핍되어 있는 것일까?

크게 세 가지 기독교 내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니케아신조, 둘째는 사도신경, 셋째는 사영리이다. 니케아신조의 핵심은 예수와 하나님은 본질상 같다는 것이다. 상당수 개신 교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니케아신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삶이 빠져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데 예수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영리는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한국의 개신교는 ‘사영리 기독교’라 불러도 좋을 만큼 사영리를 그 신학적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세 가지가 상호작용하면 어떤 결과를 만들까? 한 마디로, ‘예수는 믿되 예수처럼 살지 않는 개신교인’을 양산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우리는 예수처럼 ‘살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처럼 ‘살 필요가 없다’. 예수 믿고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인 예수처럼 살려는 것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교만이고,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원색적으로 주장하는 개신교인은 많지 않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의 의식 저변에는 이러한 생각이 깔려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처럼 살게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초기 기독교와 초기 불교에서 그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질문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초기 기독교와 초기 불교에서 예수와 석가모니의 삶은 중요했는가? 둘째, 예수와 석가모니는 어떻게 불렸고, 그 호칭은 이들의 삶과 직접 연관이 있는가? 셋째, 제자들은 어떻게 불렸고, 그 호칭은 이들이 예수와 석가모니처럼 살려고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가?


3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가르침, 활동 그리고 그의 죽음이 예수 전승의 중심축을 구성했다.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경구(警句)와 ‘비유’를 주로 사용했다. 경구와 비유를 통해 예수가 하고자 했던 것은, 동시대 권력자들이 지배하는 옛 세상에 도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다스려지는 새로운 세상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활동이 ‘가르침의 실천’이었음을 강조한다. 동시대의 가난은 두 가지 문제를 발생시켰다. 질병과 기아. 이에 따라 예수의 활동은 질병에 따른 고통을 치유하고, 배고픈 사람들과 공동식사를 하는데 중심을 두었다. ‘고통의 치유’와 ‘공동식사’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나누는 자리였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자리였고,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한 모형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그의 ‘가르침과 활동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권력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 이 때문에 동시대 권력자들은 예수를 죽이는 데 공조한다. 예수에게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죽임당할 것을 각오하고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활동을 지속할 것인가? 예수는 십자가 처형의 위협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지켰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행동으로 실천하고, 죽는 순간까지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학자들은 한결같이 초기 기독교의 예수는 ‘선생’이었다고 말한다. 일부 학자는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를 교사로 호칭하지만, 초기 기독교의 예수는 교사 이상이었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훌륭한 교사이다. 그러나 가르친 대로 살지 않으면 위선자로 불린다. 가르친 대로 살았더라도, 죽기 전에 그 가르침과 삶을 포기하면 변절자로 불린다. 그러면 잘 가르치고, 잘 살고, 죽는 순간까지 그 가르침과 삶을 지켜낸 사람은 무어라고 부르는가? 그것이 선생이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를 ‘선생’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선생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은 어떻게 불렸을까? 예수 자신은 ‘친구’로 불렀다. 요한복음 15장 14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예수의 친구라는 말이다.

반면 초기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은 어떻게 불렸을까? 스퐁에 따르면, ‘길(道)을 따르는 사람들’(followers of the way)로 불렸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길을 따라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로 이해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원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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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의 경우는 어떨까? 초기 불교 또한 석가모니의 삶이 그 중심축을 이루었다. 석가모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과 ‘가르침’이었다. 초기 불교는 석가모니 출가 후 깨달음을 얻기까지 6년간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많은 스승과 고행자들을 만났지만,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자신 또한 극단의 고행도 해 보았지만, 역시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렀다. 석가모니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것은 신(神)도 다른 사람도 아니었다. 나 자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한 일은 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깨달음 이후 입적까지의 45년은 가르침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깨달음의 내용이 가르침이었고, 가르침의 핵심 주제는 ‘괴로움’이었다. 그는 괴로움의 실체, 원인, 소멸 그리고 올바른 삶의 길을 사성제와 팔정도 그리고 십이인연으로 정리하여 가르쳤다.

초기 불교는 이러한 석가모니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첫째로, 석가모니는 ‘깨달은 사람’으로 불렸다. 초기 불교는 이러한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불렀다. 적어도 초기 불교에서 붓다라는 호칭은 석가모니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깨달은 사람’은 붓다로 불릴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석가모니는 먼저 깨달았을 뿐이다.

둘째로,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는 ‘스승’으로도 불렸다. 여기에서 스승은 주로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킨다. 석가모니의 삶이 자신이 깨우친 바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임이 분명했지만, 초기 불교는 그가 가르치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보다 강조한다. 석가모니 또한 자신이 입적하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뿐이라며, 자신과 가르침을 동일시했다.

그러면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어떻게 불렸을까? 석가모니 역시 제자들을 ‘벗’이 라고 불렀다. 상하의 구분이 없다는 말이다. 누구나 석가모니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고,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는 먼저 깨달았고, 제자들은 나중 깨달을 뿐이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그의 벗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석가모니는 또한 제자들을 ‘수행자’로 지칭한다. 수행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깨달음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했기 때문에,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전적으로 제자들의 몫이다. 석가모니가 제자들을 수행자로 지칭하고, 끊임없이 수행을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5

오늘 발제의 논지는 “초기 기독교와 초기 불교가 한국 개신교의 삶의 결핍 현상을 치유할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는 믿되 예수처럼 살지 않는 개신교인이 예수를 따라 예수처럼 살 수 있는 개신교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가?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한 초기 기독교와 초기 불교의 모습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제시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예수와 석가모니에게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예수와 석가모니의 삶이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와 초기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 활동 그리고 죽음에 초점을 두었고, 초기 불교는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가르침에 초점을 두었다. 둘째로, 예수와 석가모니에 대한 호칭은 분명히 이들의 삶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선생’ 호칭은 예수의 가르침, 활동 그리고 죽음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고, ‘깨달은 사람(붓다)’과 ‘스승’이 라는 호칭은 정확히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가르침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셋째로, 제자들에 대한 호칭은 제자들이 예수와 석가모니의 삶을 이어 같은 삶을 살고자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친구’와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호칭은 제자들이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임을 보여주었고, ‘벗’과 ‘수행자’라는 호칭은 제자들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통해 석가모니 와 같은 깨달음에 이르고자 했음을 보여주었다.

초기 기독교와 초기 불교가 보여주는 이러한 세 가지 모습은, 제자라는 것은 선생을 믿고 (trust)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선생처럼 사는 것이라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기 기독교와 초기 불교는 심각한 삶의 결핍 현상을 보이고 있는 한국 개신교를 치유할 충분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본다.

여기에 덧붙여 초기 불교가 주는 두 가지 교훈,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 그리고 가르침을 통해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행이 필요하다는 점은 한국 개신교가 배워야 할 초기 불교의 특별한 공헌점이라 생각된다. 이 두 가지 교훈까지 한국 개신교가 배울 수 있다면, 훨씬 더 성숙한 개신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예수가 가르치고 앞서 사신 대로, 예수와 같은 길을 가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정진하는 예수의 길벗, 이러한 개신교인을 꿈꿀 수는 없을까? 변선환 선생님 출교 30년을 맞아,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기독교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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