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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재판30년] 사랑과 열정, 종교재판의 길목에 선 변선환의 신학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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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1월 02일 (수) 02:12:30
최종편집 : 2022년 11월 02일 (수) 02:52:32 [조회수 :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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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재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 1부 종교재판 30년, 회고와 성찰


발표1 사랑과 열정, 종교재판의 길목에 선 변선환의 신학 여정

 

송순재(감리교신학대학교 은퇴교수)

1

어떤 일이나 사건이든 그 의미는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겠습니다. 역사학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역사학의 과제라 할 것 같으면, 그것 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기술하고 그 원인을 밝혀 해석한다든지, 기존의 해석과 평가에 새로운 색채를 부여한다든지, 혹은 기존의 의미를 심화시켜 제시한다든지, 줄곧 간과되어 있었거나 은폐되어 있던 문제를 새롭게 발굴하여 의미를 부여한다든지, 그도 아니라면 기존의 해석을 전적으로 뒤집어버린다든지 하는 등의 작업을 통해, 과제를 ‘새롭게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로 만들어 제시하는데 있다 할 것입니다.

오늘 모임에서 근본적으로 요청되는 시각입니다. 우리는 변선환의 생애 완숙기에 발생했던 종교재판 사건과 이를 중심으로 연루된 문제들을 생각해보고 향후 국면을 전망하고 개척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를 한없이 한(恨) 맺히게 했던 그 사건을 중심에 놓고, 그의 족적을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그가 살아갔던 삶과 그의 학문 세계를 더욱 깊이 되돌아보게 되니, 이 자리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삶을 추모하고 신원(伸冤)하기 위한 색다른, 그러기에 더욱 특별한 몸짓에 뜻을 모으려는 것입니다.

충분히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을 하지 않거나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도 있겠습니다. 정치적 이유는 그중 유력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실상 종교재판 때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소위 전위신학적 주제가 교단 내에서 공개적으로 다루어지거나 그 관점이나 입장이 공적으로 명확히 표명된 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는 바, 이는 당시 종교권력에 의해 조성된 특정한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말하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아야 하고 머뭇거려야 하지 않습니까! 음성은 나지막해야 하고 주제는 은밀해야 합니다.

당시 교단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이들 중에는 학자들 뿐 아니라, 교회 현장의 목회자와 그것도 명망 있는 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묻혀버렸습니다. 이 일을 주도했던 특정한 목회자와 평신도 그룹은 그 다양한 목소리들을 부정하고 침묵을 강요하며 비틀어버리기에 충분한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성된 음험한 영향력은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2022년 10월,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삼십 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젊디젊었던 그의 제자들은 세월을 따라 꾸준히 정진하여 이제 선생님이 세상을 뜨신 그 연세 언저리에 닿아갈 만큼 되었습니다. 선생님으로 인해 주어진 과제에 천착하여 살아왔고 그 은덕을 잊지 않았지요. 그동안 학문도 열심히 쌓았고 신앙적 삶과 실천에 골똘하여 왔습니다. 해마다 가져온 추모기도회 끝에 이번에는 감리교 신학대학과 감리교회 내부에서뿐 아니라 교회 전반과 사회를 아우르는 공론의 장에서 터놓고 생각하고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겠다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도 사회도 많이 변했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얼마나 교회와 사회에 의미 있게 말을 걸어 볼 수 있겠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말해야 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고, 숙고할 만한 가치는 차고도 넘치기에 함께 숙고하려는 것입니다. 음성은 이제 더 이상 나지막하지 않으며 주제는 더 이상 은밀하지 않습니다.

당시 종교재판을 주도했던 이들은 그러한 ‘전위신학적 주제’는 교회 현장에 전혀 쓸모없을 뿐 아니라 방해거리이며 심지어는 사탄적인 것이라고까지 정죄했지만, 그들과 상반된 입장을 취했던 목회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신학과 목회방식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으며, 새로운 신학의 출현에 십분 공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우려는 그네들이 견지했던 신앙 노선이 전혀 감리교 신학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라는 인식, 즉 그것은 감리교 신학에 대한 무지와 오해라는 평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상황과 문제의 윤곽은 서서히 더욱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한 가지 방식으로, 즉 교회 신자 수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법을 따라 말해보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서양의 특정한 교파를 배경으로 한 문자주의적 신앙노선과 그 선교사들이 가져다준 인습적 교리에 따른 어법이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사회에서 그 소통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음은 기본 상식을 갖춘 이들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불상을 깨부수는 이들이 활개를 치면 칠수록 아마도 상황은 더욱 악화 될 것입니다.


2

불교에 대해 변선환이 취한 입장에 대해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그가 왜 불교와의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이 왜 필수불가결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정황(사회 문화적 정황과 종교적 정황)이라는 조건을 전제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서구 신학에 종속된 상태로 언제나 의존적이며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이며 그러한 마음 바탕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유 형식은 일찍이 함석헌(1901~1989)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은 성서 연구가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성서 본문 그 자체에 대한 성실한 연구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차원에서 민족적 삶의 정황에 대한 인식을 조건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한국에다가 진리를 살리려는 자는 먼저 한국을 알아야 할 것이요, 한국을 알려는 자는 먼저 한국의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가 와야 하지만, 한국이라는 조건, 한국의 종교 문화 역사적 조건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것은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입장에 서서 그는 한국 기독교 신앙의 환골탈태를 역설하였습니다.

함석헌이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일정 부분 근대 덴마크의 대표적 신학자 그룬트비(Nikolaj F. S. Grundtivig, 1783~1872)와 흡사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와 민족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그룬트비는 일찍이 서구 신학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관점을 전개한 바 있었습니다: 인간과 민족의 삶은 기독교 없이는 영혼이나 정신세계의 진정한 깊이에 이르지 못하며, 인간과 민족은 오로지 기독교에 의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기독교가 인간과 민족의 삶을 살리기 위해서는 단순히 전자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고 후자를 조건으로 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양자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연관된다. “만약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설득하려면, 그들이 실제 살고 있는 장소에서 대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복음은 공허해지고 민족의 삶 역시 해소되어 버릴 것이라는 관점이 그것으로, 이 논점을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라”라는 유명한 명제로 표현한 바 있 습니다.

따져볼 때 윤성범과 유동식과 변선환의 신학적 선배요 감리교 신학의 초석을 놓은 탁사 최병헌이 또한 그렇지 않았던가요? 변선환이 종교재판에 기소되었을 때 표명한 입장을 다시 새겨봅니다.

  “헬라 철학이나 독일 철학을 사용하며 만든 서구 신학은 혼합주의가 아니고, 유독 동양 철학의 범주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한 모든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적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를 본인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복음을 아시아의 심성에 울림 하는 아시아 종교나 아시아 혁명의 새 언어를 가지고 설명하는 우리 아시아 신학을 개발할 때, 그때 아시아 교회는 독립 신학의 바벨론 포수에서 벗어나서 비서구화된 아시아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찾게 됩니다.”

그 논지의 핵심은 한국이 서구와는 달리 ‘종교다원 사회’라는 인식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일체의 신학적 추구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음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3

변선환은 분명 우리 신학계에서 독보적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등장했던 거의 모든 첨단 신학적 흐름들과 마주하며 논쟁을 벌이며 그 한복판에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 나갔습니다. 실존신학, 과정신학, 민중신학, 생태신학, 여성신학, 종교신학 등이 그 주요 과제였다면 종국에는 자신의 사상을 ‘종교해방신학’이라는 한마디 말로 표명하고자 했습니다. 이 개념에는 ‘토착화’와 ‘민중’이라는 두 가지 핵심어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단 그는 그 모든 것을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으로 다루었습니다. 여전히 미완이며 도상에 있었던 중 종교재판에 봉착했던 것입니다.

변선환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도취되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고독하게 사랑하였습니다. 기소자들과 재판관들은 단지 그들이 아는 수준에서 그들이 경험한 신앙틀을 절대화시키면서 그들에게 ‘한시적으로’ 주어진 종교권력을 사용하여 폭행을 가하고 죽여서 내다버린 변선환이 얼마나 하나님 사랑에 목말라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구원의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I am that I am. 나는 나라고, 나는 영원한 지존자라고, 나는 영원히 고독 속에서도 결핍을 느끼지 않는 사랑이라고, 나는 영원히 나 홀로의 고독을 이긴 자라고, 두려움 속에 있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의 품을 떠나서 우리는 어디에서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사랑 속에서 이미 고독은 극복된 것이라는 산 증거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 그의 십자가의 최후의 순간에서 읽습니다.”

그의 하나님 사랑이야말로 그의 신학의 원천이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는 기존의 신앙 내지 교리 체계의 단순한 수용을 거부하는 대신, 다양한 종교들과 맞서서 혹은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 넘치는 대화 과정 속에서 “어느 종교가 참된 종교적 본질을 나타내는가 하는가”에 관한 물음에 열정적으로 불타올랐던 바, 그 행위를 그는 ‘사랑하는 투쟁’(liebender Kampf)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변선환은 또한 교회를 사랑했으며, 신학과 신학공동체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사랑하였고, 제자들을 사랑하였으며, 민족과 민중을 사랑하였고, 아시아를 사랑하였으며 세상을 일편단심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그 열정적 사랑은 살아서 뛰노는듯, 호소력을 발휘하며 아름답게 펼쳐지는 그의 글과 문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학자인 동시에 교육자였으며, 동시에 절반쯤 문학가요 절반쯤 철학자였던 변선환의 사랑은 신학적 사랑인 동시에 교육적 사랑이요, 미학적 사랑인가 하면 사색적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그를 평생 동반해 갔던 아내 신옥희 교수와 자식들을 향한 사랑은 또 어떠하였던가요? 그 자취는 종교재판 이후 그리고 그의 사후 그의 삶과 신학을 꿋꿋이 동반해 온 철학자 신옥희의 삶과 학문에서도 여실히 읽혀집니다. 변선환 선생님은 언젠가 제게 “내가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건 아내 덕분이야”라고 하셨는데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서 우물 밖,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대한 바다로 인도되었습니다. 우리가 생전에 변선환과 그의 정신세계를 알았다면 정말 얼마나 알았을까요? 세월이 흐르니 그분이 직면했던 질문들이 더욱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시대에 그러한 분이 사셨고, 그 가르침을 받고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독단과 무지와 오해와 폭력과 야만으로 점철되었던 그 종교재판 자리를 상기하며, 선생님께 우리의 사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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