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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코로나 시대의 예배에 관하여
전창희  |  매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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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0월 25일 (화) 20:57:27
최종편집 : 2022년 10월 30일 (일) 08:29:16 [조회수 :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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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열일곱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위드 코로나 시대의 예배에 관하여

 

전창희 목사(매화교회, 전 협성대학교 예배설교학 교수)

 

<질문>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교회의 영상예배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꼭 우리 교회에만 나가야 하는 것인지요? 때로 이웃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안되는지요? 또한 성도의 의무(주일성수,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하는지요? 코로나로 인해서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졌는데 온라인 예배만 드리면 안되나요?

 

   
 

* 우선 이 글은 그동안 필자가 코로나 19 사태에 예배에 대해 기고했던 내용들을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둡니다.

예배라는 입장에서 보면 코로나 19는 많은 부분에서 기존의 생태계를 교란시켰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코로나19의 상황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고, 준비할 겨를도 없었기에 당황하였고 힘들어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발전이 될지, 아니면 기독교(자) 자체의 쇠퇴의 신호로 보아야 하는지 아직 섣부르게 단정짓지는 못하겠지만, 긍정적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녹녹한 현실은 아닙니다. 특히 기독교 공동체의 뿌리가 된다고 할 수 있는 작은 교회 공동체들의 어려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고민은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어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형교회들은 코로나의 영향을 받은 것 같으면서도 영향력이 커진 반대의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인원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온라인상의 영향력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헌금의 증가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성도들 스스로에게 주어진 질문 중 하나는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려야 하는가?’입니다. 사실 코로나 19 이후 교회의 가장 큰 논쟁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예배’였습니다. 특히 코로나 시대가 이 시대의 교회에게 던져준 주제는 ‘온라인’ 영상예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코로나시대의 대안적인 예배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듯 보입니다. 예상과는 다른 오랜 기간으로 인해, 성도들의 예배의 인식이나 개념 자체가 이전 시대와는 다르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니까요.

위드코로나의 시대의 예배 가치를 무조건 ‘현장예배의 회복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섣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코로나19시대에 교회에 던져진 질문은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인가?’ 하는 것이었고, 이미 교회들은 흩어진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한 독려와 정당성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려야 하는가?’라는 도전적 질문 기독교 역사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유구한 전통을 배경으로 삼은 ‘모이는’ 기독교 예배는 이러한 질문들을 소멸시켜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인간의 생존적 상황은, 여기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완성되기도 전에 새로운 예배의 생태계를 형성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깊은 고민이 성숙되기 전, 이미 상황을 따라가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흩어져서’ 드리는 온라인 영상예배가 대세인 상황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논쟁자체는 아직 결론 지어진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목회자로서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릴 때 ‘제대로’ 드리는가’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있습니다. 물론 예배를 어느 곳에서나 드릴 수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드릴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드리는 것’은 다른 것이죠. 저도 영상으로 예배드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엉망으로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가볍게 예배드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영상으로 보다 보니, 예배 ‘보는’ 자세도 좀 편해졌고 마음가짐도 조금 여유로워졌습니다. 물론 예배가 불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유로운 마음이 사라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는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여했다고 ‘제대로’ 드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학창시절 책을 펴놓고 앉아있다고 해서 다 공부하는 것은 아니었듯이, 교회에 나와 앉아서 예배 참여했다고 해서 다 예배드린 것은 아닐 겁니다. ‘어디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은가?’ 저는 지금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 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 교수로 재직했다는 이유로 이 논쟁적 질문을 종종 받는 편입니다. ‘무엇이 옳을까요?’ 그러나 사실 오늘날 기독교 예배공동체에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려야 하는가?’라는 종류의 질문보다 더 필요한 질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질문이 요한복음 4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에서 만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모리야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어느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것 옳으냐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1,23)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배에는 그 여인의 질문과 관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신령한, 진정한 예배였습니다. 그럼 오늘날의 교회는 ‘모이는 예배든지 흩어지는 예배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고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기독교 예배는 이러한 영적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 대답해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신령과 신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을 측정하기도 어렵고, 방법적으로 제안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적인 고민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해결을 해나가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논의에 기준이 될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4:23-24)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유대인 혹은 사마리아의 장소나 방식도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할 [어떤 때]가 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가 언제일까요? 사실 이 때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태동된 ‘기독교’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한 기준은 성서를 비롯해서, 초대교회가 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 문서들이 기독교 예배를 연구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서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에서 태동한 기독교 예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질문은 무엇일까요? 사실 ‘예배를 꼭 교회에 가서 드려야 하는가?’ 혹은 ‘이웃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많은 이분법적 사고가 그렇듯이 기독교인들을 많은 착각에 빠뜨렸습니다. ‘교회와 가정’, ‘내 교회와 이웃 교회’ 이런 이분법적 나눔 속 어딘가에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예배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질문들에는 숨겨져 있는 잘못된 예배에 대한 전제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드린다’는 행위 자체를 ‘보는 것’ 혹은 ‘그 시간을 지키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전제에 묻혀 예배의 중요한 가치 하나를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예배의 ‘공동체성’입니다.

 

   
▲ 전창희 목사

물론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도 혼자 예배드리고, 야곱도 혼자 예배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배는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가 잘못된 예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예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꼭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성’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그 신앙이 태동한 때부터 전통적으로 예배공동체이자 세례공동체였으니까요.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이러한 기독교 전통에 닥친 큰 위기는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이 예배의 공동체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공동체성의 무너짐은 코로나 19의 사태로 인해 공동체로서의 모이고 나누는 것들이 제약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위드코로나 시대의 교회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예배의 회복의 준비와 과정이 단순히 현장 대면 예배 회복에 대한 것이 아니라 코로나 19시대에 무너졌던 예배하는 공동체성의 회복에 대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시대에 던져진 예배에 대한 질문과 대답의 기준이 좀 더 분명해질 수 있을 겁니다.

 

예배에 대한 사고의 경계가 넓어지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또 다른 주제는 ‘주일 성수’와 ‘헌금’ 특히 ‘십일조’에 대한 문제입니다. 한국교회는 주일성수에 대한 오랜 고집을 가지고 왔습니다. 꼭 주일을 지켜야 하고, 소속 교회로부터 멀리 있더라도 자신이 소속한 본 교회에 돌아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의 미덕이라는 것이었죠.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꼭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나요?” 이 질문을 하신 분은 일요일에 회사에 출근을 해야 하는 분이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대신 월요일 회사의 신우들과 점심시간에 모여서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마음 속에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교회의 신앙전통에서 자라왔기 때문이었죠.

예배에 관한 신학적인 논의를 떠나서 어떻게든 예배드리려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성수’에 대한 문제는 좀 더 숙고해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왜 주일성수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배의 본질에 대한 문제로 대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일요일뿐만이 아니라 다른 요일에 드리는 수많은 예배가 있습니다. 수요예배도 있고, 금요예배도 있으며, 어느 공동체는 화요일 혹은 목요일에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예배라면 예배를 어느 요일로 한정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항상 시작은 ‘왜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가?’ 혹은 ‘왜 일요일이 신앙공동체에게 거룩한 날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학생이 ‘안식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주일을 특별하게 생각하나요? 정확한 이유는 그 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 부활 신앙의 기초위에서 예배를 세워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라고 하는 것은 율법적 규율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감사 위에서 예배하고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또 다른 주제는 ‘십일조’의 문제입니다. 먼저 개인적으로는 헌금에 대해서 인색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헌금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십일조가 의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십일조는 인간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십일조에 관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요청하시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전통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민할 것인, ‘십일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주고 있는 도전입니다. 요즘 심심찮게 나오는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인가?’라는 항의는 사실 하나님께 대해서 인색하고자 함은 아닐 것입니다.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나오는 것은, ‘드리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어떻게 쓰이는가’에 대한 의심과 비판적 시선이 담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헌금이 투명하게 사용되지 않거나, 헌금을 통해 부를 축척하는 부정적인 모습들이 나타난 결과가 헌금에 대한 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가운데서 헌금을 하고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이 정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되면 누가 헌금을 하는데 인색하겠습니까? 헌금에 대한 논란은 헌금 자체에 오류가 있다거나 혹은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헌금 사용의 오류에 대한 지적이 아닐까하는 성찰이 이제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데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 드려진 헌금이 그렇게 쓰여진다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십일조 뿐만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면 십의 이조, 십의 삼조에 대한 헌신이 있는 것이 성도의 선한 마음이 아닐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많은 대답이 왜곡되어 있음을 봅니다. 왜냐하면 예배에 관한 질문에 대해 예배의 본질을 간과한 채로 대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드코로나 시대의 ‘신앙공동체의 회복’은 분명히 ‘예배의 회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이 예배공동체로부터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위드코로나의 시대는 예배의 개념이 바뀌었음을 인정해야만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위드코로나 시대에 주어진 하나의 숙제는, 흩어진 성도들의 개인적인 경건이 어떻게 모이는 예배로 혹은 교회로 전환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흩어지는 예배가 놓치기 쉬운 이러한 ‘공동체’성이 해결된다면 혹은 ‘공동체’에 대한 시대적 새로운 해석과 정의가 내려진다면, ‘모이는 예배’와 ‘흩어진 예배’는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흩어진 경건과 모이는 예배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교회들의 숙제는 어쩌면 이런 연관성을 해결해 나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예상되는 어려움들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해결되기를 소망하며, 이 땅의 교회들이 함께 예배공동체를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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