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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사람들은 고난을 받고 악한 이들은 잘 살아가는 걸까요?
이찬석  |  협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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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0월 17일 (월) 17:01:15
최종편집 : 2022년 10월 22일 (토) 17:15:25 [조회수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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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열여섯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왜 선한 사람들은 고난을 받고 
악한 이들은 잘 살아가는 걸까요?


이찬석교수 (협성대학교)


 <질문> 성서에는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때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시는 교우들이나 이웃들에게 예수님처럼 대답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고통을 당하게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왜 선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잘만 살아가는 것일까요?

   
▲ 이찬석 교수

“신정론”(神正論, Theodicy)에 관한 질문을 주시었네요. 기독교인이면 누구든지 한두 번 이상은 던져 본 질문이겠지요.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면서 이 세계를 주관하시는 주관자라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고백하고 있고, 감리교의 <감리회 신앙고백>에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이라고 하나님을 주관자로 고백하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데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왜 악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은 신앙인들이 던져 볼 수밖에 없는 질문이지요. 실제로 이러한 물음에 관한 신학적 연구를 “신정론”이라고 합니다. 신정론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섭리와 악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연구라 할 수 있습니다.

 신정론에 관한 여러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입장도 완전한 대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 글에서는 지배적인 네 가지 입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돌보시는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악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죄에 대한 징벌’로서의 고난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장 명료하게 제시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이지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악은 죄 아니면 죄에 대한 징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선한 하나님이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악(惡)은 선의 결핍으로 원래는 좋았던 것이 나쁘게 된 것이며, 악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죄)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 따르면, 고난과 악의 기원은 인간의 죄이며, 인간의 죄에 대한 징벌이지요.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John Calvin)도 다음과 같이 또렷하게 말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질병과 전쟁, 그리고 다른 재앙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스리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가르친다.’

많은 기독교인이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면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보면서 회개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도 고난을 죄에 대한 징벌로 보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난을 죄에 대한 징벌로 보는 관점은 구약성서에서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에 대한 징벌로 먹거리를 위하여 평생 땀을 흘려야 하는 수고와 해산의 고통이 주어졌지요. 노아 시대에 사람의 죄악이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홍수라는 징벌이 주어졌고,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가지 않고 잘못된 삶을 살아갈 때 특별히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징벌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을 통하여 인간이 겪는 아픔과 고난은 죄에 대한 징벌로 읽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을 ‘죄에 대한 징벌’로만 볼 수는 없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육 시키고 더 성숙하게 하기 위한 고난도 있습니다. 악과 고난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교육과 훈련으로서의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려는 고난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훌륭한 군인이 되기 위하여 훈련소에서 기본적인 군사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훈련병들은 이 훈련의 과정을 통하여 멋진 군인으로 태어납니다. 훈련의 과정에 있는 고난은 훈련병을 군인으로 만드는 기회가 됩니다. 바로 밑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는데 기나긴 시간과 힘겨운 고난의 연속인 광야 생활을 겪어야만 했지요. 광야 생활에서 부닥치는 다양한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히브리인들은 훈육되어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새롭게 거듭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광야 생활의 고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이라기보다는 성숙과 교육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악과 고난을 ‘교육의 과정’으로 보는 신학적 입장은 초대교회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을 ‘선의 결핍’과 ‘죄에 대한 징벌’로 보았다면, 이레니우스는 악을 ‘완성된 인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 이전의 아담을 완성된 인간으로 설정하지만, 이레니우스는 타락 이전의 아담을 불완전한 상태로 설정합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인류는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지 않고 불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으며, 인류는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완전한 창조를 전제로 한다면, 이레니우스는 불완전한 창조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레니우스는 창조의 완성은 처음의 창조 (창세기의 창조)가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지는 마지막 창조(새로운 창조)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지요. 현재의 인간은 불완전하게 창조되었으므로 타고난 이기심이나 자기 중심주의를 넘어서 완성된 존재를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도상의 존재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악은 인간이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5:8)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의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히브리서는 들려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자신들의 조상이 이집트 바로 밑에서 겪었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의식을 수행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사순절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기 위하여 여러 모양으로 금욕적 실천을 수행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우리가 사순절에 수행하는 다양한 고난은 우리의 신앙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기회가 됩니다.

악과 고난에 대한 세 번째 해석은 인간의 책임으로 읽어가는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에 대한민국을 온통 눈물바다로 만든 사건이 세월호 사건입니다. 아직도 풀리지 않고 미궁 속에서 잠자고 있는 세월호 사건은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하여 476명의 생명을 앗아간 잔인한 사건이었지요. 이 사건을 ‘죄에 대한 징벌’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교육의 과정’으로 읽어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사건입니다. 현재에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죄 없는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 고난에 대하여도 ‘죄에 대한 징벌’이나 ‘교육의 과정’으로서의 고난을 적용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세월호 사건처럼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으로 읽어가야만 합니다.

악과 고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신학은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입니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관한 전통적인 개념(신앙)에 도전하면서 ‘설득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과정신학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이해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으로 설명하였고, 하나님의 전능성을 하나님이 세계 과정의 모든 세세한 것까지도 다스리시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성서에는 신의 섭리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은 강제적이지 않고 설득적이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힘을 독재자와 같이 일방적으로 행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이 선(善)을 선택하며 살아가도록 설득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과정신학의 관점으로 악과 고난을 읽어간다면, 악과 고난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않고 전적으로 인간에게 돌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고난과 악’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악이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악을 ‘자연적인 악’과 ‘도덕인 악’으로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도덕적인 악은 인간들에 의하여 발생하는 악이라면, 자연적인 악은 태풍, 홍수, 가뭄, 지진 등과 같이 자연적 재해로 발생하는 악입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부 자연재해는 생태계 질서의 파괴로 인한 인재(人災)로 규정할 수 있는 일들이 있지만, 지진과 같은 자연적 재해로 발생하는 고난은 알 수 없는 고난으로 보아야겠지요. 욥이 당하는 고난도 알 수 없는 고난으로 읽어가야 합니다. 욥이 겪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허락하셨기에 시작되었지만, 욥의 입장에서는 사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지요. 욥은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1:1)이며 “모든 일에 신중”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므로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기서의 결론 부분에서도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지요.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이런 질문을 받은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42:5)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의 원인과 이유를 명료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고난과 악에 대한 신앙(신학)적 설명의 시도를 네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았습니다. 질문자께서는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관하여 물음을 주셨지요. 요한복음 9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만났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요.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런 대답을 하십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이 시각장애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질문자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밑줄을 긋고 현재의 삶에서 만나는 교우들이나 이웃들에게 예수님처럼 말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네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가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가혹한 존재로 다가올 수 있지요.

우리는 성서를 읽고 이해하면서 하나의 문장만을 뽑아서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전후 맥락과의 연관성에서 의미를 구성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에 나오는 제자들의 질문과 연속선상에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즉, 전제를 품고 있는 대답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이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고 있지요. 이 질문 안에 담겨있는 제자들의 생각/믿음은 사람이 고난을 겪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 고통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생겼다는 생각을 전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과 비슷한 견해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선천적 시각장애를 죄와 연결하지 않고 단호하게 단절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선천적 장애를 죄의 결과(징벌)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읽어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은 제자들과 같이 질병과 같은 고난을 죄의 결과로 믿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왜곡된 신앙을 거절하면서 바로 잡아 주시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비장애인에게도 주어진 사명이라 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간다면, 예수님께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지우고 계시는 것으로 읽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정론에 대한 네 가지 관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론도 악과 고난의 기원에 대하여 명료한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악의 기원에 대하여 온전하게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하지요. 욥과 같이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의 관점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겪는 고난은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 있음으로 고난과 악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적용하면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묻고 그 고난을 극복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성숙한 신앙인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까?”(시13:1)라는 시편 기자의 물음을 계속 던지면서도 또한 예수님과 같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라고 절규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의(義)의 최후의 승리를 완성하신다는 믿음과 소망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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