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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신학노트8-토착화
장경현  |  claremontkr@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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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2월 23일 (토) 00:00:00 [조회수 : 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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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신학노트8-토착화
[*. 1998년 10월 4일에 쓴 글입니다. 유학시절 감신 100주년 건물 짓는 기금 모금하기 위한 동문모임에 갔다 와서 쓴 글입니다. 토착화에 대한 글로 되새김합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는 감리교 신학대학 100주년 기금모금을 위한 동문 모임에 갔었습니다. 예배와 여러 행사들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온 95학번 이진영양의 노래는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가락에 맞는 찬송가를 만들고 이를 보급하고 있는 모습이 (제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특별히 더 감격적인 것은 그 날 부른 모든 곡(曲)이 모두 이천진 목사의 곡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천진 목사는 저와 80 동기로서 충정로 기숙사 생활도 같이한 막역한 친구 사이입니다. 학창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부르고 음악에 무척 재능이 있는 친구였습니다. 지금은 중. 고등학교 교목으로 있으면서 한국의 문화에 맞는 찬송가 곡을 만드는 일에 모든 열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지난 번 한국을 방문했을 때) 벌써 250 여 곡이상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젊은 후배가 그 친구의 곡을 가지고 와서 여러 동문들 앞에서 부르며 보급하고 있으니 제가 어찌 감동을 안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음악에 문외한(門外漢)이라고 해도!

“언제나 우리의 문화에 맞는 찬송을 할 수 있을까...” 하며 고뇌하던 그 친구의 모습이 선합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속으로 곡을 써 나가더니... 오늘날 조금씩 햇빛을 보려는가 봅니다. 제가 그 친구의 곡을 지금의 찬송가 마냥 따라 부르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곡을 부르려 먼 곳까지 온 이진영양은 제가 잘 아는 후배의 부인이 됩니다. 개량한복 (생활한복?)을 입고 왔는데 사모님들 사이에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의상입니다만, 우리의 현대 생활에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어 명절을 제외하고는 잘 입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개량해서 만든 것이 개량 한복인 듯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것을 찾을 때 전통적인 우리의 의상(한복)이나 탈춤, 판소리, 국악, 혹은 율곡이나 퇴계, 원효같은 우리의 대학자들의 사상을 떠올립니다만은 실상 우리의 실제 삶속에서는 잘 안입게되는 한복처럼 낯설기 만한 것이 사실입니다.

서구사상가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바르트, 불트만...)보다도 더 모르는 것이 우리의 사상가들 (율곡, 퇴계, 원효...)이고, 서구의 Pop-song보다 더 모르는 것이 우리의 판소리, 탈춤, 국악 등이고, 양복의 넥타이는 잘 매어도 한복의 옷고름을 맬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전자는 남의 것이고, 후자는 우리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 탈춤보다 디스코(요즈음은 랩인가요?)를 더 잘 추는 이 세대에 탈춤은 우리의 것, 디스코는 남의 것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기독교가 한국 종교인구의 최다(最多)를 차지한다는 지금 기독교는 서구의 것이고, 유교. 불교는 우리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것이고, 무엇이 우리의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토착화(土着化)라는 과제를 풀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종교나, 사상가들 혹은 판소리, 탈춤, 국악 혹은 한복 등은 우리의 역사속에서 내려온 전통입니다.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인 면에서 우리의 것, 우리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만나는 현대의 (internet 등으로 세계가 좁아진 지금) (기독교같은) 종교나, 사상가들, 의복, 팝송 등도 또한 우리의 것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있을 것입니다. 즉,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인 면에서 우리의 문화로 토착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통시성과 공시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 그것이 토착화의 한 화두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후배의 개량한복을 보면서 토착화의 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한복이라는 통시성에 개량이라는 공시성을 접붙인 문화의 토착화 (즉, 개량한복)를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음악에는 문외한입니다만, 가요를 국악과 접목시켜 부르는 송창식이나, 정태춘, 김수철의 음악세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합니다. 통시성과 공시성의 만남! 그 속에서 우리의 것이 만들어지고 발전 보존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종교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통시적 종교적 심성 [유(儒).불(佛).선(仙)을 포함한 각종의 종교적 덕목] 들에 공시적인 서구의 기독교가 들어와 카톨릭은 200여년, 개신교는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즉, 그만큼의 통시성을 갖고 있는데) 과연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제대로 우리 민족의 심성에 뿌리를 내려 우리의 종교로서 바르게 토착되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행여 조선시대에 양반들의 들러리 역할을 했던 유교나 고려말 부패했던 사찰(寺刹)들의 모습처럼 종교의 본질적인 내용은 망각한 채, 엉뚱한 길로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만이 넘는 교세를 자랑하기에 앞서 우리의 역사속에서 바로 계승되고 있는가 (통시성), 오늘의 현실에 메시지를 주는가 (공시성) 하는... 즉, 종교로서 제대로 토착되었는지 (되어 가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볼 일입니다.

통시성과 공시성의 만남에는 명분, 곧 신학이 바로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신학적 카테고리안에서 두 문화의 만남을 이루어 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학의 명분에 따라 때로 통시성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하고 때로는 공시성이 강조될 수도 있습니다.

윤성범, 변선환, 유동식, 김광식 박사등이 주도했던 종교간의 대화로서의 토착화 작업은 전자에 해당될 것이며, 서남동, 안병무 박사등이 주도했던 민중신학의 전개속에서 찾아낸 토착화의 작업은 후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가 한국의 다종교문화속에서 기독교와의 만남을 시도했다면, 후자는 기독교의 내용을 가지고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한 부정의(不正義)와의 비판적 만남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모두가 한국 사회내에서 시도된 토착화의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신학의 카테고리에 따라 초점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둘 모두를 포함해야 한국사회내의 기독교가 바로 토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병무 박사의 말년에 불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나, 변선환 박사의 말년에 사회 윤리적 측면의 강조등이 그들의 부족했던 면을 보충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Black Movement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Segregation을 주장했던 Malcolm X가 말년에 이르러 Integration을 향했고, 언제나 Integration을 주장했던 Martin Luther King Jr.가 말년에 Segregation을 향했다는 것도 결국 그 어느 부분도 포기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소위 “토착화”란 이름으로 전개해 온 종교간의 대화나 사회 참여의 한 유형으로 전개된 “민중신학”은 기독교의 소중한 토착화 작업으로 이제는 서로의 약점을 서로 보완해 나갈 때인 것입니다. ... ...김지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직도 바람은 서쪽에서 불고,
아직도 우리는 그 바람결에 따라
우줄우줄 춤추는 허수아비 신세,
허나 뼈대인들 없으랴.
바람에 시달리는 그 뼈대가 울부짖는 소리
그것이 애린 인 것을 ...

(그것이 토착화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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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선 (71.168.243.167)
2006-12-24 06:04:23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아보기 원함
[목사님의 기독교 토착화문제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수 년 전에 썼던 저의 짧은 소견을 덧붙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아보기 원함


기독교가 다른 문화권으로 확산 될 때에 반드시 그 지역의 토착 문화와 야합함으로써 생존했고 기득권을 획득하여 특유의 기독교문화를 형성했지요.

기독교의 거의 모든 축재와 풍속들이 유다교 고유의 것이 아니며 모두 기독교가 잠식해 들어 간 중근동으로부터 북구에 이르는 여러 문화권의 풍속이 뒤섞인 것이지요.

크리스마스의 캐롤로부터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츄리, 부활절 토끼와 달걀, 할로윈의 사탕 나누기와 가면놀이, 네잎클로버의 페트릭스의 축재 등 거의 모든 것들이 유다교 전통과는 아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예수정신(자유주의신학자들 또는 신정통주의신학자들이 추려낸 예수의 실존여부를 떠나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정신) 또는 바이블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는 초대교회 믿음의 형태와도 매우 상충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가 어느 지역에 확산 되면서 그 지역의 토착신앙과 야합함으로써 지역고유종교를 몰살시키고 기독교화 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기독교가 허울만 남고 본질은 토착신앙에 먹혀버렸다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확산 초기에 마치 토착신앙을 토벌하고 정복한 것과 같은 현상을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기독교가 지극히 공격적이며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토착신앙은 (특히 우리 배달겨레의 신앙인 무(巫)는) 소극적, 화합적, 수용적이기 때문에 공격해온 기독교와 정면대결의 투쟁을 피하고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래서 마치 기독교가 토착신앙을 토벌해버린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토착 신앙은 기독교 안에서 누룩처럼 서서히 발효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변질시켜버립니다.


기독교가 그리스문화를 정복한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그리스철학으로 변질된 것과 로마를 정복한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로마제국의 패권주의로 변질되었으며 유럽을 정복한 것 같았으나 유목민의 방랑생활처럼 방탕해버린 것, 그리고 한국을 점령한 것 같으나 결국은 한국 토착 신앙인 무속화해 버린 것을 보십시요.


그럼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논하기가 매우 난이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더 이상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바울에게서 찾기도 매우 어렵고 예수의 정신에서는 더더구나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느 지역의 기독교냐는 지역적, 문화적 배경과 아울러 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미국기독교, 독일기독교, 러시아기독교, 그리스기독교, 한국기독교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로마기독교와 미국기독교의 정체성을 먼저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로마기독교는 천주교쪽이며 미국기독교는 푸로테스탄트(저항교)쪽입니다.

특히 미국기독교는 한국기독교의 성장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이것이 더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나는 참 역설적이지만 많은 천주교인도 저항교쪽과 흡사한 즉 저항교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서 신앙형태가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지요.

(예로, 저항교의 성령부흥회라는 것과 천주교의 피정, 성령대회라는 것이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지더군요.)

미국기독교는 철저하게 차별적이며 무자비하게 공격적이며 배타적이며 물리적 폭력과 배금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한국기독교의 기본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과 한국 무속신앙의 야합이 바로 한국기독교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국기독교의 차별적, 배타적, 폭력적 배금주의적 성격과 한국 고유의 무속신앙을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차별적, 배타적, 폭력적, 배금주의적, 무속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느님(하나님)이 순전히 우리 신앙에서 나온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기독교 고유의 호칭이라고 떼쓰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신앙이 철저하게 무속에 녹아있으면서도 무속을 경멸하고 우상 또는 미신이라고 타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늘 듣게 되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그대로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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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7일 열렸던 채희동목사 추모 음악회에서 황인근, 김민정 님이 봄길이 작사하고 이천진 목사가 작곡한 노래 ‘우리의 고향, 하나님의 나라’를 들려 주었다. 역시 개량한복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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