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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정치신학, 지구적 비상사태와 새로운 생태신학의 전환점을 위한 투쟁
박일준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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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0월 04일 (화) 04:41:50
최종편집 : 2022년 10월 04일 (화) 04:42:38 [조회수 :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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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정치신학

지구적 비상사태와 새로운 생태신학의 전환점을 위한 투쟁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 저

박일준 역

이 번역서는 2017년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NRF-2017S1A6A3A02079082)임을 일러둔다.

 

역 자 해 제

 

복잡하고 난해한 것을 기피하는 세대를 위한 경고로서의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그리고 팬데믹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의 글을 읽어 내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영어의 문제라기 보다는 무엇보다도 켈러 자신이 쉬운 해법이나 대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러 제안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보고 있는 실재가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중층적인데, 너무나도 쉬운 흑/백의 논리가 해법들로 너무 쉽게 제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글은 매우 당혹스럽고,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지? 라는 물음이 들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결코 쉬운 해법을 보여주지 않는다. 현실은 복잡한데 그 복잡성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그 복잡성을 단순 요인들로 분해해서 선명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가 아직도 추구하고 있는 해결책이다. 근대 과학의 융기 이래 이 환원주의적 방법은 매우 효율적이었고 많은 성과와 진보를 이루었다. 적어도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이 환원주의적 방법을 통해 분석되고 환원되지 않는 물(物)의 초객체적 측면들이 우리에게 응답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그리고 팬데믹 같은 재난의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는 존재를 개체(individual)라고 생각하고, 각 개체들의 상호작용이 얽힘과 관계를 만들어 낸다고 통상 생각한다. 하지만 카렌 바라드(Karen Barad)는 그런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존재를 ‘얽힘’(entanglement)으로 본다. 오히려 존재는 ‘얽힘’이고, 이 얽힘 가운데 각 행위주체들이 독자적인 행위주체적 절단(agential cut)을 시행하면서 그리고 존재의 얽힘을 각 행위주체의 시점과 각도에서 조망하면서 다른 객체들이 주체에게 현시한다는 것이다. 바라드는 그래서 오히려 주체와 객체로부터 상호작용이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얽힘으로부터 주체와 객체가 구별되어 보이는 것이고, 우리가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내적-작용’(intra-action)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얽힘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존재를 얽힘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개체와 그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인수분해해서 분석하고 진단하고 예측하는데 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맞이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그리고 팬데믹 상황에서 이러한 방법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수십년 간의 열띤 토론과 활발한 운동, 섬뜩한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문제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존재의 얽힘을 다룰 사유의 패러다임과 방법을 온전히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전 딜레마처럼 말이다. 방사능오염과 폐기물만 없다면 원자력보다 좋은 에너지원도 없지만, 문제는 그 방사능폐기물을 처리할 방법도, 방사능 노출을 치료할 마땅한 방법도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는 우리에게 쉬운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모두가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를 타개하기에는 ‘이것이’ 대안이라며 확신에 차서 앞장서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문제의 일부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재의 복잡성을 쉽지 않게, 다시 말해 어렵게 이해하는 일이다.

 

여전히 근대적 환원주의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생태담론과 생명담론

 

2018년 이 책(원서)이 출판되기 전, 나는 뉴욕에서 캐서린을 만났었다. 아마도 그녀의 책 『길 위의 신학』의 번역이 거의 끝나가던 중이었다. 이 소식을 전하면서 당시 내가 공부하고 있던 ‘포스트휴먼’에 대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늘 ‘정치신학’ 이야기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후와 생태 문제가 정치적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냐고. 우리는 이미 수십 년째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고. 그래도 궁금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지. 그래서 이 책이 출판되자마자 구입하고 읽어가면서, 나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글을 접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던 방식이 너무나 협소한 사고였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내가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은 대부분 90년대에 습득한 지식이었고, 국내 신학계에서 유통되던 관련 지식들은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 Ruether)나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 시절의 생태신학이었다. 내가 유학하던 시절만 해도 딱 그 정도의 내용들이 신학담론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카렌 바라드의 Meeting the Universe Halfway(2007)가 출판되면서 소위 신물질주의(new materialism) 담론이 영미권과 유럽 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고, 같은 해 영국에서는 이안 해밀턴 그랜트(Ian Hamilton Grant),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퀸텐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그리고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등이 모여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운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울러 이후 철학의 주제가 구성주의(constructivism) 패러다임으로부터 ‘객체-지향의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으로 매우 급진적인 선회를 하고 있다는 것도 거의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앤디 클라크(Andy Clark)나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및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의 포스트휴먼적 담론들이 이 사조들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나는 2000년대 초반 이후 영미권과 유럽의 철학과 신학이 기후변화, 생태문제와 연관하여 어떤 사유들을 깊이있게 전개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결여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신학은 이제 이 책, 혹은 적어도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을 우회해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이 책이 읽기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현재 국내 신학계에서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나 논문들이 대부분 나처럼 지난 시절의 낡은 정보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유가 여전히 푸코 이후 전 세계 철학계를 풍미했던 구성주의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고, 이 주체의 철학과 신학이 기후변화와 생태계 문제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 문제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방향대로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과 매우 다른 생각을 전개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어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의 편협하고 협소한 생각의 틀을 깨주고 있다. 이제 우리의 신학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 지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실재는 언어를 통해 구성되지 않는다. 언어가 실재를 직접 접하지 못하는 인간의 사유에 실재를 구성해주는 기능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실재 자체가 아니다. 데리다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포하면서 실재와 신을 해체하였지만, 최근 서구 학계를 주도하는 철학과 신학의 담론들은 ‘실재 없이, 언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더 나아가 물(物)에 대한 급진적 생각들을 전개한다. 우리도 물질세계의 일부라는 너무 당연한 생각을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도 여전히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틀을 깨지 못하고 있다.

생태위기와 환경오염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매년 2년의 약정이 끝나면, 미련 없이 새로운 스마트폰으로 갈아탄다. 그리고 쓰던 전화기는 버려진다. 그렇게 버려지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우리의 문화가 너무 소비적이고 물질주의적이라는 비판적 사유를 전개한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전기, 수도, 가스를 끊고, 산속이나 시골에 가서 자연주의적이고 생태친화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우리는 스마트폰을 버리지 못한다. 이것이 세계와 소통하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때, 이 책을 활용하는 하나의 방법은 켈러가 각주에 달아놓은 친절한 문헌정보들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켈러는 글을 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혹은 ‘이렇게 주장한다’라고 명확하게 쓰지 않는다. 그래서 늘 남의 생각을 인용만 하는, 창조적이지 못한 신학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오해일 뿐이다. 켈러는 타인의 글과 생각을 인용 없이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작업을 창조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적 부정을 수행하는 것이고, 우리 시대 자본주의적 실천양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인용하고 그들의 작업들을 소개하면서, 켈러는 나름의 인문학적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쓴 박사학위 논문의 내용들까지도 틈나는 대로 자신의 저술 속에 꼼꼼히 소개하고 인용하는 켈러의 모습 속에서 인문학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남의 이야기와 개념들을 마치 내 것인 양 전달하면서 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방식,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약탈경제의 모습이 아닌가. 그 정직한 인용들이 나에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많은 담론들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녀의 인용들을 따라 책을 읽어가면서, 기후변화와 생태문제에 대한 기존의 나의 생각들을 깨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담론들을 아직 접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새로운 출발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매우 적합한 책이다.

 

문제는 정치다!

 

캐서린 켈러의 『지구정치신학』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를 신학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정치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 정치신학은 민중의 해방을 위한 신학과는 다르다. 민중해방은 중요한 해방의 신학이지만, 그 해방의 범위가 ‘인간’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비인간 존재들을 여전히 인간의 해방과 삶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해방의 신학이 비인간 존재들을 위한 해방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이 책의 정치신학은 민중의 해방을 위한 신학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를 위한 정치신학을 새롭게 주창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지구’를 신학적으로, 보다 정확히는 정치신학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켈러는 우선 ‘정치’를 재규정하고자 한다. 현재의 정치(politics)는 기후변화, 생태위기와 같은 지구적 위기들에 대응하고 준비하는데 실패했다. 더욱이 이 책이 출판되던 2018년,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파리기후협약 탈퇴는 물론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생태지향적 정책들을 되돌리거나 취소시켰다. 심지어는 기후변화나 생태계 위기를 부정하는 가짜뉴스들을 유포하고, 그에 동조하는 극우국가주의자들이 이를 공유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트럼프 당선 이후 국제/국내 정치는 이런 일들을 계속 자행하고 있으며, 2022년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도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현재 정치는 그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로 전락해 버렸다. 승리전략은 간단하다. 극도로 양분화된 사회정치풍토를 만들고, 거기서 51 대 49의 선거전략을 실행하는 것이다. 양분화된 정치지형에서 압도적인 승리는 없다. 승리는 49 대 51의 차이, 즉 3%의 유권자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 그래서 늘 선거는 ‘중도층’이라 지칭되는 3%를 끌어오기 위한 전략과 선심성 공약들이 남발된다. 애초부터 선거정치의 승리를 위해 달려가는 정치인에게 모든 사람이 내 편일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말하는 ‘국민’이란 자기 편이 될 수 있는 시민들을 말할 뿐이다. 이 정치적 분열을 켈러는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치신학을 통해 돌아본다. 법학자였던 슈미트는 정치를 ‘모든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한 정치’로 보지 않고, ‘친구와 적의 이분법’이 작동하는 장으로 이해했다. 즉 정치란 적에 대항하여 결집한 우리를 연대하고 구성해내는 능력이며, 그렇게 구성된 소위 ‘우리’가 얼마나 결집된 힘을 과시할 수 있느냐가 곧 정치적 역량을 의미한다.

본래 슈미트는 친구와 적의 이분법적 정치를 통해 자유주의자들의 무능한 정치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모두의 이성적인 합의를 통해 정치를 이끌어간다는 생각은 이상적일지 모르지만, 현실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능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시민들이 도대체 어떤 문제를 두고 만장일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팬데믹이 진행되는 가운데 방역 문제도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자유주의 민주정치가 무능할 수밖에. 슈미트는 이 무능한 정치를 파고들어, 실천력을 담보한 정치적 역량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을 제시했고, 거기에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론 이 ‘정치신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신학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정치신학은 다양한 의견들이 난립하는 다원주의적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여 동력화하는가를 간파한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에 따라 ‘친구와 적’을 구별하고 친구들을 규합해 적의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몰아가면 된다. 오늘날 이 슈미트식의 분열정치가 전 세계적으로 극우주의와 파시즘의 형태로 창궐하고 있으며, 이 분열된 정치구도를 소위 진보 혹은 민주 진영도 함께 즐기고 있다. 그렇게 정치는 선거용 구호로 전락하고, 모두를 위한 정치는 뇌리에서 지워진다.

정치권력은 언제나 법을 제정할 수 있는 예외적이고 폭력적인 힘을 통해 자신을 정초한다. 즉 권력은 처음부터 자신을 예외, 즉 법 바깥의 존재로 규정하면서 힘을 과시한다. 이는 단지 권력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남과 다른 혹은 남보다 돋보이는 나름의 조건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래서 인간집단 속에서 권력은 언제나 집단의 규칙들을 능가하는 초월적 권력을 희구한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문명은 지구와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예외화 할 수 있는 권력을 집단적으로 추구하고 만끽하면서 여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신학은 초기부터 고대의 정치신학적 텍스트인 창세기 1장을 ‘무로부터의 창조’, 즉 예외성 속에서 모든 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권력의 관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상상해 왔다. 정작 창세기가 추구하는 정치신학적 메시지는 외면한 체 말이다. 창세기는 분명 고대 권력의 위계질서를 모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방은 고대의 절대권력을 추종하는 모방이 아니라, 그 절대권력을 희롱하고 조롱하는 모방이었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을 신의 형상을 부여받은 자로 그린다. 고대 제국 시절, 신의 형상을 부여받은 자는 제국 안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황제다. 그런데 창세기는 모든 사람이 신의 형상을 부여받았고, 그래서 모든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황제의 절대권력에 대한 정치적으로 가장 위험한 도발이 아닌가?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채식주의자 본문’(창 1:28-29)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말이다. 채소와 과일을 우리의 양식으로, 풀과 식물을 동물의 먹거리로 말이다. 그럼 하나님은 채식주의자이신가? 글쎄? 동물에는 포식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비전은 양과 우리에게는 매우 평화롭고 목가적인 환상의 장면이 되겠지만, 육식동물 포식자인 늑대나 맹수에게는 매우 고통스럽고 잔인한 시간일 것이다. 먹을 것을 먹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 포식자 동물들도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 그런데 창조 직후 바로 풀과 식물만 먹을거리로 주셨다는 것이 매우 이상하지 않은가? 채식주의자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잡아먹지 말라.’ 강하고 거대한 제국이 약한 민족과 나라를 잡아먹으며 황제의 초월적 권력과 힘을 과시하던 시절, 성서는 서로 잡아먹지 말라고 명령한다. 바로 여기에 창세기의 정치신학이 있다. 사람들에게 부여한 ‘정복하고 지배하라’는 명령은 제국의 통치권력을 모방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지배와 다스림의 모델을 실천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정치는 여전히 창세기를 비롯한 성서의 본문들을 제국주의적 통치권력의 모습을 따라 읽으면서 예외적인 통치권력을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서툰 희망은 집어치우자.

 

오늘 우리에게 생태정치를 위한 비전과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켈러는 서툰 희망을 품지는 말자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을 “수의에 덮인 희망”(hope draped in black)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희망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실패를 외면하고, 낙관주의와 결합하여 희망이라는 말이 아편으로 기능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편(opium)이 진통제 기능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진통제는 증상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문제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대로 내버려둔 체 단지 통증을 느끼지 않고 견뎌낼 수 있도록 할 뿐이다. 물론 치유가 진행되는 동안에 때로 진통제는 매우 유용한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치료가 병행되지 않은 채 진통제만을 처방하는 것은 도리어 증상을 악화시킨다. 오늘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말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유튜브 영상으로 우리나라 남단 어딘가에서 전기, 수도, 도시가스 없이 친환경적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의 영상을 보았다. 젊지만 결혼 이후 삶에 대해 고민하며 함께 삶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전기, 수도, 도시가스 없이 살아가는 친환경적 삶이 모두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남북한의 대치 상황은 제외하더라도, 세계 여러 곳에서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삶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 각자의 죄책감을 덜고 조금의 위로를 갖고 살아가는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이 모두의 희망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의 생태담론의 희망과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태담론 조차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이중 구속되어, 결국 이 약탈적이고 파괴적인 자본주의적 방식을 대적하는 상황에서만 대안으로 인식되는 그런 의미의 대안은 아니었는가? 이런 맥락에서 켈러는 ‘수의에 덮인 희망’을 이야기한다. 너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어둡게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닐까?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희망을 무조건적으로 강조하기에는 우리 상황이 너무 참혹하다.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총성의 위협과 억압, 폭력 등은 자본주의적 무한경쟁을 공정하게 수행할 수 없는 수많은 지하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지하세계에서 우리는 지하공유지를 개척해 낼 수 있는 ‘지하서민들’(the undercommons)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던 자리가 맨 밑바닥이 아니라, 그보다 더 밑바닥인 지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도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희망이 현실의 절망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그것은 그저 현실도피용 마약에 불과할 것이다. 절망과 좌절에 내몰린 이들에게 희망은 지금까지 올바르게 희망을 품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말로 다가가지 않을까? 서툴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들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지하는 게 먼저 아닐까? 그렇다면 희망은 무로부터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일 것이다. 절망을 은폐하거나 외면함으로써가 아니라, 절망을 철저히 받아들이고 곱씹으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희망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지하에서 밀려난 존재들이 결집하여, 지상의 정치를 에워싸기 시작한다면? 이 결집은 밀려난 이들의 상처와 좌절과 적대감을 존중하지만, 그 적대감은 결코 제도권 선거정치가 공작한 분열정치의 적대감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함께 하는 적대감, 즉 서로에게 빚진 자들의 부채의식이다. 사실 창세기는 무로부터가 아니라, 심연의 어두운 얼굴로부터 만물을 창조하고 있으며, 전능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만들기보다는 땅에게 식물을 내라고 명하는 형식, 즉 ‘let ~ be ~’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땅이 그 본연의 역량으로 식물을 내라고 하나님은 명하신다. ‘그대로 되도록 하는 역량’, 그것이 바로 창조의 역량이다. 모든 존재가 그 본연의 모습으로 되어갈 수 있도록 하는 창조, 그것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 속에 모든 존재를 욱여넣고, 공정이라는 허울 아래서 정의와 상식을 운운하는 절대자의 심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희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한 그 본연의 역량을 피워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희망이 아닐까?

따라서 지하서민들의 적대감은 끊임없이 패자들만을 양산하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시스템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적대감이다. 우리의 실패와 좌절이 나와 경쟁을 벌였던 다른 이들 탓이 아님을 자각하는 적대감 말이다.

 

절룩거리더라도 오늘을 걸어가자.

 

2016년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난국과 더불어 머물기』(Staying with the Trouble, 한글판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우리가 ‘희망’이란 단어를 어떤 맥락에서 쓰느냐에 따라 희망은 매우 잔혹하고 중독적인 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지구적 위기의 극복을 말하면서도 이 약탈과 추출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의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고, 기껏 전기자동차와 원자력으로 그 대안을 말한다면, 그런 희망은 전혀 희망이 아닐 것이다. 해러웨이는 우리 종의 멸종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 종이 멸종하더라도 결국 지구행성은 그 나름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믿음으로 ‘난국과 더불어 머물기’를 이야기한다. 이 난국에 머물러 살아가는 동안 존재란 ‘함께-만들어-나가는-것’(sympoiesis)이며, 이 ‘함께-만들어-나감’을 꼭 우리 인간이 주도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덤덤히 길을 걸어자고 해러웨이는 제안한다.

켈러는 더 나아가, 우리가 그런 희망과 절망의 엇갈림에 휘둘리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더 잘 실패하기’를 시도하자고 제안한다. 그 어떤 희망의 달콤한 속삭임을 만들거나 절망의 암울한 우울증에 빠져들기보다, 우리가 실패했던 일들로부터 우리가 예외가 되기를 꿈꾸지 말고, 우리 역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이 보장될 것인지를 염려하기보다 오늘을 주신 분께 감사하며 지금-시간을 채워갈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우리는 지금 지구적 위기들이 엄습해 오는 가운데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실패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정치가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정치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십자가는 메시아를 상징한다. 하지만 동시에 십자가는 메시아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미완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메시아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이 ‘아직-아님’(the not-yet)의 차원은 실패의 상징일 수도 있으나, 그 실패가 있었기에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꾼다. 꿈을 꾼다는 것은 희망한다는 것이지만, 이 희망은 ‘내가 혹은 우리가 바라는 것’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아직-오지-않은-것”(the not-yet)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꿈을 꾸게 한다. 하지만 이 희망은 낙관적 기대와는 다르다. 그 희망은 ‘카이로스’의 시간이고, 그래서 태초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시작’에 근거한다. 아직도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은 바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하는 “지금-시간”(Jetztzeit)이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으로서 공동선을 위한 결집

 

지구적 위기들은 곧 우리가 함께 얽힌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얽힘 속에서 본래 정치가 추구하는 것, 곧 “공동선을 위한 결집”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고 켈러는 말한다. 이것이 기존 제도권 정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면, 우리는 제도권 정치 바깥에서 우리의 정치적 목소리를 결집하여, 오늘날 정치가 추구할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공통선이라는 것을 주창해야 한다. 본래 한국의 문화전통에서 정치 혹은 다스림이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이 ‘세상’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세계는 지구 혹은 자연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란 우리가 실재를 인식하는 지평과 같다. 세상이 하나의 공유지이고, 거기서 함께 잘 살기를 추구하는 정치적 연방으로서 공동체가 바로 사람 사는 공동체일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수한 차이들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갈등들을 지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정치가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속물스러워서 소란스럽고 번잡하게 느껴지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다. 하지만 이 소란스럽고 복잡한 세상에서 일부는 우리를 친구와 적으로 나누고, 그 분열의 힘을 규합하여 정치세력화하면서 권력을 추구한다. 트럼프만 이런 것이 아니라 소위 민주진영도 트럼프식의 극우정치를 거울처럼 반영하면서 우리만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켈러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차이와 갈등을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정치의 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켈러는 윌리암 코놀리(William Connolly)와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경합주의’(agonism)을 인용하면서, 서로 다른 의견들이 차이에 기반하여 치열하게 담론 투쟁을 벌여나가지만, 서로를 적으로 혹은 원수로 삼지 않고 차이를 존중하며 나아갈 수 있는 정치의 길을 도모한다. 선거정치는 정치를 all or nothing의 게임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래서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무한경쟁의 모습을 선거에 투사해 놓은 꼴이다. 51%의 득표율로 선거에서 이기면, 49%의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당선이 승리가 되어 버렸다. 그런 정치구조에서는 공동선을 위한 치열한 토론과 고민과 대안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절감한다.

정치적 경합주의를 실천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빚지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가 승자독식의 게임으로 전락했을 때 가장 철저히 망각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좌파나 우파 모두 ‘적대 기계’에 놀아난다. 서로를 적으로, 원수로, 악마로 투사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그 적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는 것, 그 적대적인 권력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정치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어떤 것도 존재의 얽힘으로부터 예외되거나 열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物)의 행위주체성

 

우리는 그동안 비인간 존재들을 우리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독교 전통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무로부터의 창조로 상상했던 것은, 곧 그 ‘다름’이란 이 얽힘과 연결됨으로부터 예외가 되는 ‘권력’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일반 국민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황제를 따르는 무리들은 스스로를 귀족으로,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평민들과는 다른 존재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벤야민은 바로 그 원초적 차이를 창출하는 힘은 언제나 예외적인 힘이고, 그 예외성이 권력의 핵심임을 밝혀 주었다. 이것은 법질서를 창출하는 힘은 법 바깥의 예외적인 힘, 즉 법을 위반할 수 있는 힘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맞이한 지구적 위기들이 보여주는 것은, 존재의 근원적인 힘은 그런 예외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얽혀있음으로부터 오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구적 위기들이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 위기들은 우리가 존재를 근대적 정치 주체와는 다른 눈으로 조망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것은 비인간 존재들과 더불어 연대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의 정치는 더이상 우리 삶의 물질적 구성과 분리되어 추상될 수 없다.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그리고 팬데믹은 우리 삶의 조건이라는 물질이 그의 행위주체성을 발휘하여 인간의 문명적 삶에 응답-역량을 발휘한 결과이다. 물질은 우리에게 응답하고 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방법으로 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物, matter)이 행위주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묵인해 왔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는 21세기에 물질들은 존재의 얽힘 속에서 우리에게 기후변화로 응답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런 행위주체성을 발휘하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 인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지와 인식은 인간 유기체의 생존과 번식에 중요한 정보를 중심으로 자신의 주변환경을 소위 “주변세계”(Umwelt)로 구성하도록 되어 있어서, 애초부터 인간중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物)은 우리의 인식과 인지를 초월하는 “초객체”(hyperobject)의 측면을 담지하고 있다.

성서는 창조 이야기를 “우리가 만들자”(let us create)라는 제안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중심적인 제작 이야기에 물든 우리는 그 ‘우리’를 신의 내적 삼위일체나 외적 삼위일체로 읽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식물을 직접 만들기보다는 땅으로 하여금 ‘내도록 하라’고 명령하신다. ‘Let ~ be ~’의 형식으로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심연과 더불어 창조하셨으며, 존재들이 그들 본연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하자고 말씀하셨다.

 

여인(與人, staying with humans)의 신학

 

생태위기와 대멸종의 시대에 우리는 비인간 지하서민들의 존재를 ‘여인’(與人, staying with humans)의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인간을, 자신의 존재역량을 다른 존재로 연장하여 함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존재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 개념을 개체가 아니라, 함께 행위를 구성하는 ‘행위주체’(agency)로 이해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일찍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뒤집어, ‘그러므로 나는 동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동물성을 뛰어넘는 인간적 고유성,’ 즉 인간적 예외성에서 찾았던 서구철학과 문화의 우월주의를 뒤집는 발상이었다. 또한 이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를 지워내거나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보다 응집하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각자가 주변세계를 구성하고 활용해 나아가는 방식의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제는 그 차이가 서로 연대하여 인간-동물의 새로운 차이를 발생시킨다. 즉 ‘차이’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동물의 행위주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차이를 의미한다. 이 차이가 일어나는 자리를 일찍이 다윈은 종의 기원이라고 하였다. 다만 다윈이 말한 종의 기원으로서 변이가 개별 종의 ‘개체’를 중심으로 차이가 만들어지는 자리를 설명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이제 존재를 ‘서로에게로-연장된-존재’, 즉 함께 행위를 만들어 나가는 행위주체로 묶인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이성이나 인격 혹은 의지와 감정이 아니라, ‘연장능력’(extendibility)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사실 다윈의 진화론이었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는 절대적인 분리의 선이 아니라, 역량의 차이라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이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다고 증언한다. 오히려 짐승처럼 변해버린 인간이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체제를 모든 존재에게 폭력적으로 부여하는 행위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고대 제국 시대에 신의 형상을 부여받아 인간을 노예처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한 이는 황제뿐이었다. 그런데 성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뿐만 아니라, 정복하고 다스리고 통치할 권한까지 부여한다. 이는 고대 황제의 제국적 질서를 정면으로 뒤집는 급진적인 정치적 사유였다.

하지만 창세기의 정치신학은 제국의 권력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와 정복의 역사 자체를 벗어던지라고 말한다. 소위 ‘채식주의자 본문’이라 불리는 창 세기 1:28-29은 자기보다 약한 나라와 민족들을 잡아먹으며 성장하는 제국주의적 권력 기계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하라는 메시지다. 그것은 곧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함께 삶을 엮어 나가는 행위주체성을 발휘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동물-기계는 서로를 지배하고 복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함께-만들어-나가는 관계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이 다른 존재들로 연장하여 새로운 차이의 관계를 창출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동물성이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 담지한 것을 이 땅 위에서 실현해 나아가는 ‘매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본래 ‘공생’(symbiosis), 나아가 ‘공-산’(共-産, sympoiesis)의 얽힘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명증하게 만들어 주며, 동물-존재와 우리의 연속성을 연결해주는 매체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반려동물들과 우리가 맺는 감정적 유대는 우리가 다른 존재와 연결되고 엮여 다른 존재가 되어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감정이 결여된 냉혈한은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 아니라,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가 된다.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시대의 윤리적 책임감의 번역으로서 ‘응답-능력’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감정적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인간만이 이런 유대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다. 모두 익사하든지, 함께 헤쳐 나가든지.

 

다른 동물들을 대량으로 멸종시켜 가면서 우리 자신을 포함한 생명의 6번째 대멸종을 향해 달려가는 인류세 시대에 우리는, 나오미 클라인이 경고하듯이,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극복을 하기 위해 자원활용 감축을 시행하든지 경제성장을 위해 규제없는 확장을 도모하든지 선택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제성장을 포기할 가능성은 좀처럼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문제는 정치와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우리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체제 속에서 끊임없이 패자가 되어 사다리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이 체제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지 못하는가? 우리는 모든 존재가 6번째 대멸종의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나만은 예외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여전히 꿈꾸고 있는가? 이 예외주의 심리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대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존재란 ‘얽힘’(entanglement)이고, 이 얽힘에 예외는 없다. 그러나 모든 개체, 주체, 객체가 각 행위주체들의 시각에 따라 절단되어 분류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를 온전히 혹은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우리의 인식역량으로는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인식역량의 한계를 넘어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시대 우리의 정치는 이 ‘얽힘’을 정치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인류세를 넘어 ‘술루세’(Chthulucene)를 제안하는데, 이것은 땅속 지하적인 것(the chthonic)과 ‘새로운 것’(-cene)을 의미하는 두 단어를 합쳐 만든 단어다. 즉 존재는 흙적으로 얽힌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무로부터 창조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곧 우리가 흙과 얽힌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식물을 만들어 내는 ‘땅’은 식물들이 그 본연의 모습대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담지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공동-창조자’(co-creativity)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존재는 얽힘(entanglement)일 뿐만 아니라 “공-산”(共-産, sympoiesis)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패는 서로에게 달려있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같이-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얽힘과 공-산을 염두에 둔다면, 이제 우리는 이 땅이 하나의 오이코스(oikos), 즉 ‘가정’임을 상기할 수 있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ics) 모두 이 오이코스라는 말로부터 유래했다. 하지만 경제학이 이 가정을 풍지박산내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패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생태신학의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인가? 해러웨이는 ‘난국과 더불어 머물기’(staying with the trouble)라는 전략을 제시한다. 난국을 넘어가거나, 난국을 회피하거나 혹은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버티고 머무는 전략 말이다. 이것을 쉘리 람보(Shelly Rambo)는 “머물러 남기”(remaining)로 표현한다. 상실과 트라우마의 여파 속에서도 살아남아 버틴다는 것은, 우리가 승리주의 전략을 거절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없다. 난국 속에서의 어설픈 희망은 문제를 덮고 악화시킬 뿐이다.

이 ‘난국과 더불어 머물기’가 희망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부정신학’일 것이다. 부정신학을 ‘네가 신이라 이름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신이 아니다’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면, 이를 응용하여 ‘네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희망이 아니다’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신학 말이다. 그것은 곧 성육신(incarnation)을 ‘사이의 육화’(intercarnation)로 상상할 수 있는 신학적 상상력이다.

‘난국과 더불어 머물기’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는데 실패했고,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그리고 팬데믹 같은 재난들이 이어지면서 우리의 신학이 ‘하나님을 실망시켰다’라는 사실을 보다 명증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패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실패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실패나 혹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가?라는 난제에 부딪히게 된다. 여기서 신학은 이 신학의 난국과 더불어 머무르는 전략을 선택한다. 이 어려운 문제를 우회해서 신학을 할 수는 없다.

희망이 실패와 좌절로부터 피어나지 않고, 그것들을 외면하거나 은폐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을 “잔혹한 낙관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증상들이 악화되어 가는데도, 치료는 외면하고 고통의 완화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실패들이, 이 좌절들이 결코 무의미와 허무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잘못됐다는 것, 졌다는 것, 그래서 실패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실패를 통해서 열매를 맺을 가능성을 갖게 된다.

실패와 좌절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우리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를 당연시하고 그 체제의 승자예찬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 속에 승자가 있기는 할까? 경쟁이 무한히 반복되는데 말이다. 잠깐의 승리를 맛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구조 안에서 노력하면 목표한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성공이데올로기에 잠깐 취할 수는 있을테지만, 결국 무한경쟁을 이겨낼 개체나 주체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학은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일 수밖에 없다. 체제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래서 켈러는 “부정신학적 대안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부정신학은 우리가 신학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해체하고, 보다 진정한 것을 찾아 나서도록 독려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정신학적 관점에서 모든 실패는 “창조적 가소성(creative plasticity)의 용기를 일으켜 세우는 자극”이다. 그것은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좌절과 허무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그래서 켈러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를 인용한다. “언제나 도전했다. 언제나 실패했다. 상관없다. 다시 도전한다. 다시 실패한다. 더 낫게 실패한다.” 켈러는 이것을 “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인식과 시스템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차라리 실패하는 게 낫다. 잘못된 성공에 취하여 잘못된 길로 가는 것보다는 실패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차라리 “지금은 모르는 게 더 낫지”(unknow better now) 않을까? 우리는 이 얽힘 속에서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한다. 모두가 얽혀있는 존재의 엮임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더 나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더 나쁜 것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호적 내재”(mutual immanence)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잘 실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사실 성공이나 실패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함께-만들기”(共-産, sympoiesis)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협동하는 동역자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창조는 태초의 단 한 번의 창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시작(inception)의 사역’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companion)로서, 우리의 즐거움에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실패와 좌절에 같이 아파하신다. 여기서 다시금 주지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시대에는 ‘비인간 존재들’도 포괄한다는 사실이다.

 

신과-함께-만들기(theopoiesis):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되시는 그분을 믿다.

 

그래서 우리는 ‘공-산’(共-産, sympoiesis)에서 더 나아가 신학적으로 “신과-함께-만들기”(theopoiesis)를 이해하고, 바울이 의도했던 “만물 중에 만물되기”(becoming all in all)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켈러는 이것을 ‘사이의 육화’(intercarnation)라고 해석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우주의 에로스로 표현했던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의미했던 바를 재해석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할 때 개인이었을 때 보지 못했던 어떤 초월적 역량과 모습이 창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초월은 우리 모두와 독립되어 어떤 다른 곳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 안에 즉 우리 모두 안에 내재되어 있는 초월이다.

존 카푸토(John D. Caputo)는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집하신다”라고 말한바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고집(insistence)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즉 ‘let ~ be ~’의 형태로 드러난 하나님의 창조명령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본연의 모습대로 존재하고 삶을 만들어가기를 원하시고, 유혹하신다. 하나님의 고집은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강한 권력과 위엄으로 드러나지 않고, 낮고 미천하고 나약한 음성과 모습으로 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도래한 메시아를 결국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우리가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는 자들은 모여서 그의 부활을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부활을 직접 본 이는 없었다. 그들은 그가 부활했다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부르심에, 하나님의 고집에 응답했다.

실패와 좌절과 상처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부름을 바울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신다”(고전 1:28)고 번역했다. 우리는 없는 것(things that are not, ta me onta)을 경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경멸하고 차별하고 비하하는 그것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 있는 것들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약한 메시아적 힘의 현존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se-ability)이 없기 때문이다. 실패와 좌절과 절망과 눈물 속에서, 즉 난국 속에서 우리는 없는 것들 혹은 작은 것들에 응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다. 이 약한 메시아적 힘은 세속적인 권력의 위계질서에 익숙한 이들에게 ‘근거없는 근거’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것을 ‘메시아주의’를 넘어선 ‘메시아성’(messianicity)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다. 그 고난과 실패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이 가능했을까? 그렇기에 오늘 실패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비가시성 전략으로서 곱추신학

 

이러한 입장을 켈러는 ‘노틀담의 꼽추’ 이야기를 본떠 “꼽추신학”이라고 표현한다. 꼽추 난장이는 성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지만, 공적으로는 외부에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신학은 내적으로는 매우 요긴하고 필수적이지만, 공적 영역에서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등의 좌파 철학자들이 전개하는 철학 속에서 바울은 그들의 철학에 매우 요긴하고 필요한 존재지만,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편적 윤리철학자로 각색되거나 마르크스-레닌의 관계와 비유하여 레닌이 되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바디우와 지젝의 전략을 뒤집어 공적 영역에서 우리가 안 보이게 하는 전략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다면 어떨까? 우리의 믿음을 강하고 확고하게 공적 영역에서 외치고 주장하기보다는 우리의 삶과 실천으로 그들이 우리를 따라오게 하면 어떨까? 비록 그들의 눈에는 소위 ‘개독교인’으로 간주되지만, 함께 살아가면서 도저히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없어서는 안 될 공동체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한국교회 선교 초기의 모습은 정확히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 우리가 이 모습을 회복할 길은 없을까? 분리주의적 신학의 입장을 벗어나서 이 비가시성의 전략으로 세속에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공공대중을 새롭게 연대하고 결성하는 일에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했던 기독교의 구원 신학이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지구 위에 건설하기 위해 비인간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약한 메시아성의 힘처럼, 화이트헤드를 인용하자면, “갈릴리 사람이 품었던 겸손의 비전은 짧은 시간을 살다 갔지만, 시대를 넘어 여전히 불확실하게나마 깜박거리고 있다.” 오늘 이 무종교 사회 가운데서 신학은 ‘부정의 신학’ 혹은 ‘묵언의 신학’(apophatic theology)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입을 닫고, 그들이 왜 종교를 혐오하는지 왜 종교를 기피하는지를 먼저 듣는 신학 말이다. 즉 우리의 진리를 위해 다른 이들의 믿음을 우상과 거짓으로 몰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 안에 내재되어 있을 하나님의 내재적 목소리를 듣는 묵언수행의 신앙은 어떨까?

많은 신앙인과 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바울의 이 유명한 구절을 외면한다.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 말이다(고전 15:28).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되시니, 우리가 구태여 우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더불어-함께-만들어-나가는-것’, 즉 theopoiesis의 삶이 아닐까?

열정적인 선교의 시대를 지나고 나서 인구의 60%가 무종교인이 된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신학에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가? 우리의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만이 진리라고 소리 높여 외쳤던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외면하고 있는 이 시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켈러는 기독교회와 신학이 사회의 공적 영역으로부터 외면받는 무신론의 시대에 교회와 신학이 무의미해졌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성장주의가 각광받던 시절, 우리의 교회와 신학은 유능한 교회, 유능한 목회자, 유능한 신학자가 되기를 추구했고,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그 부정적인 되먹임의 효과를 극명하게 경험하고 있다. 작년(2021) 갤럽에서 실시한 종교인구조사에 보면, 우리나라 무종교 인구는 60% 정도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장주의 신학이 교회와 사회에서 유능한 역량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이제 신학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우리의 무능을 철저히 곱씹으면서 말이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군중을 바라보던 예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공생애 사역을 돌아보면서 말이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무능한 신학과 교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6번째 대멸종으로 달려가는 이 시대에 물질만능주의의 삶을 추구하면서 착취와 추출의 경제를 실현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구조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생존게임, 그래서 끝없이 양산되는 사회의 루저들(losers), 그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며 다가갈 존재가 교회와 신학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다른 종교인들과 협력할 때가 되었다. 종교를 경멸하는 시대에 진정한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은 교리나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삶을 만들어가면서 찾아야 한다.

아울러 비인간 존재들을 염두에 두고 존재의 얽힘을 신학적으로 사유하면서, 하나님과-더불어-만들어-나갈 방법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6번째 대멸종은 우리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물 종들의 멸종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위기 앞에서 우리는 신학적 대안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켈러의 이 책이 명확한 대답이나 제안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오늘 우리의 신학이 다른 학문분야들과 더불어 어떻게 그 대안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켈러는 그것을 ‘신과-함께-만들기’(theopoiesis)라고 말한다.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나도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이 출판될 수 있도록 함께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 책은 번역초를 마친 후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재학중인 백다현 전도사, 양정남 전도사 그리고 이왕용 전도사와 3년에 걸친 긴 시간을 함께 읽으며 우리말로 다듬어졌다. 그 긴 시간을 함께 해준 세 사람에게 감사를 전한다. 아울러 출판 전에 이 책의 원고를 수업 중에 학생들과 더불어 읽으면서 귀한 번역어 제안을 해준 장로회신학대학교 김은혜 교수님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귀한 제안들을 통해 이 책이 더욱 충실한 번역이 될 수 있었음을 고백하며, 함께 공부하는 동료로서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긴 시간 함께 공부하고 있는 신학-기술 공생목회 네트워크(Korea Theology and Technology Network, KTTN)의 송용섭 교수님, 이은경 교수님, 이성호 교수님, 김정형 교수님, 손화철 교수님, 이준우 교수님, 김승환 교수님 그리고 정대경 교수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끝으로 제가 속한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지원해 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김정현 원장님과 동료 교수님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역자 박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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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2-10-09 17:18:49
이런 類의 주장에 一應 수긍하지만 결국에는 아주 찜찜한 느낌만 남는다!
1. 허황된 꿈을 꾸면서도 아닌 척 한다

6번째 대멸종이라고 하였다. 1차, 2차, 3차, 4차, 5차 멸종이 있었다면 6차 멸종은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7차, 8차... 멸종도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億劫의 세월 속에 고작 몇 만 년 지구에 군림한 인간이 지구의 주인인가? 인간과 동물이 서로 ‘얽혀서’ 발버둥 친다고 하여 6차 멸종을 막아낼 수 있다는 건가? 6차 멸종을 막겠다고 허황된 꿈을 꾸는 건 하나님의 의중을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는 우를 범한 것 아닌가?

글쓴이는 인간과 동식물 등이 ‘얽혀서’ 노력한다면 ①6차 대멸종을 막을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②하나님이 원하는 어떤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1~5차 대멸종과는 달리 6차 대멸종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③1차~5차 대멸종의 원인은 각각 이러이러 했는데 만일 그 당시 이런 조건이었다면 1~5차 대멸종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대략적인 증거라도 제시한 바 없다.

글쓴이는 단순히 인간과 동식물이 ‘얽히면’ 혹시나 6차 대멸종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을 따름이다.

물을 가두어 놓은 댐이 터지면 그 밑은 수몰되는 것이 상식인데 글쓴이는1~5차 댐 붕괴처럼 6차로 댐이 터진다는 걸 기정사실화시켜 놓고선 그 밑의 인간과 동식물이 ‘얽혀서’ 댐이 터지는 걸 막을 수 있다는 죽창가(희망가)를 부르고 있다.

노아의 방주를 상상해보라! 지구가 수몰되는 마당에 인간과 동식물이 깔짝깔짝 삽질한다고 하여 수몰되지 않는가? 노아의 방주, 6차 대멸종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의연한 자세가 아닐까? 타이타닉號가 가라앉을 때 이를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넥타이를 고쳐 매고서 담담하게 물속에 가라앉은 어떤 사람처럼 말이다!

2. 누구나 예외 없이 죽는다!

1~5차 대멸종으로 지구가 일단 망했다가 ‘부활하여’ 이제 6차 멸종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1~5차 대멸종과 달리 어떤 조건에 부합되면 6차 대멸종을 예외로 할 거라고 언급한 적이 없다. 지구가 다시 ‘부활하여’ 이번에는 동식물이 인간을 누르고 살다가 7차 대멸종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어느 누가 알겠는가? 지구가 1~5차 멸종을 겪었다면 6차 멸종은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며 살아가는 게 보다 더 정직하다. 이산화탄소의 반감기가 백년이 넘는다고 하는 데... 산업혁명기에 발생한 이산화탄소가 아직도 그대로 있다는 냉혹한 사실에 눈을 감지 말자!

송충이가 소나무 잎을 먹듯이 인간은 탐욕을 먹는다. 탐욕 없는 인간은 人間 아닌 超人이다. 깔짝깔짝 삽질하면서 그대로 몰락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호들갑 떨면서 불안해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제 모양대로 살다가 타이타닉號(지구號)가 가라앉으면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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