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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의 남녀차별 문제요?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백소영  |  강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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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0월 04일 (화) 04:22:36
최종편집 : 2022년 10월 12일 (수) 15:30:12 [조회수 : 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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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열네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교회 안의 남녀차별 문제요?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백소영 교수 (강남대학교)

<질문>리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고 해서,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잘 안다며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야 했습니다. 여성은 늘 식당 봉사나 청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일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문화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성폭력에 관련해서도 남성들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거나 공론화하면, 비난의 화살은 도리어 여성들에게 돌아갑니다. ‘옷을 어떻게 입었길래?’, ‘어떻게 저렇게 독할 수 있나’라는 식의 반응을 쏟아냅니다. 교회 내 차별 문화를 개선하는 것, 교회의 성비위 문제를 차단할 수 있는 교회 내외에서의 어떠한 노력과 실천이 있을까요?

 

   
▲ 백소영 교수

질문하신 여성 차별적 교회 문화의 원인을 분석하고 전략이나 방법론을 글로 제시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일입니다. ‘가부장제’라는 제도 속에 교회도 포섭된 까닭이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편견이 고착화된 특정 제도를 극복하고 평등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노력’과 ‘실천’을 현실화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고, ‘오래된’ 문화적 관성으로 그 힘이 어마어마한 집단적 습관을 멈추는 일이기 때문이죠. 2010년 <뉴욕 타임즈>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맨스플레인’까지 언급하신 질문자의 선(先)이해를 고려할 때, 사회와 교회에 만연한 가부장적 응시와 규범이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를 설명하느라 지면을 할애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여자는 존귀하다, 여자도 사람이다, 하나님과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내용들’을 열거하는 것도 이 글에서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력’과 ‘실천’에 있어 내용만큼 중요한 것이 ‘방법론’이기 때문이에요. 제한된 지면 안에서 저는 ‘수행성(performativity)’의 측면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자라면 저자 앞에서조차 자신이 더 잘 알고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의 오만은 창조 때 하나님께서 DNA에 새겨주진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죠.

“사내자식이 그게 뭐니?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잖아. 우렁차게, 다시!”

“계집애 목소리가 왜 이렇게 커? 담장 넘어 들리겠다. 동네 창피해서!”

이 두 말은 상반된 지침 같지만 실은 하나의 규범을 의미합니다. 누가 말하는 자이며 누가 조용히 듣는 자여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짝’이죠. 개체의 독특성이나 개별성이 인정되지 않았던 ‘가부장제’의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낸 조언이고 충고니까요. 5천 년간 지속되었던 가부장제는 여자로 태어나고 배치된 사람들에게 행했던 억압과 ‘같은 방식’으로 남자로 태어나고 배치된 사람들에게도 획일적이고 지속적인 사회화를 강요했어요. 남자의 경우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세상에 자기 자신을 입증하도록 내몰았던 셈입니다. 그러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일단 목소리를 높이고 아는 ‘척’ 해야 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도 제도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남자들이 자꾸 설명하려 해도 이해하고 조용히 듣자!’는 말은 아닙니다. 특정 범주의 사람들이 굉장히 오랜 시간 집단적 습관으로 체화된 것을 바꾸려면 이를 멈추고 새로운 ‘문화적 습관’을 갖게 하는 일에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였습니다. 가부장제가 진행되어왔던 시간만큼은 아니겠지만 상당기간 교정과 훈련을 위한 지속성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죠. “아니, 5천 년을 입 닫고 고개 숙이고 살아왔는데, 또 인내하라는 말인가요?” 20-30대 젊은 교회 여성들은 우리가 왜 ‘그들’의 진도에 맞춰야 하느냐고 발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은 ‘진도를 맞추자’는 말이 아닙니다. ‘교정’과 ‘훈련’을 위한 시도는 당장 시작되어야 합니다. 다만 시도하나 실패하고 가르치나 배반당하는 과정이 꽤 오래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각오하고 버틸 준비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제일 필요한 것이 ‘연대’입니다. 혼자는 지치지만 여럿이 하면 오래 할 수 있으니까요. 혹시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 (대장간, 2015)라는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그 책의 부제는 이러합니다.

“존 하워드 요더의 성추행과 권력남용에 대한 메노나이트의 반응.”

요더는 그가 속했던 메노나이트 교파의 사람들에게만 유명한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저서 몇 권은 제 연구실 서재에도 꽂혀있죠. 학문적 깊이도 대단하거니와 문장력이나 전달력이 뛰어난 ‘스타’ 학자입니다. 학자가 학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기 어려운데, 소수 교단에서 세계적인 석학이 출현한 셈이었습니다. 실은 그래서, 내부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쉬쉬’했습니다. 그동안 개신교 전통 안에서도 소수 종파로 주변화되었던 설움을 잊게 만들 만큼의 재목이었으니까요. 그를 공격하는 내부 고발자가 되고 싶은 사람도,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도 없었죠.

무슨 일이었냐고요? 요더는 자신이 가진 학문적, 영적 권위에 힘입어 30년이 넘도록 자신을 따르는 교회 여성들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전통 중 하나인 ‘성도들의 거룩한 입맞춤’을 아시나요? 성서 본문을 읽을 때 우리가 깊이 묵상하지 않고 지나가는 부분입니다만, 실제로 예수님의 친밀한 제자 공동체에서도, 초대교회 성도들 간에도 성적(性的) 의미를 담지 않은,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서 영적 교류를 하는 ‘형제자매’의 친밀함을 주고받는 의례로 ‘거룩한’ 입맞춤이 있었다고 합니다. 후대에 가면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성도의 교제’를 하라는 지침이 생겨난 것을 보면 아주 초기에는 성별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요더는 진정으로 ‘영적 친밀함’을 소통하는 방식의 하나로 육체적 교류를 ‘실험’하자고 교회 여성들에게 제안했습니다.

역사적 선례도 있는 바이고, 초대교회의 모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했던 메노나이트 일원들이고, 거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요더의 제안이고 보니, 사적 편지를 받은 여신도들은 쉽게 거절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누군가는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존경하는 대학자 요더가 이 어렵고 위험한 실험을 나와 함께 하자고 제안하신 것은 내가 가능성을 가진 영성 깊은 사람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일 거야.”

그런 생각을 왜 안 했겠어요? 현대사회의 성적 욕망과 문란한 문화에 익숙한 ‘세상’ 사람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요더는 이 ‘실험’이 공개적으로 진행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했죠. 이렇게 은밀하게 여신도들을 개별적으로 설득했습니다. 그가 “뽑아버리자”고 했던 “야수의 송곳니”는 성적 쾌락을 의미합니다. 입맞춤은 열정적이고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교환될 수도, 영적 구성원들의 거룩한 교제의 친밀함으로 교환될 수도 있는 행위라는 것이죠. 만약 ‘거룩한 입맞춤’이 가능하다면 그 ‘거룩성’은 더 밀접한 접촉까지도 적용 가능하지 않겠냐고 했지요.

오늘의 관심사는 ‘거룩한 입맞춤’이나 ‘거룩한 성적 접촉’이 가능한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아닙니다. 요점은 요더의 권위에 눌려, 혹은 사로잡혀, 실험에 참가했던 여성들의 감정입니다. 그녀들은 수치심을 느꼈고, 자기 존재의 경계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성도의 교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점차 피해자가 늘어나면서 결국은 개인적 차원에서 여기저기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묵살되고 역공격당하기도 했습니다. 낱낱의 피해자들은 지쳤고 무서웠고 용기를 잃었죠.

 

한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외적 사건은 아니죠. 비참한 마음이 드실 겁니다. 신학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사제들의 거룩한 영성이 성을 통제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가톨릭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몇몇 사제들의 성적 타락과 권력형 성폭력은 그야말로 ‘들켰으니’ 스캔들처럼 언론에 보도되었을 뿐, 역사를 돌아볼 때 바티칸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죠. 하물며 개교회의 독자성이 뚜렷한 개신교 교회의 경우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야말로 ‘교회의 개별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 ‘개별 선택’의 압도적인 결론은 피해자를 다독이는 것이었죠. 지금까지 세 가지 논리가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것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입니다. 교회를 이끄시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며 행여 흠집을 내는 부정적인 부분을 가리는 것이 교회를 위하는 길이라는 조언이죠. 둘째는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온 ‘용서’의 덕목을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고 피해자 또한 다른 시간 다른 조건에서 다른 방식의 죄를 짓기도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사람이라면 용서하는 것이 맞다고요. 이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했던 권고는 빈번히 소환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셋째는 어이없는 논리지만 피해자를 오히려 가해자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데 그런 실수를 하시겠느냐, 이것은 자매가 유혹했거나 부적절한 시간이나 공간, 옷차림, 행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셋 중 어느 방법을 택하든 개별화되고 고립된 피해자는 결국 그 ‘논리’에 지배당하고 맙니다. 희생양을 자처하거나, 용서하는 ‘신실한’ 신자가 되거나, 유혹자인 자신을 자책하는 쪽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마태복음 5장)에서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동의 없이 주체적 경계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셨는데도 말이죠. 그것은 지옥에 갈 만한 끔찍한 범죄행위임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순결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접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엄한 인간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온전하게 주장해야 하는 ‘사람’의 범주에 남자와 더불어 여자를 포함하는 ‘혁명적’ 선언이셨습니다. 굳이 ‘혁명적’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구약법에 비교해서입니다. 재물손괴죄 정도로 응대했던 모세법을 넘어서, 차라리 범죄한 눈을 빼고 손을 잘라내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까지 말씀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엄격한 규범 윤리가 담긴 산상수훈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은 사도 바울이 말한바 ‘율법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이라는 논리이죠. 예수께서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다 지키라거나 혹은 인간이 지킬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고요. 오히려 지킬 수 없는 엄격한 율법을 제시함으로써 실패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이를 잣대로 삼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구해야 한다는 함의를 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리하게’ 적용한 남성들의 오랜 ‘전통’일 뿐이죠.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과 글은 힘을 가지니까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자 제자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건만, 정작 스승 부재 상태의 제자 공동체는 세상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게 되었던 거죠. 이제는 50대라서 당혹스러운 일들이 비교적 드뭅니다만, 저 역시 꽤 자주 불쾌한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특강 강사로 초대받은 공적인 상황에서도 부적절한 언행을 건네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죠. 제 옷차림이 부적절했냐고요? 그럴 리가요. 제가 끼를 부렸냐고요? 그럴 리가요. 그건 오랜 ‘허용’과 ‘반복 수행’이 만들어 낸 ‘제도적 습관’입니다. 잘못된 습관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먼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적을 지속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분명하게 ‘노(No)’를 선언할 때 생각보다 쉽게 교회 지도층의 남성들은 겁을 먹고 도망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을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야수의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거든요. 가스라이팅이나 자의적인 교리해석 등에 의해 자신이 혼란스러워진 상황이 아니라면,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경우 뒤로 물러납니다. 지옥 불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서도, 양심이 되살아나서도 아니죠. 지금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서예요. 하지만 개인에 따라 이런 명료한 분별력과 ‘아니요’를 선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방 훈련을 하듯 반복적인 훈련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미성년 아동들에게 성교육을 합니다. “아니요.” “싫어요.” “그만 하세요.” 등을 연습시키더라고요. 그런데 정작 여신도 숫자가 훨씬 더 많고 남성과 여성의 배치가 위계적인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그리고 필수적인 프로그램으로 그런 교육과 훈련을 하는 곳은 드물어요. 가끔 교단 총회와 같은 모임에서 형식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은 보았지만, 성도들을 향한 지속적 교육의 사례는 보지 못했죠. 무엇이 가스라이팅인지, 무엇이 자신의 성적 바운더리를 지키는 현명한 방식인지, 무엇보다 자의에 반하는 굴복과 종속을 예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 지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설명들이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가르쳐져야 합니다. 교재를 만들고 필수교과처럼 수행되어야 하죠.

또한 공식적인 상시 기관을 통해 개별 사건들이 계속 공식화되고 ‘공적’으로 치리되어야 합니다. 개교회나 교단 밖에서 권위를 양도받은 평신도 전문가들(법률가, 윤리학자, 상담심리가, 교육자 등)로 구성된 조직이나 기관이 있어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개교회’ 차원에서 임의로 수습하는 관행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듯 소위 ‘세상 법정’으로 끌고 나가 교회 망신을 주자는 말이 아닙니다. 내부자적 양심과 정체성을 가지고 실행하되 개교회를 ‘초월’하는 권위를 가진 집행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요더 사건’은 다시 주목할 만합니다. 메노나이트 구성원들은 처음에는 당황했고 무마하기도 중재하려고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죠.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양심선언과 조직화가 일어났습니다. 지방회 산하 <교회생활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상호책임 및 후원그룹> 등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검토, 논의, 결정 등의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몇 번의 권고와 치리에도 불구하고 요더의 습관(혹은 행동)이 바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대응이 바뀌었죠. ‘스캔들’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은 떠들썩하니 알고 지나더라도 말은 흩어지기 마련이죠. 그런데 이들은 요더의 잘못과 치리 과정에 대해 기사화하기 위해 보도자료를 준비했고, 메노나이트 계간지의 특집호를 통해 그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계간지 편집장이었던 존 로스의 특집호 발간사 부분을 볼까요?

이러한 투명성이 요더의 행동들을 공적으로 밝히는 차원에만 머무르거나 혹은 동일한 잘못을 저지른 기관이나 교회 리더들이 죄를 고백하고 마는 식으로 증발되지 않기를 반란다. 올바른 기억은 대규모 집단이 범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까지 나아가야만 한다. 이러한 인정은 교회로서 우리가 우상처럼 떠받들었던 그 사람의 권위에 대해 질문하지 못했다는 것을 공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봐야했던 것들을 보지 못했다는 점을 시인하며, 나약하고 상처를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모습으로 기꺼이 반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19쪽)

이 안에 ‘노력’과 ‘실천’을 위한 핵심적인 방법론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의 실수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대규모로 범죄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질문해야 하며, 잘못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잘못을 그치게 해야 하며,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적절하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해야 합니다. 듣고 나니 너무 뻔한 방법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글로 쓰기는 어렵지 않다고요. 기발하거나 새로운 제안도 아닙니다. 하지만 당장 시작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되어야 하기에 어렵다고 말씀드렸던 거죠. 잘못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는 인식 전환을 위한 교육부터, 제재와 징벌을 위한 법안 정립과 기관 설립까지, 다양한 층위의 ‘조치’가 체계화되어야겠죠. 지속성을 위해서입니다.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이 부정의를 ‘예외’로 치부하고 ‘성급한 용서’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반복되는 한 가부장제가 견고하게 문화적 습관으로 만들어놓은 여성에 대한 폭력적 응시와 행동은 교회 안에서 그칠 수 없을 테니까요. 당연히 갈등이 있겠죠. 소란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태초에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람’으로 지어놓으신 남자와 여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과정일 뿐이죠. 여기저기에서 이런 시도를 시작했다는 ‘복음(기쁜 소식)’이 들려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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