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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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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9월 27일 (화) 23:42:58
최종편집 : 2022년 09월 28일 (수) 13:36:01 [조회수 : 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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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처음 기록되었을 때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사이에는 사회·문화적 면에서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3천 년이나 2천 년 전의 청중에게 익숙했던 관습이나 표현이 지금 와서는 거부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 

성경을 읽을 때 사회·문화적인 차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 지식의 차이다. 현대의 과학적 수준에서 볼 때 창세기 1장을 비롯한 태고사는 과학적인 기록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그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사는 독자들은 그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복음주의자인 C. S. 루이스와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문화의 신학을 주장한 틸리히의 말을 좀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루이스는 “우리의 일은 영원한 무엇(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한 것―히브리서 13장 8절)을 우리 시대의 특정 언어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맥그래스도 “기독교 변증은 늘 문화 변화를 배경으로 이뤄진다. 복음은 항상 동일하다. 하지만 복음에 관한 물음과 복음이 맞닥뜨리는 도전은 문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이 기록된 사회의 문화와 현대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성경 본문을 우리 시대의 문화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기록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고 현대의 과학 지식에 맞게 해석할 수도 없다. 그런 경우에는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회·문화적 차이와 성경 읽기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면 강단에서는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을 지키면서 가정에 관한 성구를 가지고 설교한다. 어린이 주일 예배를 위한 대표적인 성경 본문은 자녀와 부모에 관한 권면이 기록된 에베소서 6장 1-4절이다. 그리고 부부의 관계에 대한 설교를 할 때는 에베소서 5장 22-33절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에베소서가 기록된 2천 년 전의 유대 사회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였기 때문에, 에베소서 기록자는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아내의 발언권이 남편의 것을 압도하는 지금 어느 아내도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설교자가 ‘복종’이라는 말을 그대로 전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오늘날 부부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교인들의 눈높이에 맞게 ‘복종’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권면하기 일쑤지만, 그 순종이라는 말도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요즘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옛날과 달리, ‘아버지(어머니) 사랑해요.’ 혹은 ‘아들(딸)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예를 들어보면, 잠언에서는 자식을 훈계해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말을 들을 때까지 사정없이 매질하라고 한다.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23:13)라고 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매질을 허용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우리도 사랑의 매라는 말을 하지만, 아동 체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지금 어느 목사가 잠언에서 체벌하라고, 그것도 죽지 않을 만큼 채찍으로 때리라고 했으니 아이들은 때리면서 키워야 하는 법이라고 강단에서 말한다면 교인들의 반응이 어떨까?

예수님은 이미 2천 년 전에 권위적인 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시고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는 비권위적인 표현과 단어를 사용하셨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전통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에베소서의 저자는 형제끼리 “피차 복종하라”(5:21)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겸손과 섬김 그리고 사랑과 희생을 몸소 보여주셨다. 예수님 당시의 권위적인 사회에서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복종이나 순종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다.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사용하던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고집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바꾸어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3천 년 전이나 2천 년 전의 표현을 지금 그대로 고집한다면, 그 옛날 표현에 익숙하지 않거나 그 표현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이 성경 말씀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태고사 읽기

태고사라는 말에는 그 기록은 태고적 이야기, 즉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옛날이야기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태고 시절에는 하와가 뱀과 대화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창 6:3) 용사를 낳는 시대, 즉 신화적 시대였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적 시대란 현대의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인 언어와 다른 언어로 사물을 표현한 시대를 말한다. 

우리는 보통 신화는 단순히 소박하고 임의로 꾸민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종교학자들은 신화가 종교적인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옛날 사람들이 고안한 방편이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화의 이야기 속에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20세기의 대표적 종교학자 멀치아 엘리아데는 『신화와 현실』에서 종교적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신화의 기능과 창조적 역할을 강조했다. 

20세기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역시 성경 기록자가 초월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화적 이야기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존 폴킹혼도 『과학 시대의 신론』에서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신화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오래전부터 인식된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신학자들은 현대의 과학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화시대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지 말고 기록자가 그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하려고 한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을 파악하려고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태고사에서 중심을 이루는 신화는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았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물로 멸망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늘에 닿도록 탑을 쌓아서 그들의 이름을 내려고 하자, 하나님이 그들의 방자한 행동을 보시고 그 탑을 허무셨다. 

이 이야기들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 그 죄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죄와 벌의 보편성에 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태고사에서 말하는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비롯해서 구약 전체의 주요 주제이고, 죄와 벌의 개념은 신약에도 들어와 있다. 신약에 오면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셨다. 따라서 태고사의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이야기들에 내포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의 독자들은 창세기 1장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지금 우리는 그 기록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 1장의 기록이 과학적이라고 강변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는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창조신앙을 읽어야 한다.


마치면서

20세기의 대표적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성경의 기록이 우리 문화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전적으로 거부해서도 안 되고 우리 문화에 맞지 않는 것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도 안 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메시지를 접할 때, ‘문화적 조옮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은 본문에 나오는 본질적인 계시를 밝혀내어, 하나님이 그 계시를 담기로 결정하신 문화적 형태로부터 분리한 뒤, 그것을 적절한 현대의 문화적 용어로 다시 옷 입히는 것이다.”

한스 게오로그 가다머의 말대로, 어떤 시대에서든 전해 내려온 텍스트를 자기 시대의 방법으로 이해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C. S. 루이스나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말대로,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기독교 변증은 항상 변하는 문화의 언어를 빌려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관습에 관한 옛 표현은 대부분 우리의 문화에 맞는 말로 바꾸어 놓을 수 있지만, 과학에 관련된 기록은 문제가 다르다. 과학에 관련된 옛사람들의 지식은 현대에 와서 대부분 오류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이 현대의 과학 지식과 맞지 않는 경우 그 기록을 우리의 지금 지식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없고, 더구나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과학 지식과 맞지 않는 성경의 기록을 무조건 비과학적이라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현대의 과학을 전혀 알지 못했던 성경 기록자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의 지식수준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그들의 신앙을 증언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기록된 시대 사람들의 언어를 동원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한 것이다. 엘리아데는 신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주 창조 신화라고 말했다. 신화의 시대에 기록된 그 글을 비과학적이라고 무시하기보다는 기록자가 거기서 그 당시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던 전능한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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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182.216.13.90)
2022-09-29 07:58:58
결국 인간들이 현대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그 해석이 다를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어떻게 하나? 그 해석이 나라마다, 목사마다, 신자마다 ,다를 텐데 토론하여 의견을 모아서 정통의견을 정하는 수준으로 가야하는 수순이고 이미 그렇게 기독교가 흘러왔다고 본다. 종교적인 메시지 말고 성경내부의 상호 모순은 어떻게 정리해야할까? 모순과 오류투성이인 성경을 이리 저리 꿰맞춰 좋게 좋게 해석하고 또 이 해석이 맞는지 고민하면서 신앙생활해야하나?
피곤한 종교다. 성경의 신화적, 문학적 성격을 인정하자는 얘기인데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여호와 신앙이 성립될 수 있는가? 그리스 신화와 단군신화를 현재에 맞게 해석해서 믿자는 얘기와 다른가? 같은가? 그런 신화와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겠지? 어떻게 다르지? 죄와 벌의 문제, 창조를 다루고 있으니 차원이 다르다고 하겠지...근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좋은데 그 서술 방식이 오류와 모순 투성이인데도 그 뒤에 있는 신의 계시를 알아내면 된다고 하는데 그 계시가 뭔지 해석을 둘러싸고 계속 갈등하면서 내려온 것인데 도대체 신화와 문학뒤에 있는 신이 있는 것이 맞는가? 인간들이 제 멋대로 해석하면서 신을 만들어 온 것이 맞다고 본다. 즉 신은 당신들이 만들어 온 것이다. 계속 신을 해석하고 새로 첨가하면서 신이 있다고 열심히들 믿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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