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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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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9월 18일 (일) 13:09:30 [조회수 : 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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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있는 용기
창 18:16-19
(2022/09/18, 창조절 제3주, 기독교교육진흥주일)

음성으로 듣기

   
 

[그 사람들이 떠나려고 일어서서,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데로 갔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바래다 주려고, 함께 얼마쯤 걸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며, 땅 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 이야기 속으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기독교교육진흥주일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대부분의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특히 교회학교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줌이나 온라인으로 학생들과 만난다고는 해도 그것은 미봉책일 뿐 직접 만나 대화하고 몸으로 부딪치는 것에 견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교회학교가 조금씩 본래의 역할을 되찾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교사들의 수고에 깊이 감사합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교사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교사로 일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를 때부터 교회학교에서 가르치고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배우는 게 가르치는 것’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가르쳐 보아야 자기가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모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의 일화도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1738년 2월 1일, 존 웨슬리는 미국이 인디언들에게 말씀을 전하려던 원대한 꿈을 포기한 채 영국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는 런던에 머물던 중 독일 출신의 모라비안 목사 피터 뵐러(Peter Böhler)와 가까워집니다. 어느 날 웨슬리는 피터 뵐러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돌아와 일기를 썼습니다. “나는 내가 불신앙인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것, 그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I was clearly convinced of unbelief, of the want of that faith whereby alone we are saved.) 깊은 번민에 사로잡힌 웨슬리는 뵐러에게 자기에게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비칩니다. 그때 뵐러가 한 말이 참 중요합니다. “그 믿음이 생길 때까지 설교하십시오. 그 믿음을 소유하게 되면 그 믿음에 대해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김동환, <‘목사 웨슬리’에게 목회를 묻다>, kmc, p.72-73에서 재인용) 웨슬리는 뵐러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확고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은 그런 의미에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가르침을 통해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가끔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섣부르게 학생들에게 죄의식을 주입하거나 교리적인 내용을 암기식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부탁하곤 합니다. 말랑말랑한 아이들의 마음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폭력입니다. 대신 학생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라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사람을 만들고, 사람 또한 이야기를 만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삶의 저자입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잉크를 찍어 어느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자기 삶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늘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참조해가면서 씁니다.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래서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달라집니다.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삶의 다층적인 요소들에 반응하면서 우리는 자기 삶을 써내려갑니다. 성경 이야기는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삶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우리 앞을 밝혀주는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더불어 생태적 감수성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자각하고, 그 모든 것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것보다 소중한 일이 또 있을까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풀꽃’)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이 진정한 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분주하게 사는 이들은 세상에 가득 찬 신비와 기적들 사이를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곤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들을 향유하지 못하기에 삶이 빈곤하다고 느낍니다.

• 사람이 된다는 것
김현경 선생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사람과 인간을 구별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종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사회가 우리 이름을 불러주고, 머물 자리를 마련해 줄 때 비로소 사람다운 삶이 가능합니다. 사실 신학이든 다른 학문이든 모든 게 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려는 노력에 수렴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실증주의적 태도를 가진 이들에게는 낯선 말이고 허튼 소리처럼 들리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자기 생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함부로 살 수 없고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잊지 말라’, ‘기억하라’는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끄셨는지를 망각할 때 사람다운 길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합니다. 그는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없습니다. 삶이 사랑의 빚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타인들의 고통에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람과 역사를 바라봅니다.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을 조작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괜찮은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것을 일러 타락이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입니다. 기억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member는 ‘다시’를 뜻하는 ‘re’와 ‘구성원’을 뜻하는 ‘member’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다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기억입니다. 집을 떠났던 탕자는 인생의 쓴 맛을 본 후에 비로소 제 정신이 들어서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습니다. 망각에서 벗어난 그 순간, 제 정신이 든 그 순간 그의 영혼에 빛이 스며들었고 그는 다시 아버지 집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 교사로서의 아브라함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한 에피소드에 덧대어져 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장막 앞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문득 자기 맞은쪽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달려가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 낯선 이들을 맞아들였습니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창 18:3). 그는 물을 가져오라고 할 테니 발을 좀 씻고,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계시면 잡수실 것을 마련해 오겠다고 말합니다.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 18:5) 이 구절은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사라가 준비한 음식을 기쁘게 먹었습니다. 마음이 상쾌해진 그들은 길을 떠나기 전에 다음 해 이맘 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있던 장막 어귀에 서서 이 말을 들은 사라는 그들의 말을 그저 유쾌한 덕담이라고 받아들이며 웃습니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라의 웃음은 나중에 태어날 이삭의 이름 뜻인 ‘그가 웃다’를 연상시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바래다 주려고 함께 얼마쯤 걸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창 18:17)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고, 땅 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까닭을 밝힙니다. 통속적으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구절에 주목합니다(창 15:6). 믿음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연관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들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선택된 것은 자손들을 잘 가르쳐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칠 교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옳고 바른 일은 미슈팟과 쩨다카의 번역어입니다. 미슈팟(mishpat, just)은 사법적 정의를 뜻하고 쩨다카(tzedaka)는 회복적 정의로 미슈팟에 자선을 더한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자선이 곧 쩨다카는 아닙니다. 자선은 자발적인 행위이지만 쩨다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부모는 신앙의 교사입니다. 자손들에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르치고, 그 언약에 따라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역할이 부모의 매우 중요한 의무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월절 의식입니다. 유월절 저녁 막내가 아버지에게 이 절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아버지는 유월절에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들려주어야 했습니다. 로마에 의해 나라가 멸망한 후에 거의 2천 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았지만 유대인들이 소멸되지 않은 것은 그러한 가르침과 기억이 지속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교육이야말로 유대인들의 든든한 동아줄이었던 셈입니다.

• 신앙 공동체의 과제
유대인들에게 1492년은 잊을 수 없는 해입니다. 그 해에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이 공민권을 박탈당하거나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땅에 머물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꽤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형식적으로 개종했습니다. 그들은 비밀리에 유대교 의식을 거행하곤 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conversos(개종자) 혹은 anusim(강요로 인해 개종한 자)라 불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Marranos(돼지)라는 멸칭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박해가 자행되던 1432년 유대인들은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Valladolid에 모였습니다. 그 모임에서 그들은 자녀들을 잘 교육시켜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공적 교육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고기, 와인, 결혼식, 할례의식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거기서 적립된 돈으로 교사를 채용해 성경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Jonathan Sacks, Covenant & Conversation, Deutronomy: Renewal of the Sinai Covenant, OUPRESS, p.102-3)

멸시와 천대를 받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살도록 후손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학교가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유대교 학교의 교육 목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들의 학교는 일반 학교들이 성취하지 못한 일들을 해야만 한다. 학생에게 살아 있는 존재의 신비와 놀라움을 느끼게 해주는 일, 자신이 무한하게 값진 존재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빚으로 얻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시간 속의 성(聖)을 깨달으며, 축제의 능력을 기르고, 하느님과 인간을 동시에 함께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도록 해주는 일이 그것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176)

이것은 유대인들의 교육 과제이지만 바로 우리들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이 늘어나고 있고, 경쟁의식에 함몰된 이들의 마음이 거칠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해독제는 다른 것 없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의 신비와 놀라움을 느끼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턱없는 우월의식을 느끼는 이들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 우리 삶이 무한하게 값지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지향하고, 작은 일에도 만족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교회학교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고, 마음을 다해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은 바로 이런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모들도 그러한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겉사람을 훈련하는 일 못지않게 속사람을 길러주는 일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인생이 고마움임을 늘 느끼며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런 삶을 가르칠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무너진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거룩한 직무를 감사함으로 수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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