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최재석 칼럼
과학 시대에 교회가 직면한 세 가지 도전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2년 08월 31일 (수) 16:32:08
최종편집 : 2022년 09월 30일 (금) 02:32:57 [조회수 : 2244]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17세기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 교회와 과학이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이 갈등의 초기에 교회의 세력은 과학을 압도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갈릴레오 사건에서 본다. 천체가 우주의 중심인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믿었던 교회에서는 1633년에 지동설을 주장하는 갈릴레오를 유죄라고 판결하면서 계속 지동설을 주장하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갈릴레오는 교회의 위협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후 점차 과학적 발견들이 교회를 흔들기 시작했다. 갈릴레오와 동시대에 살았던 케플러와 그다음 세대에 활동한 뉴턴의 천문학 연구로 지동설이 정설로 인정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지동설이 대세를 이루었다. 19세기에는 다윈이 자연선택이라는 맹목적 과정을 통해서 생물이 진화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창조설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러자 교회와 과학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싸움에서 교회가 이기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소위 신무신론자들이 진화 생물학과 신경 과학을 앞세워서 종교를 공격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비롯한 신무신론자들의 책들이 국제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이제 종교적 믿음은 구식이거나 과학의 시대에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졌다.

반면 20세기에 여러 신학자가 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과학에 관심 있는 신학자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여서 점진적 창조 이론을 내세웠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독자들은 이 말에 아연실색하겠지만, 지금 생물학계에서는 진화론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신학자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인 것은 갈릴레오를 파문했던 교회가 천문학자들이 증명한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천문 우주학의 발달로 우주가 빅뱅 이후에 신묘하게 진화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점진적 창조론이 더욱 힘을 얻었다.  

특히 천문학계에서는 이 신묘한 우주가 어느 지성에 의해 미세하게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기 시작했다. 여기에 양자 이론이 가세하여 우주의 신비와 미세 조정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우주의 신비 앞에서 아인슈타인이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고백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세 조정의 증거는 비록 신의 존재에 대한 연역적 증명은 아닐지라도 이 세계가 신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설계 논증을 설득력 있게 재무장시켰다. 

천문 우주학을 전공하고 영국 국교회의 감독이 된 존 폴킹혼은 물리학 및 관련된 학문이 유신론적 신앙을 지지하는 새로운 증거들을 제시해 준다고 주장하면서, 과학과 종교는 적이 아니라, 지식을 탐구하는 공통된 작업의 친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폴킹혼은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과학과 종교에 대한 질문들』에서 과학과 종교의 협력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과학은 ‘어떻게’에 대한 답이고 종교는 ‘왜’에 대한 답이다.”

폴킹혼이 과학과 종교의 협력적 관계를 주장한 서구의 대표적 신학자라면, 우종학은 그 방면의 한국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천문 우주학을 전공한 개신교회의 평신도로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깊이 연구했다. 그리고 그는 리처드 칼슨의 편저서 『현대과학과 기독교의 논쟁』과 폴킹혼의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를 번역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과학과 기독교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썼다.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를 썼다가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내기』(2014)라는 이름으로 확대 개정판을 냈다. 그리고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2017)을 쓰기도 했다.

우종학은 과학적인 이야기를 금기시하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과학과 신앙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어려운 과학 이론이나 용어를 빌리지 않고 과학과  신앙에 관한 책들을 아주 쉽게 썼기 때문에, 과학 지식이 없는 독자들도 그의 책들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이제 과학과 기독교의 협력적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종학의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에 나오는 <과학 시대에 교회가 직면한 세 가지 도전>을 소개하려고 한다. 

                         *  *  *  *  *  *  *  *  * *

지난 100년 동안 과학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수많은 과학적 지식이 이제는 보편적 상식이 되었다. 우주의 역사, 지구의 기원, 생물의 세계와 같은 경이롭고 놀라운 사실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지적 밥상 위에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년 전으로 날아가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과학 상식을 이야기해준다면 아마도 그들은 전혀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학의 시대에 2, 3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세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현대과학을 외면한다. 스마트폰과 위성통신 및 참단기술 같은 과학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고 있지만,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역사나 그 신학적 의미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요즘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면 대다수의 목사와 교인이 과학을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은 무신론자들의 영역에 넘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인 청년과 무신론자 청년 사이의 대화에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봄 직하다. 그리스도인 청년은 무신론자 청년에게 복음을 소개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무신론자 청년은 상당히 똑똑하고 논리적인 데다가 풍부한 과학지식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교회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꺼냈더니 무신론자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학이 다 밝혔잖아! 그런데 왜 나에게 신을 믿으라고 하는 거니?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과학이 밝혔는데 교회에 나갈 이유가 있을까?” 과학을 들먹이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그 청년에게 어떻게 복음을 소개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버린 그리스도인 청년은 복음을 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에둘러 화재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화는 우리 주변에서, 곧 직장이나 학교 혹은 사석에서, 그리고 인터넷과 SNS 영역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다. 과학에 근거해서 신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과학을 증거로 삼아 무신론을 주장하는 논쟁이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과연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일까?

무신론자 청년의 주장처럼 자연과학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한 적이 있었던가? 과학은 자연 세계를 초월하는 초자연적 존재인 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해줄 수 없다. 과학은 자연 세계의 인과관계를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하나의 설명 체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고 만지고 볼 수 있는 다양한 경험적인 데이터를 이용해서 자연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찾고 그 원리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그래서 과학은 자연 현상을 다룰 수는 있지만, 데이터를 얻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룰 수는 없다.

과학이나 철학에서 통용되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먼 외계 행성에 외계인이 살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증거가 없다고 해서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증거가 없으면 모른다는 잠재적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은 과학으로는 신의 존재에 대해 답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즉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반드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누군가가 과학의 권위를 빌려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제기할 때 적합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과학적 사고방식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바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구역장이나 교사 혹은 성경공부 리더를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은혜, 구속과 같은 기독교 용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바를 그들의 언어로 잘 설명하는 훈련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과학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은 케케묵은 고대의 설화처럼 생각되게 마련이다.

과학적으로 확실한 것만을 믿겠다는 과학주의에 물들어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바를 그들의 언어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연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는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잘 설명할 수 있도록 항상 잘 준비하라고 권면했다(벧전 3:15).                         

과학과 신앙이 충돌하는 듯한 현상을 접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회피다. 과학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단 과학 관련 논쟁이나 대화는 피하고 보자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과학에 관심도 없고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이 과학 상식이 풍부하거나 과학적 사고에 능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과학에 문외한인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을 논거로 삼는 무신론자의 주장에 맞서야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궁색한 대답으로 회피하는 것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취하는 일반적인 태도는 과학이 틀렸거나 불확실하다는 반론이다.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무신론자의 주장에 대해서, 무신론의 증거라는 그 과학이 가설에 불과하다거나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검증된 과학이 아니라는 식으로 과학 자체를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과학이 검증된 것도 아니고 엄밀한 정설도 아니라면 증거로서 권위를 갖지 못하게 될 테니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과학의 내용이 과연 가설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 분야의 전문 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인정하는 내용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과학으로 충분히 입증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가설에 불과하다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가령 지동설이 무신론의 증거라는 주장에 반대해서, 지동설은 과학이 아니고 가설에 불과하다고 방어한다면 이것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과학을 통해 드러나는 창조의 신비가 우주에 가득하지만,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더 큰 문제는 과학을 적대시하는 태도다. 과학을 통해 밝혀지는 자연의 역사가 기독교 신앙을 공격한다는 오해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 과학이 기독교에 던지는 도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 번째 도전은 과학 그 자체다.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 자체가 상당히 큰 도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과학은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경우 과학은 우리가 알고 있던 자연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고 이질적인 모습을 알려주면서 충격을 가한다. 수천 년 동안 믿어왔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깨뜨리거나, 천지창조가 6천 년 전에 일어났다는 믿음을 뒤집기도 한다.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역사는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창조하셨다고 믿고 생각해왔던 그림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과학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와 모순된다고 느끼기 쉽다. 과학이 새로운 자연의 얼굴을 발견해서 내놓을 때마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칫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역사를 밝혀낼 뿐이다. 과학은 하나님이 쓰신 자연이라는 책을 쓰신 방식이다. 하나님이 쓰신 책은 두 가지다. 특별계시인 성경과 일반계시인 자연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성경을 읽어내는 방식이 신학이며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라면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내는 방식이 과학이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성경이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은 둘 다 동일한 하나님이 쓰신 책이기 때문에 그 책들이 서로 모순될 수 없다. 

문제는 자연을 읽어내는 과학과 성경을 읽어내는 신학에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이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성경과 자연에 대한 해석이 얼마만큼 잘 되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1세기 기독교가 직면한 두 번째 도전은 과학을 무기 삼아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과학주의 무신론의 도전이다. 최근 리처드 도킨스를 중심으로 소위 새로운 무신론적 과학자들은 “과학이 바로 무신론의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종교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기독교의 외부에서 오는 이런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과학주의 무신론의 공격으로 인해 신앙을 잃었다는 경우들을 종종 접한다. 교회에서 리더 훌련을 받고 열심히 섬기던 청년이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고는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우리 주변에서는 이런 일이 꽤 많이 일어나고 있다. 

실상 그리 강력한 공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신앙이 무너지는 그리스도 인이 많다는 이야기는 거꾸로 그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지성적 토대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방증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교회가 직면한 세 번째 도전은 기독교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생한다. 이 문제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관련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내용까지 읽어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특히 근본주의적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극단적인 문자주의에 빠진다면 성경이 의도하지 않은 내용을 읽어내는 실수를 범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내용을 토대로 과학을 판단하고 재단하여 성경과 과학이 모순된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의 성경 읽기는 교회를 상당히 왜곡된 신앙으로 인도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근본주의/문자주의의 오류를 교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것인가가 과학과 관련된 세 번째 도전이다.

 

최재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02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