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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원망하는 의인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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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8월 01일 (월) 22:02:49
최종편집 : 2022년 08월 02일 (화) 19:24:34 [조회수 : 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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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실한 신앙인이 고난을 받는데, 불신자는 번영하는 것을 본다. 의인은 어려움에 처하는데, 악인은 형통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욥기를 인용하면서, 고난 후에는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고통의 순기능을 내세우기도 한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죄를 지은 일이 없으니 그가 고통당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누구의 말이 옳은가? 그리고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장황하게 욥을 질책하고 나서 마지막에는 욥의 편을 든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의인 욥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 말을 두 번 반복하면서(1:8; 2:3) 욥을 시험해 보라고, 단 육체는 해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사탄은 욥의 가축들과 노비들과 자식들을 모두 죽인다. 

이런 환난 중에서도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라고 말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1:21-22)한다. 

욥이 환난을 당하고도 흐트러짐 없이 의인답게 행동하자 사탄은 하나님에게 욥의 몸을 해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목숨을 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2차 시험을 허락하신다. 그러자 사탄은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욕창이 나게 해서 그의 몸에 극심한 고통을 가한다. 

그런 고통 중에서도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고 그를 저주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라고 말하면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는다. 

이런 욥은 의인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런데 친구들이 와서 그를 죄인이라고, 악인이라고 매몰차게 몰아세우자 그들의 공격에 예민해져서 그들을 원망할 뿐 아니라, 그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도 원망하면서 하나님께 그가 고통당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자기 자식이 죽어도 자기 온몸에 욕창이 생겨도 끄떡하지 않는 의인 욥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런 욥이 그의 친구를 만난 후에 절대 순종으로 무장된 로봇에서 살과 피가 있는 인간으로 변해 간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

욥기는 시가서로 분류되는 문학 작품이다. 그러나 욥기는 함께 무리지어서 시가서로 분류된 시편, 아가서, 잠언, 전도서와 장르가 다른 이야기체의 작품이다. 다른 네 편의 시가서는 신앙적 고백이나 교훈적 기록이기 때문에, 거기서 쉽게 신학적 주제를 찾아낼 수 있다. 신학자들은 흔히 욥기가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욥기에서도 신학적 주제만을 찾아내려 하는데, 그러면 욥기를 왜곡하게 마련이다. 

이 글에서는 욥기를 문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문학 작품인 욥기를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물론 문학 작품에 신학적인 의미가 담길 수 있지만, 문학 작품에서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보통 신학자들이 하는 것과 달리 욥기를 문학적으로 읽는다는 면에서 이 글에 ‘욥기 다시 읽기’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겠다.

문학 작품에서는 욥 같은 의인이라도, 스데반 같은 순교자조차도 육체를 지닌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대표적인 예를 그레이엄 그린의 『권능과 영광』(The Power and the Glory)에서 본다. 욥기의 작가는 3장 이하에서 욥을 괴로워할 줄 아는 한 인간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3장에 가면 세 친구가 그를 위로하러 오자 욥은 그의 고통이 극심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털어놓는다. 이런 고통을 당하느니 오히려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이런 고통을 당하느니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실토한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3:26) 자기 내면의 고민을 실토하는 욥은 1장과 2장에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던 욥과는 판이하다. 작가는 여기서 욥을 로봇이 아닌 살과 피를 지닌 인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욥은 그의 세 친구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들이 그를 위로하기를 바랐지만, 예상과 달리, 그 친구들은 그를 위로하기는커녕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내세워서 욥을 죄인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은 죄 때문이 아니라고, 자신은 의롭고 진실하다고 응대하면서 그를 정죄하는 친구들을 원망한다. 죄를 짓지 않았다는 욥의 말을 친구들은 무시하지만, 독자들은 욥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의 편에 선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친구들의 집요한 공격에 대해서 욥은 줄곧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응대한다. 그러자 친구들은 갈수록 욥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높인다. 그들은 욥이야 말로 구제받을 수 없는 악인이라고 입에 담기조차 힘든 악담을 퍼부으면서 욥을 저주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적 주장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십계명과 신명기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유대 민족이 벌을 받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그래서 이 인과응보설은 유대 사회에서 고정관념이 되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설이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으로 믿는다. 그들은 욥같이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선한 사람도 고난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획일화하는 교리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욥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번창하는 모순된 현실이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다는 사실이다. 욥은, 자기가 악인이 아니지만, 욕창으로 인해서 곧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왕 자기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얼마 남지 않은 날 동안 고통을 면하여 주시고 지금까지 자기를 지키신 것 같이 지켜달라고 간구한다. 이것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 욥의 간절한 소망이다. 

우리는 죽음의 위험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다.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을 받으면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하나님을 원망한다. 예수님도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다.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시기도 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욥은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이제 그에게 희망이 없다고 한탄한다. 그를 저주하는 친구들에 대한 원망이 커지면서 하나님이 무죄한 그에게 진노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한다. 그는 사실을 왜곡하는 친구들과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처리하시는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과 변론하기로 한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지만, 그의 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애원과 원망이 섞여 나온다. 이제 욥은 1장과 2장에서 재난을 당하면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던 강인한 의인 욥과는 확연히 다른 나약한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원망과 간청

욥을 악인이라고 몰아세우며 저주하는 친구들의 공격에 자극을 받아 욥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친구들을 책동하시고 죄 없는 그를 벌하시는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한다.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7:11) 

그리고 그는 하나님에게 왜 자기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알려 달라고 간청한다.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10:2) 그리고 의인이라고 인정하신 자신을 벌하시고 악인을 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한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10:3)

욥은 이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께 자기의 목숨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왜 자기에게 이런 벌을 주시는지 알려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한다.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13:22). 그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알려달라고 연거푸 간청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시자 하나님께 항의한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13:24) 

욥은 그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자기가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면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으니 안타깝다. 그러나 일면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알 수 없으니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두려움 사이에서 고뇌한다. 

욥은 무죄한 자기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원수로 대하신다고 다시 하나님을 원망한다. 심지어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16:12)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죄 없는 자기를 괴롭히시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원통한 그의 마음의 토로이다. 

욥은 하나님이 죄 없는 그를 계속 억누르시기 때문에 그에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23:2)이 생긴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가 하나님을 대면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고통을 제거해 달라는 자기의 호소를 들어주실 텐데,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니 그것이 안타깝단다. 그 안타까움이 반항으로까지 나아간다. 

29장에서 31장에 걸쳐 나오는 독백에서 욥은 과거에 자기가 악을 행하지 않고 선한 삶을 살았는데, 지금 그가 사람들의 비난거리가 된 것을 한탄한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 그를 치셔서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만드시고 하나님께 아뢰어도 대답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 하시오며 내가 섰아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다”(30:20) 이것은 원망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움의 표현 아닌가?

친구들의 공격이 심해질수록 친구들에 대한 원망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커진다. 이제 친구들의 논쟁에도 지쳤으니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싶다고 말한다.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31:35) 그가 하나님에게서 듣고 싶은 것은 ‘선하게 살아온 그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이다. 우리도 고난을 당할 때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가?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에게 자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고 그를 비난한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32장에서 41장까지 10장에 걸쳐서 엘리후와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처럼 욥을 질책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선한 사람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욥의 친구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엘리후와 하나님의 장황한 강론은 주인공 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욥기의 주제에 역행한다. 그리고 욥이 친구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앞부분과 달리 이 부분은 일방적인 설교이기 때문에, 두 부분의 형식이 아주 다르다. 이 부분이 내용 면에서 욥기의 주제 전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형식 면에서 앞부분과 어울리지 않는다. 일부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부분은 없는 것이 나을 뻔했다. 그래서 엘리후와 하나님의 설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종결부

종결부에서 하나님은 심판관으로 등장하신다.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하시는가 하면, 욥이 옳게 말했다고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에게는 번제물을 욥에게 가지고 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것을 명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속죄받아야 할 죄인으로 정죄하시는 반면, 욥에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신다.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을 정죄하시면서 욥을 칭찬하시는 것을 보고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욥의 친구들처럼,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는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후반부에서 엘리후와 하나님이 욥을 질책하기 때문에 그 설교의 영향도 크다.

그런데 주의 깊은 독자는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결백하다는 욥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친구들의 주장이 욥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 선한 사람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흥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욥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고난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 단정한다.

욥기에서는 의인도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인 욥이 고통당하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에게 그를 시험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죄를 지으면 고난을 받는다는 고정관념이 오류라는 것을 드러낸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오만이고 불경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비판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종결부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원망한 욥을 정죄하시지 않고 그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욥의 원망을 탓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쁠 때 노래하고 고통을 당할 때 신음하고 한탄하는, 감정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다. 인간에게 육체와 감정을 부여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원망하는 욥에게서 자신의 안타까움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신 것 아닐까? 

그리고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자기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알려 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사탄적인 행위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종결부에서 그의 간청이 도전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42장 2-6절에서 욥은 하나님께 자기의 어리석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고백하고 나서 자기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한다. 그렇게 간청하고 나서는 바로 회개하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고백과 회개 사이에 끼어 있는 이 간청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그 중간에 도전하겠는가? 그는 단지 알고 싶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욥이 고백하고 회개하면서도 대답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끝까지 무죄한 자가 고통당하는 이유를 알려 달라고 간청한다는 점이다. 그는 의문과 신앙 사이에서 고뇌하는 사람이다. 스페인의 사상가 미겔 데 우나무노는 『생의 비극적 의미』에서 현대인의 신앙을 ‘의심하는 신앙’이라고 말했는데, 우나무노식으로 말하면 욥의 신앙은 ‘알고자 하는 신앙‘이다

종결부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전보다 더 많은 가축과 노비와 자녀를 주시고 장수의 복까지 주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욥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감각이 없는 의인보다는 원망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알고 싶어도 하는, 인간 냄새가 나는 욥을 더 좋아하신 것이 분명하다.

욥기의 작가는 로봇처럼 무감각한 의인을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예수님을 닮은, 욕체와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욥기를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의인 욥을 살과 피를 지닌 인간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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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균 (222.113.251.135)
2022-08-03 16:20:56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7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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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182.216.13.90)
2022-08-02 20:48:56
참, 논리적이지 않은 성경 내용을 설명하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욥기를 문학이라고 인정하시면 성경의 한 부분인 욥기는 지어낸 이야기, 소설이 됩니다. 문학 아닌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이라고 하자니 내용이 무슨 말인지 애매하고 논리적이지도 않으니 난감하지요. 문학이 아닌 성경으로 접했을 때 황당했습니다. 여호와와 사탄의 합작으로 의인인 욥을 골탕먹이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사탄이 여호와 앞에 왔을 때 때려죽여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작당이라니요...다시 자식을 주었다고 했지만 인륜적으로 나중에 얻은 자식은 처음자식이 다시 온 것은 아니지요...대단들 하십니다. 이런 내용이 있는 데도 믿으시는 분들이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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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nuree (222.113.251.135)
2022-08-03 16:27:13
성경을 모두 사실과 역사로만 믿는 것을 문자주의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신화나 소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은 소설만 있는 게 아니고 시나 지혜서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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