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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거룩하게 하라는 소명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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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7월 30일 (토) 01:11:37
최종편집 : 2022년 07월 30일 (토) 01:17:33 [조회수 : 2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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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솔로몬은 여기저기에 많은 궁궐과 성을 지었지만 아직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성전을 지을만한 땅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성전을 짓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가 어딘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궁궐을 빠져 나와 언덕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혹시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덧 그는 모리아 산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에 있는 커다란 올리브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동안 둘러보았던 아름다운 땅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무슨 일이 벌어지나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더니 이쪽 밭에서 저쪽 밭으로 밀 짚단을 옮겨놓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도둑이구나 싶어 그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 하나가 나타나더니 저쪽 밭에서 이쪽 밭으로 밀 짚단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둑이 다른 도둑의 것을 훔치는 격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 밭의 주인들을 소환한 솔로몬은 그들이 친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은 먼저 동생을 불러내 어찌된 일인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형님과 저는 아버지로부터 똑같은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형님은 아내와 세 명의 자식도 있고 저는 혼자 몸입니다. 그러니 형님은 저보다 식량이 더 많이 필요한데도 저한테서는 단 한 톨도 가져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밤중에 밀 짚단을 옮겼던 것입니다." 왕은 동생을 내보내고 형을 불렀다. 형의 말은 이랬다. "나는 가족들이 여럿 있기에 농사를 짓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동생은 혼자 몸이라 농사를 지으려면 많은 사람을 고용해야 하니 곡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통 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아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놀라운 우애였다. 왕은 두 형제를 함께 불러 그들을 껴안고는 말했다. "그 밭을 나에게 팔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이미 돈독한 형제애로 그 땅을 신성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구나.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며, 그보다 더 건전한 초석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성전 혹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입지조건, 투자 가치, 발전 가능성이 아니다. 땅을 신성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존재이유이다. 토라는 언약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야말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 땅은 무고한 이들의 피가 흐르지 말아야 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한숨이 스며들지도 말아야 한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네온 십자가가 도시의 밤을 밝히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또 다른 의미의 애굽이다. 억울한 이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다.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생산성을 높이고 인건비를 줄이는 일에 집중하는 순간 노동자들은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위험은 외주화하고 이익은 독점하려는 자본의 욕망 뒤에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웃고 있다.

저마다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람들이 그런대로 질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은 사회적 계약 덕분이다. 계약의 핵심은 이익이다. 내게 이익이 있다고 여길 때 우리는 계약 관계에 돌입한다. 이익이 없다고 여길 때 계약은 무효화된다. 계약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경쟁이다. 경쟁은 늘 승자와 패자를 낳는다. 승자는 이익을 독점하고 패자는 원망을 내면화하고 산다. 불안과 긴장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성경은 계약이 아닌 언약에 근거한 세상을 그려 보인다. 언약 공동체의 핵심은 이익이 아니라 관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라 ‘우리’이다. 개별적 존재인 ‘나’를 ‘우리’로 묶어주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언약에 참여하는 이들은 공유된 비전에 의해 움직이고, 서로에 대해 책임을 다한다. 교회가 사랑과 우애라는 기초 위에 우뚝 설 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김기석/청파교회
(* 국민일보 2022/07/06, '김기석의 빛속으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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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2-07-30 04:31:12
言約과 契約의 관계는 上下의 관계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언약은 말로 한 약속이고, 계약은 증거(문서 따위)로 한 약속이다. 그저 말로 한 약속은 약속한 적이 없다고 발뺌할 수도 있고 기억에 가물가물하여 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말로서 한 약속보다 증거 있는 약속이 필요하다. 언약과 계약은 이런 차이가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말로서 전하지 않고 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의미를 생각해보면 하나님 역시 말로만 하는 언약 못지않게 증거 있는 계약이나 증거 있는 말씀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역시 “나는 부활할 것이다.”라고 단순히 언약만 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은 후 마리아 등 제자 앞에 부활한 모습(옆구리에 난 상처)을 보이는 증거까지 제시했다.

언약은 아주 귀중한 것이고, 계약은 아주 허접한 것이란 무지몽매한 二分法的 思考로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담을 수는 없다.

경쟁이 왜 나쁜가? 예수님은 그저 돈을 땅에 묻어 둔 사람과 돈을 활용하여 가치를 창출한 사람 중에서 그저 돈을 땅에 묻어 둔 사람을 질타하기까지 했다.

계약이 왜 나쁜가? 자본과 노동은 서로가 필요하다. 어느 한 쪽이 없으면 반신불수나 다름없다. 상호 계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처벌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게 고장 난 게 문제다. 노동과 자본이 필요에 의해 계약하는 그 자체를 악마화 시키는 건 온당치 못하다. 요즈음 노동 쪽의 힘이 무척 세져서 자본 쪽이 도리어 노동 쪽의 눈치를 살피는 지경이다. 대한민국은 민노총 천국 아닌가? 철지난 마르크스 式의 약자 코스프레도 한 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 하면 꽉 막힌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밖에 없다.

단순무식하게 이분법을 이리저리 동원하여 <계약공동체>를 폄하하는 방식으로 <언약공동체>라는 보통의 인간이 도달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理想鄕을 그리워하는 건 각자의 자유이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결코 <계약공동체>를 무시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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