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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귀한 보배, 참 기쁨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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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7월 24일 (일) 16:20:37 [조회수 :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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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귀한 보배, 참 기쁨의 근원
딤전 6:17-19
(2022/07/24, 성령 강림 후 제7주)

음성으로 듣기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 아름다운 이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방학을 맞은 초중고생들의 얼굴이 환합니다. 많은 이들이 휴가를 떠나거나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 누적되었던 무거움을 말끔하게 덜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적 우울이라는 말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꽤 많은 이들이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전보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면서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남들과 비교하며 살기 때문일 겁니다. 가을 햇살처럼 맑은 얼굴을 보기 어렵습니다. 가끔 인용하는 시입니다만 함석헌 선생님은 ‘얼굴’이라는 시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얼굴 하나 보러 왔다’고 말합니다. 얼굴은 얼의 골짜기라지요?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얼굴은 우리 내면의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조금 못 생겨 보여도 맑고 아름다운 얼굴이 있는가 하면, 잘 생겼지만 어둡고 왠지 옹졸해 보이는 얼굴도 있습니다.

“참 고운 얼굴이 없어?/하나도 없단 말이냐?/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 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함석헌, ‘얼굴’ 중에서)

이런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목사의 상투어구가 아니라, 제 신학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입니다. 저는 오늘 청년 교우 서해나 씨에게 ‘주는 귀한 보배, 참 기쁨의 근원’을 불러달라고 청했습니다. 아까 들으신 바로 그 곡입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마음이 울울할 때면 저는 일쑤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 얼굴이 제 마음 속 어둠을 걷어낼 때가 많습니다. 많은 찬송 시인들도 유사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한 주 내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찾아보며 조용히 불러보았습니다. 찬양 속에서 고백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88장)
“성부의 어린 양이 죄 지고 가시니 내 몸에 당할 형벌 다 대신하셨네/내 죄가 추악하나 그 피로 씻으면 눈 같이 희게 되어 티 하나 없으리”(82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96장)

• 자기를 비우심
물론 저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맑은 웃음과 고요함만 보지는 않습니다. 병으로 신음하는 이들과 귀신들린 이들을 보며 애태우시던 얼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시던 얼굴, 성전을 시장으로 바꿔버린 이들을 내몰면서 진노하시던 얼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던 절박한 얼굴, 십자가 위에서 조롱하는 무리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던 얼굴,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하시며 평온 속에 빠져들던 얼굴, 그 다양한 표정의 얼굴에서 저는 참 사람과 참 하나님을 봅니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사는 일이 지리산가리산 종잡을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주님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거룩의 현존’ 앞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주님은 자아를 말끔히 여읜 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에게는 지켜야 할 ‘나’가 없었습니다. 나의 이익, 나의 체면, 나의 입장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보냄을 받은 자’임을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삶에는 뜻이 없다고 달관한 듯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란 우연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 가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뜻 따위는 없다고 여기고 사는 것도 하나의 태도이고, 자기 생명이 소명이라고 느끼는 것도 하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데 바쳐졌습니다. 주님은 보내신 분의 뜻을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 6:39). 이 단순한 선언을 복잡한 신학 이론으로 덮을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길 뿐 아니라 그들이 영생을 얻도록 도우려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일쑤 다른 이들로부터 내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8:9)

바울은 부요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때의 가난은 물질적 재화가 부족한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바울의 케노시스 기독론, 즉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자기를 비워 종의 몸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신 겸비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해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 합니다. 그의 자리에 서 보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을 돕기 위해 주님은 피와 살을 가진 분이 되셨습니다. 몸소 시험을 받으셨기에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철저한 자기 비움 덕분에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꿈을 품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와 깊이가 이 강생의 비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 속에 담겨 있습니다.

• 가난하다는 것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 6: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경험과 배치되는 말씀입니다. 가난이나 굶주림은 결코 유쾌하지 않습니다. 기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가난과 굶주림은 사람을 절망의 벼랑 끝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칫 잘못하면 자기 인생을 실패로 규정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부유한 이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적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선망’과 ‘원망’ 사이에서 바장이는 이들은 늘 자기의 결핍에만 마음을 두고 삽니다. 이미 주어진 것조차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시선을 좀 바꿔보라고 하십니다. 딱한 이들은 오히려 남이 누려야 할 몫까지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부유한 듯하나 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16세기의 사상사인 몽테뉴는 “결핍이 아니라 풍요가 오히려 탐욕을 만든다”(미셸 드 몽테뉴, <에세1>, 심민화·최권행 옮김, 민음사, p.130)고 말했습니다. 돈이 만일 우리를 오만하거나 무정하게 만든다면 돈은 행운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탐욕스러운 부를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편에 서서 세상의 불공평과 억압을 제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세워 가난한 이들이 도둑맞은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려 하십니다.

가난 그 자체를 미화해서는 안 되지만, 부를 성공의 척도로 삼는 태도는 지양해야 합니다. 가난이 때로 복이 되는 것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자리에 서 본 사람이라야 지금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 속에 있는 보배’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히브리의 지혜자는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이 있지만, 정말 귀한 보배는 지각 있게 말하는 입”(잠 20:15)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보배”(사 33:6)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문득문득 일어날 때, 바로 그 때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앞에 열리는 순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과 개종 이방인이 많은 공동체의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적 경건 혹은 바리새파적 경건에 오염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을 경건으로 호도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의 가난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이란 겸손하고 유순하게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 것이라곤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넉넉함 안에 머무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가난입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만 다른 이들을 부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가난의 반대말은 부요함이 아니라 오만, 자기만족, 자기주장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 하여 다 선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면서도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도 많습니다. 부유하다 하여 다 악하지도 않습니다. 부유하지만 겸손하고 너그러운 이들도 많습니다.

• 앞날을 위한 든든한 기초
세상은 부유한 이들을 존중합니다. 돈은 매력적입니다. 돈으로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마치 자신이 전능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돈이 많은 이들은 어느 곳에 가든 당당합니다. 주눅 드는 법이 없습니다. 돈이 주는 권력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들에게 돈은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바울은 돈의 위험을 잘 알았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전 6:10). 하지만 돈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잘못은 사용해야 할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돈 중독에서 해방되는 길은 없을까요? 속으로 일단 원없이 가져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분도 계시지요? 허망한 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부자들에게 꼭 가르쳐야 할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는 것이야말로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존 웨슬리는 돈의 편리함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이 ‘모든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편리한 수단’이라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바람직한 돈 사용의 예를 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중에 있는 돈은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돈은 여행자들이나 타향인에게 거처할 곳을 마련해 줍니다. 그것은 과부들에게는 남편과 같은 자리를, 고아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는 억눌린 자들을 보호할 수 있으며, 병든 자에게는 건강을, 고통받는 자에게는 안위를 줄 수 있습니다. 눈먼 자에게는 눈과 같이 되고, 절름발이에게는 발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문에서 끌어올릴 수도 있습니다.”(<웨슬리 설교전집 3>, ‘돈의 사용’, 한국웨슬리학회 편, 대한기독교서회, p.284-5).

웨슬리는 화려한 식사, 값비싼 의복,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인해 돈을 함부로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필요 이상의 자랑이나 정욕, 더 많은 허영심이나 우매함, 해로운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꼭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1) 이것을 지출할 때 나는 나의 신분에 맞게 행동하고 있는가?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로서 행동하고 있는가? 2)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하고 있는가? 3) 이러한 행동과 소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 될 수 있는가? 4) 이러한 일 때문에 내가 의로운 자들의 부활이 있을 때 상급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앞의 책, p.297)

예수님은 당신의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셨기에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 철저한 자기 비움이 있었기에 주님의 얼굴은 맑았고 아름다웠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빕니다(고후 4:6)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게 되기를 빕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어둡고 냉랭한 세상을 밝히는 따뜻한 빛이 되기를 빕니다. ‘주는 귀한 보배, 참 기쁨의 근원’, 이것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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