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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햇볕같은이야기
최용우  |  9191a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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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6월 26일 (일) 15:07:27
최종편집 : 2022년 06월 26일 (일) 15:12:33 [조회수 :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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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

   
▲ 발에 못박히신 예수님(사진:최용우)

7260.기독교 사상의 위대함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사상의 위대함’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을 성경으로 기록했다면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은 우리가 쉽게 ‘구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리로 정리해 놓은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믿는 모든 기독교의 근간은 어거스틴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어거스틴주의(Augustinism)자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철학, 자연과학, 음악, 역사에도 탁월한 사람이었는데 각 분야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탐구한 것들이 알고 보니 어떤 ‘자연 법칙’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밝혀내고 허탈해졌습니다. 그는 ‘마니교’라는 종교에 빠졌는데 사실은 마니교가 ‘거짓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세상 ‘자연 지식’의 학문으로는 행복이 없음을 확인하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연 법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지식의 근원인 절대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집어들고 읽으라! 집어들고 읽으라!”라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곳에 있던 ‘로마서’를 집어들고 읽다가 바울의 ‘구원’을 만나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는 기독교 안에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야 하는 이유와 자연 법칙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하님의 도성’이라는 엄청난 책을 써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의 피라밋 맨 꼭대기 꼭짓점인 것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입니다. 기독교는 전 세계 인구 숫자만큼 많은 그 생각들을 하나로 모아버리는 위대한 사상입니다.

   
▲ 십자가 아래 두 마리아(사진:최용우)

  7261.기독교 윤리의 위대함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그 이유는 두번째로 ‘윤리의 위대함’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자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따라 살기에 충분한 은혜를 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기독교는 신앙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이 계획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인류 구원 사역’을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하며 이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믿게 하는 것을 ‘전도, 선교’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배워서 아는 ‘지식종교’입니다.
 가톨릭은 신앙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와 ‘교부신앙’과 ‘수도원 전통’을 따르는 가톨릭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초언어 초논리 초사고적입니다. 히브리어 ‘안다’인 ‘야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가르치고 체험하는 ‘체험종교’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지식종교, 체험종교의 구분이 별 의미 없습니다. 기독교와 가톨릭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반반씩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안에도 체험이 가득하고 가톨릭도 성경공부 열심히 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사상과 윤리는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도 그것은 가장 고차원적인 윤리적 삶을 살게 합니다.

   
▲ (사진:최용우)

 7262.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자 예수님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서 30여년을 사셨는데 그분은 ‘기도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아버지 요셉의 집에서, 산이나 광야나 아침 해가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밤이나 낮이나,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스럽고 간절한 기도, 십자가에서도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무엇을 기도하셨는지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시기까지 하셨지만(주기도문), 정작 예수님 자신의 기도 내용은 기록된 것이 두세 번밖에 없는데, 그중에 두 번의 기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6:3)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고 예수 스리스도를 알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만 구원과 행복과 영생에 도달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적인 수단에 탁월한 자들은 ‘혼’이 강하여 ‘복음’이 이해되지 않거나 하찮게 생각됩니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전1:21). 그러나 어린아이들처럼 영이 맑고 잘 흡수하는 영혼은 하나님을 금방 알고 금방 느낍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스스로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식입니다.

   
▲ 망개(사진:최용우)

 7263.도반 친구

 기독교 신문을 넘기다 보니 아무개 부흥사님의 부흥회 안내 광고가 실려 있었는데, 그 타이틀이 <주의 종 ooo >이네요. 광고의 내용에도 이름 앞에는 꼭 ‘주의 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확실히 그분은 ‘주의 종’인 것이 맞나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제가 묵상한 말씀은 “나는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주인은 종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는 내 친구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모든 말씀을 너희에게 다 말하였다.”(현대어성경 요한복음15:15)

 만약 아무개 부흥사님이 죽어도 나는 ‘주의 종’이라고 고집하신다면 주인은 종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그분은 주인의 비밀을 모르는 것이 맞죠? 아버지께서 ‘공유’하신 말씀을 다 공유받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흥사라 말을 잘하니 분명 유창한 변명으로 이런 질문 정도야 여유롭게 빠져나가실 겁니다.
 예수님이 “이제 우리는 친구야”라고 했을 때는 서로 말을 트고 “야! 자!” 하자는 그런 수평적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도 알고 제자들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함께 찾아 나서는 도반(道伴)이다. 그런 뜻이 아닐까요? 도반(道伴)이란 ‘함께 도를 닦는 벗’이란 뜻입니다. 
 저는 ‘주의 종’보다는 ‘예수님의 도반’이 되고 싶습니다. 남녀노소, 재산과 학식, 신분 명예 외모... 이런 모든 것을 떠나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들과도 ‘도반’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그것을 공유하면서 함께 기뻐하는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 세종도서관(사진:최용우)

 7264.가장 위대한 지식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고상하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알기로 작정하는 순간에 성령님을 마음에 보내 주셔서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 성령님 흉내를 내는 ‘인간’ 이만히나 안상옹 같은 가짜에게 속으면 재산 다 뺏기고 신세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가 활동을 할 때와 그 내적 활동으로 인해 무엇인가가 생성된 것 같으면 그것은 마음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생성된 것입니다.(롬8:2) 그것은 마치 임신한 여자가 배 안에서 느껴지는 태동으로 인해 태 안에 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격과 자아와 내면에서 그런 생명의 활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영혼이 정말 성령님을 영접했는지(성령을 받았는지) 진지하게 확인해 봐야 합니다.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뿌린 ‘씨’입니다. 우리는 알맞은 양분을 주어서 씨가 잘 자라도록 키워야 합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하나님께서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성령’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중에 가장 귀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이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세상 지식으로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도, 믿는 것도 힘들고 받아들이는 것은 더 힘듭니다. ⓒ최용우 https://cyw.pe.kr
♥좋은해, 밝은달 아빠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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