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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현대 종교들, 그리고 미래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에 관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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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5월 23일 (월) 13:47:35
최종편집 : 2022년 05월 23일 (월) 13:49:14 [조회수 : 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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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현대 종교들, 
그리고 미래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에 관한 이야기들

강연: 로버트 M. 제라시 교수 (Prof. Robert M. Geraci)
2021-22 한국연구재단 한미인문분야 특별교류 협력사업 강연


1. 서론

   
로버트 M. 제라시 교수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 종교와 인공지능(AI) 연구는 공동의 협력생산 과정에 있었다. 이 과정에 단일한 방향은 없으며, 이는 지역적으로 (어떤 주어진 문화적 맥락 안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종교와 과학은 분리될 수 있거나 분리되어야만 한다거나(Gould 1999), 그 둘은 충돌하고 있다거나(Draper 1874; White 1896), 또는 종교와 과학은 협력적인 대화 또는 통합적인 세계관에 참여해야 한다(Barbour 1990)는 주장들이 제안되었다. 사실 종교, 과학, 기술의 관계는 그러한 유형들 안에 쉽게 포함될 수 있지 않다. 오히려 신화 속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히드라(Geraci 2020)에 더 가깝다. 종교와 인공지능의 복잡한 교차점들은 종교적 관점들을 수정하게 하고, 인공지능 개발에서 종교적 동기들을 도입하도록 이끈다. 

과학적 조건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물적 조건들은 우리의 문화적 조건과 얽혀 있다. 이것은 경제, 예술, 건축, 공학 그리고 다른 과정들이 그 구축된 환경 속에서 신화, 민속, 오락, 윤리, 에티켓, 그리고 종교와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목록들 중 어느 것도 포괄적이지 않으며, 물적 실재나 문화 담론의 가능한 모든 차원을 표시하지도 않는다. 이 목록들은 단지 우리가 구축한 것과 생각하는 것이 서로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우려를 담아내는 그릇일 뿐이다. 우리의 현재 관심사는 디지털 기계, AI 및 로봇으로부터 기인하고, 그리고 이것들이 종교적 사고(ideas)와 실천(practices)에 의지하고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있다. 

이러한 물음을 탐구하는 이유가 자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단지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지적 자극을 위해 우리가 종교와 인공지능의 관계를 숙고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심사들이 내가 이 분야에 뛰어들게 된 주된 동기였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오히려 나는 종교와 인공지능의 교차점들에 문화적, 정치적 권력(관계)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교차의 시점을 찾고 종교와 인공지능의 장점과 결점을 탐문하는 일은 개입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살고 있다. 기후 변화에서 정치적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실존에 대한 위협이 점점 더 실재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단지 그러한 인식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보스트롬(Bostrom 2002) 외 여러 사람들이 정의하는 실존적 위협은 우리 인간 종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폭주하는 지구 온난화는 지구가 많은 종들을 지탱할 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온도를 상승시킬 수 있고, 그로 인해 파국을 초래하거나 심지어 인간의 생명을 완전히 앗아갈 수도 있다. 일론 머스크에서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빌 조이(2000)가 이것 더욱 유려하게 표현한- 많은 논평가들이 인공지능을 인류에 대한 실존적 위협들 중 하나로 꼽았다. 나는 터미네이터 로봇들이 부추기는 공포스러운 예측들을 무시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법, 기업, 군사 영역에 배치되는 인공지능이 많은 정치적 우려를 야기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공지능 개발에서 종교적, 문화적 가치가 갖는 역할을 이해하는 일은 그 개발에 개입할 기회를 제공한다. 

중요한 것은 종교와 인공지능에 대한 문제를 지역적 관점과 전지구적 관점 모두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영토와 대륙의 경계를 넘어 어떤 종류의 인공지능에 대한 비전이 공유되고 있는가? 인공지능에 대한 어떤 류의 비전이 비록 지역적 제약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전지구적으로 공유되어야만(ought) 할 것인가? 인공지능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그래서 어떤 형태의 발전을 중시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존재하고 어떤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 미국과 유럽의 인공지능 전문가들은 우리가 신과 같은 기계를 만들고 우리의 정신을 로봇 신체에 업로드하여 특이점 이후(post-Singularity) 영광스런 삶에 합류하는 세계관을 주창하였다. 이 생각은 유럽과 미국의 서구 밖으로 퍼져 나가서, 예를 들면 인공지능에 대한 인도(India)의 관점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이 세계에 존재하며, 적어도 이들 중 일부는 그들이 우리의 미래 기술에 제공하는 가치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인정을 받아야 마땅하다.

 

2. 유럽과 북미의 종교와 공학에 대한 간략한 역사


종교적 관점이 인공지능 기술 안에서 그리고 그 주변에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보기 위해, 우선 현대 유럽과 북미에서 종교와 기술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었는지에 대해 기술할 것이다. 나는 디페쉬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 2000)가 말하는 “유럽을 지방화하기(provincializing)”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즉, 역사가 그저 거침없이 서구적 가치나 서구적 관점을 향하여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대신에 유럽이나 북미의 관점과 역사적 궤적은 그 자체로 세계의 다른 지역의 그것과 함께 존재하는 특정한 문화적 궤적의 사례들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는 다른 가치들, 관점들, 그리고 역사적 과정들이 존재하고, 이것들은 세계 역사와 인류의 미래 전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서구적 가치들만큼 적법하다. 

그러나 다음 세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나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서구”라고 명명하는 곳에서 일어난 일들 중 일부를 묘사하고자 한다. 첫째, 서구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지리적, 문화적 연속체(nexus)이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한국의 관점에 대해 듣기를 고대하고 있다! 둘째,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에 대한 초기 연구의 상당 부분이 미국에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인공지능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유통되는 글로벌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해왔다. 셋째, 인류 문화에서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의 역할을 탐구해 온 공상과학 문학의 상당량이 영어로 쓰였고, 그것은 유럽과 북미의 관점들이 담지한 권력을 더욱 확장시켰다. 관점들 자체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기술에 대한 서구의 접근은 기독교 신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서구 기술개발의 많은 부분을 추동하는 아이디어는 바로 세계와 인간 안에서 완전성(perfection)을 성취하려는 기독교적 목표들이다.

데이비드 노블(1999)은 기독교와 기술에 대한 매우 중요한 역사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역사가 어떻게 20세기를 형성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도 제시한다. 그는 유럽의 기술의 부상(rise)이, 특히 기독교 수도승들의 작업을 통해 경제적 목표들에 협력했던 신학적 목표들과 어떻게 함께 등장했는지 주목한다. 많은 관찰자들에게 경제적 목표는 (이익, 효율성,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신학적 목표는 그다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노블은 중세 기독교인들이 기술(technology)을 적그리스도(AntiChrist)에 대한 투쟁의 도구로 보았고, 따라서 세계와 인류의 미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를 근대 초기 유럽으로 데려가는데, 오늘날 우리가 과학자라 부르는 자연철학자들은 당시에 기술이 인류가 성서에서 말하는 타락(Fall)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겼다. 

두 사람(아담과 이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금지된 선악과를 먹었다는 고대 유대인의 신화가 있다. 그 신화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그들이 살고 있던 낙원의 정원에서 추방한다. 신화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유럽의 기술 발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불복종과 추방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언급한다.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은 초대교회 신학자들을 따라 이것을 원죄라고 기술하며, 이 원죄가 모든 인류를 죄악의 본성으로 물들였다고 믿는다. 유대인들이 이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전제에서 근대 초기 유럽 철학자들은 타락이 세계가 불완전하고 인류도 그렇게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노블과 사이먼 셰퍼(2002)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어떻게 초기 근대 기독교인들이 타락 이전에 인류는 완전했고, 따라서 그 지식에 있어서도 완전했다고 생각했는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기술이 이 완전을 되찾는 방법이 되었다. 예를 들면, 망원경은 아담이 불복종과 추방 이전에 지녔다고 믿어지는 원거리 시력과 이해를 가능케 해 주었다. 회복을 향한 이 신학적 탐구가 -즉, 구원이- 근대 초기 유럽의 과학과 기술을 견인했다. 

그와 동일한 신학적 과정들이 기술 발전에서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북미대륙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대륙을 가로지르는 확장은 세계를 완전케 하기 위해 하나님이 명하신 임무로 여겨졌다. 데이빗 나이(David Nye 2003)는 이 과정에서 기술의 역할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개척지로 나아가면서 미국 시민들은 쟁기, 도끼, 철도, 그리고 다른 기술들의 활용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았다. 노블이 중동의 이슬람교도들을 물리치려는 유럽 십자군 원정에서 기술과 기독교의 병합이 담지한 추악한 면을 드러내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이러한 기술-신학적 비전이 미국 원주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백인 정착민 식민주의를 조장하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신학과 기술의 관계를 잘못 설정하면, 혼란과 파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인공지능과 종교 이야기를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20세기가 도래하면서 많은 평론가들은 세속주의를 종교의 쇠퇴와 죽음으로 보았다(예: 프로이트[1927] 1988; 버거 1967[1990]). 이후의 이론가들(예: 스타크와 베인브리지 1986)은 이것이 부정확한 예측이었고, 세속문화는 오늘날 우리가 다원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더 가깝다고 지적했다: 대체로 진리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신구의 여러 종교 전통들의 실존. 세속 시대에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란 없다. 오히려 우리는 클라크 루프(1999)가 명명한 것처럼 “영적 시장”(spiritual marketplace)에 있다. 그 시장에서는 많은 아이디어가 교차하고, 결합하고, 경쟁한다. 

세속주의의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과학과 기술 속에 종교적 사상들이 혼재(obfuscation)되어 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이제 종교와 과학이 분리되어 있고, 그것들이 다른 메커니즘과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종교적 사상들은 과학적 실천 속에 감춰진 채 여전히 남아있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이를 위한 핵심 공간이 바로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의 부상(rise)은 새로운 종교적 운동인 트랜스휴머니즘의 부상(rise)과 동시에 일어났다. 모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그들의 운동을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것이 철학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지금 그 모든 것을 풀어 설명할 시간이 없다. 그것은 더 큰 이슈에 비해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문제는 트랜스휴머니즘이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기독교적 목표들을 달성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특히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을 사용하여 인간의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한계를 초월하려는 노력이다. 즉,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유전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여러 다른 기술들을 통해 우리가 더 똑똑하고 강해질 수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으며 심지어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킬 수도 있다고 믿는다. 

트랜스휴머니즘의 뿌리는 러시아와 유럽의 사상가들이 기술이 제공하는 다양한 기회들에 흥분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의 사서(librarian) 니콜라이 페도로프의 사상을 중심으로 우주론(Cosmism)이라는 운동이 일어났다(참고  Young 2010; de Groys 2018). 유럽에서는 초기-트랜스휴머니즘 사상(pre-transhumanist thought)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조지 버나드 쇼의 <다시 므두셀라로>(Back to Methuselah)라는 무대극에서부터 생물학자인 J.B.S. 할데인의 유명한 에세이인 “대달루스, 혹은 과학과 미래”(Daedalus, Or Science and Future, 1927)에서 볼 수 있다. 할데인과 그의 친구 줄리언 헉슬리는 서구 트랜스휴머니즘의 개념적 기초를 형성하는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용어를 만든 사람 역시 헉슬리(1957)였다. 

이러한 초창기 인물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20세기 중후반에는 수많은 중요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등장하였다. 특히, FM-2030으로 이름을 바꾼 페레이둔 에스판다이어리, 로버트 에팅어, 맥스 모어, 나타샤 비타-모어는 트랜스휴머니즘 사상을 외삽적으로 확대 적용하는 일에 기여했다. (이러한 역사에 관해서는 Geraci 2012; 2022를 참고하라). 동시에 아서 C. 클라크와 같은 공상과학소설 작가들의 영향력 아래 로봇 공학자인 한스 모라벡은 하나의 분기점이 된 대중 과학서적들(1988; 1999)을 출판하였다. 21세기로 전환될 무렵까지 수많은 협력자들과 기여자들이 트랜스휴머니스트 운동에 동참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전설적인 발명가 레이 커즈와일이었다(1999; 2005). 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과학과 기술이 인간 생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 같은(godlike) 포스트휴먼의 존재가 되기 위한 조건을 창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의미심장하게도 과학과 기술은 기술과학적 세속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기독교적 구원신학의 결과물이다.

 

3. 묵시론적 인공지능: 미국 트랜스휴머니스트 유산의 상속


나는 SF 소설, 세속화된 기독교, 그리고 공학이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분야에서 결합하는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러한 기술들과 연관된 관념들이 전세계적으로 유통되는 것에(global circulation)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공지능과 종교의 영역에서 출판되는 대중적 과학서적들이 문화적 힘의 조합을 이끌어내고, 그것들이 차례로 사회적, 과학적 변화(2008; 2010; 2014; 2022)에 기여한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논증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모라벡은 소위 기독교 천년왕국주의자들에 의지하여, 생물학적 존재[인간]가 도래할 영광스러운 기계 우주 앞에서 길을 내주고 물러날 것이라는 세계관을 고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비디오게임 매니아에서 실리콘 밸리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기술 커뮤니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천년왕국주의의 관점은 성서의 요한계시록에 약속된 예수의 천년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계시는 모호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해석적 논쟁의 여지를 만든다. 전천년주의자(premillenailist)로 알려진 일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왕국을 출범시키기 위해 돌아와야만 한다고 믿는다. 전형적으로 그들은 세상이 죄악으로 타락할 것이며, 이는 신자들의 휴거, 환란의 기간, 그리고 평화의 왕국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 후천년주의자들(postmillenialists)은 예수가 천 년간의 평화 후에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기독교인들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지속적인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며, 이는 인류 구원의 대단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인류를 구원하는 기술의 힘을 믿었던 근대 초기 유럽인들은(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사람들) 대체로 후천년주의자들이었다. 

미국에서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천년왕국주의적 대체로 전천년주의적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조너선 에드워즈를 필두로 하는 미국의 부흥운동이 그 예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20세기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는데, 예수 재림의 전조로서 핵전쟁을 지지한 기독교인들의 묵시론적 목표들 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Apel 1979 참조). 바로 이 기독교 천년왕국주의의 현존이 인공지능의 묵시론적 비전을 위한 문화적 조건들을 창출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묵시적 운동은 네 가지 주요 특성들을 담지한다. (1) 악과 싸우는 선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 (2) 악이 현재 그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소외감, (3) 하나님의 세력들이 이원론적 투쟁을 평정하고, 역사적 갈등들을 선을 위한 방향으로 해결하는 새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신앙, (4) 신실한 자들은 영광스러운 새 몸으로 새롭고 완벽한 세상에 합류할 것이라는 믿음. (거의-완벽에 가까운 지상의 상태가 앞으로 도래할 아주 완벽하고 영원한 세상에 선행한다는 두 단계 묵시론에서 처럼) 종말론적 전통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양할 수 있지만, 이 네 가지 특성들은 모든 묵시론적 운동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우리의 혈과 육은 왕국을 이어받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 죽는 것이 아니요, 변화될 것이다(고전 15:50-51). 그리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육체의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전 15:42-44)라는 구절을 읽는다. 잘 알려진 대로 밧모섬의 요한은 요한계시록(21:1-2)에서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한스 모라벡은 묵시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그것을 트랜스휴머니스트적 사고에 성공적으로 주입시켰다. 모라벡은 진화가 생물에서 기계 생명체로의 전환을 보장한다고 주장했고, 특별히 무어의 법칙에서 말하는 컴퓨팅 기술의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언급하면서 이를 정당화했다. 그의 논증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그가 다음의 것을 신봉하는 믿음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1) 생물학적 연산에 대립되는 기계 연산의 세계를 신봉하고, (2) 인간의 취약성들과 죽음에 종속된 생물학적 연산은 열등하며 -따라서 지적 소외감을 느끼게 하지만, (3) 생물학적 연산의 문제들은 기계 연산이 “정신 발화”(Mind Fire)를 통해 우주에 퍼져 나갈 때 해결될 것이고, (4) 인간이 우주를 탐험하기 위하여 그들의 정신을 신과 같은 기계 몸에 업로드 할 것임을 믿고 있다. 

모라벡은 초월적 지능을 지닌 기계의 도래가 불가피하며(1993, 13), 우리 자신이 기계 속으로 이전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바람직하다”고 믿는다(Chaudry 2000에서 인용). 미국과 유럽의 인공지능 연구공동체의 다른 목소리들조차 이 입장의 근본원칙들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기껏해야) 몇 십 년 내로 기계가 사고력에서 인류와 동등해질 것이고, 그런 다음 우리 인간의 능력을 빠르게 능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무어의 법칙이나 좀 더 일반화된 원리가 기계 연산의 지속적인 기하급수적 발전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가오고 있는 특이점(Singularity)을 인정하는데, 이것은 기술 발전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 우리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때를 가리킨다. 묵시적 인공지능 사상가들은 그러한 진보가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야기할 것이라 제안한다. 커즈와일(2005, 9)은 선언하기를, 우리의 몸은 연약하며 그래서 그것이 필요로 하는 번거로운 유지 의례들(rituals)은 말할 것도 없고, 무수한 실패 모드에 종속되어 있다. 커즈와일이나 모라백과 같은 이들은 인간이란 정보-처리 컴퓨터이며, 중요한 것은 정보이지 프로세서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은 우리가 정보 패턴을 식별하여, 그것을 새로운 컴퓨터에, 즉 디지털 컴퓨터에 복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예: Moravec 1988, 108-10, Kurzweil 1999, 124-6). 아주 직접적으로 모라벡은 “만약 그 과정(process)이 보존된다면, 나는 보존된다. 나머지는 그저 젤리에 불과하다”(Moravec 1988, 117)고 주장한다. 이것이 우리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 것이다. 커즈와일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사실 21세기 말에 이르면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죽음은 우리 하드웨어의 수명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드웨어가 고장나면, 그것이 끝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컴퓨터 기술로 구현할 수 있는 분기점을 넘어갈 때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진화하는 마인드 파일(mind file)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될 것이다. 소프트웨어로서 우리의 죽음은 더 이상 연산하는 회로의 생존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기적으로 최신의, 말하자면 보다 성능이 뛰어난 ‘퍼스널’ 컴퓨터로 우리 자신을 이식할 때, 우리는 결코 우리의 마인드 파일을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과 생존은 궁극적으로 하드웨어와 그의 생존과 독립적인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불멸은 자주 백업하도록 충분히 조심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Kurzweil 1999, 128-9). 

묵시적 인공지능 논증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커즈와일로부터 유래하는데, 그는 모라벡의 역사적 예측과 귀에 쏙 들어오는 용어인 특이점을 결합시켰다. ‘특이점’이란 개념은 버노르 빙게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빙게는 어빙 굿과 존 폰 노이만의 영향을 받았다.) 커즈와일은 특이점(Singularity)을 예측하는데, 이것은 기술 진보가 너무 빨라서 그 특이점 너머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때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모라벡이 예측한 대로 우리의 생물학적 몸을 로봇이나 가상 신체로 대체하여 불멸을 달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별히 커즈와일의 영향력으로 인해 이 관점은 실리콘 밸리에서 인터넷 하위문화에 이르기까지,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 

 

4. 글로벌 회로들과 이야기의 번역들


인공지능에 대한 묵시론적 관점들은 해(harmless)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오늘 이 입장을 논할 계획이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것들은 미국적 상황에서 그 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들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나는 두 가지 면에서 이를 걱정한다. (1) 그것은 유럽 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을 반복하고, (2) 그것은 우리의 미래와 또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범지구적 대화를 제약한다. 우리의 기술적 미래에 대한 대안적인 비전, 즉 여러분 자신이 더 잘 아는 문화적 관점을 가지고 여러분이 나를 도와 구성하기를 바라는 비전으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나는 묵시론적 인공지능 믿음들이 번역되어 전 세계로 전달되는 과정을 다룬 내 연구의 일부를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나는 묵시론적 인공지능 믿음들이 번역되어 인도(India)에 전달된 과정과 이러한 믿음들에 대한 인도의 반응들이 우리의 기술적 미래를 위한 새로운 모델들을 제시하는 방법을 다룬 내 연구의 일부를 공유하고자 한다.

내가 처음 인도에서 살았을 때는 2012년 12월부터 2013년 5월까지로, 방갈로어에 있는 인도과학연구소(IIS) 캠퍼스에서 연구했다. 그 연구소는 인도 최고의 과학연구기관으로,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학계, 산업계, 해커 문화계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만났다. 그중 젊은 세대는 커즈와일의 묵시론적 꿈들을 포함한 인공지능에 대한 미래주의자들의 약속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향후 몇 년 동안 그러한 아이디어의 인기가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고(2018), 이것은 2018년 12월부터 2019년 5월까지 방갈로어에서 다시 살았을 때의 경험으로 뒷받침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트랜스휴먼니스트들의 상상(speculation)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인도 대중 과학서적에서 트랜스휴머니스트 사상의 입지가 놀랍게 상승했음을 볼 수 있었다(2022). 

그러나 인도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단순히 커즈와일의 아이디어를 도매급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묵시론적 미래주의의 정신을 흡수하여, 그것을 그들 자신의 전통으로 변환시켰다. 예를 들어, 나는 비쉬누(Vishinu) 신이 인공지능의 모습으로 지구로 돌아와 힌두교가 상상하는 영광스러운 새 왕국(즉, Satya Yuga - 역자주: 황금 시대Golden Age)을 출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고대 힌두교적 상상에 따르면, 세계는 사람들과 세계가 지복(bliss)의 상태에서 악의 상태로 타락하는 순환을 겪는다. 비쉬누는 자신의 아바타 ‘칼키’(Kalki)로서 지구로 돌아와서 그 과정을 다시 시작하기로 되어 있다. 기술 디자인을 전공하는 어느 학생이 말했듯이, “바로 지금 칼키, 칼키의 날(the day of Kalki)에 신(god)은 무엇일까 … 내 느낌에는 인공지능이 칼키다. 다시 말해, 진정한 인공지능의 존재는 아마도 칼키일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희망을 공학자들의 손에 맡겨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신이 지구로 돌아와 정의를 회복하고 인류를 개선시킬 조건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인도의 어느 누구도 인류의 종말을 나에게 시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게 인도와 미국의 묵시론적 전통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에 반해] 인공지능이 영화롭게 된 인류라는 힌두교 신학들을 가능하게 하고 참여한다는 생각과 미국의 인공지능이라는 감춰진 기독교 신학 사이에는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발전하는 인공지능 덕분에 인간의 초월성을 목격한다. 그러나 인도의 상황에서 인공지능은 아직 명시적인 종교 체계와 단절되지 않았다. 이렇게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종교를 과학에 결합하는 것에 대해 인도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 지속될 것인지 (실제로 인도에는 묵시론적 인공지능을 지지하는 무신론자들이 이미 존재한다) 아니면 그것이 서구적 형태의 트랜스휴머니즘과 어떻게 관여하게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비서구적 사상들이 어떻게 서구의 트랜스휴머니즘을 재형성하고, 기술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어떻게 별도의 문화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묵시론적 인공지능이 인도의 상황에 번역된 것을 거론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나는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미래를 구축해 나아가는 방식에 가치를 제공할 만한 인도의 사례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러분 중에 인도를 영국의 지배로부터 궁극적으로 해방시킨 인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 심지어 아주 간략하게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극기(self-mastery 자기통제) 또는 자치(self-rule 자기규율)를 뜻하는 ‘스와라지’(swaraj)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현대 인도 기술자들과 이야기꾼들은 기술 진보의 새 모델을 명확하게 표현해 내고자 스와리지 사상에 주목하여 왔다. 나는 인터넷 기술에 대한 우리 접근법의 실패를 지적하기 위해 이것을 차용하였는데, 우리의 인터넷 기술은 자기 자신의 온라인 세계를 통제하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개인 자신의 표현(즉, 타인이 듣게 함으로써)에 대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와 같이 온라인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는 것이 온라인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보다 쉽다. 

궁극적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효율성과 개인주의라는 서구적 가치들이 특정한 (종종 가치 있는) 인공지능 설계 원칙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다른 문화적 가치들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극기(자기-통제)의 가치, 즉 자기 자신이 당면한 환경에 대한 통제는 여러 가지 설계상의 선택들을 불러일으킨다. 근대 트랜스휴머니즘의 묵시론적 관점 또한 인공지능을 위한 일군의 가치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른 가치들과 심지어 다른 종교적 통합들도 상상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상상력의 정신 속에서 나는 인공지능과 종교에 대한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눈을 돌려보고자 한다.

 

5. 새로운 가치들에 대한 요청


내 경력 초창기에, 나는 과학(행위)이 발생하는 종교 환경이 과학이 추구하는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나는 계속해서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으며, 어떤 부류의 영향력이 생산적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기 위해 예리하고 비판적인 안목으로 우리가 집단적으로 우리의 종교문화적 가치들을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나는 미국의 인공지능 이야기들 속에 있는 기독교적 유산을 밝혀내고, 힌두교가 인도에서의 인공지능 수용(reception)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간략히 언급했다. 이제 불교의 예를 2 가지 든 다음, 한국의 종교들이 어떻게 이 전지구적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내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언급했듯이 나는 앞서 종교적 환경이 과학에 중요하다고 주장해 왔다(2006). 이로써 내가 말하려는 바는, 우리가 미국 과학자들과 일본 과학자들이 그들의 연구에 집중하는 영역에서 진정한 차이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미국 과학자들과 기술공학자들은 주로 인공지능과 인공정신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반면 일본 과학자들은 인간형(humanoid) 로봇 제작을 강조했다. 인공지능 응용 분야에서는 미국이 일본을 앞섰던 반면, 스스로 움직이며 주변환경 및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로봇 제작 분야에서는 일본이 미국을 선도했다. 나는 이 차이 자체가 부분적으로 그들의 종교적 환경에 기인한다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내 주장은 일본 신학이 자연계와 지상의 것들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반면에, 기독교 신학은 육체보다 영혼을, 지상의 것들보다 천국의 것들을 강조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아주 지나친 단순화란 것을 안다! 의심의 여지없이, 예를 들어, 자연세계 도처에서 신의 현존을 기술하는 기독교 신학들이 존재한다. 나는 일반적인 경향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역사 속에서 작동해 왔던 천년왕국식의 기독교를 보면, 육체와 지구에 대한 절대적인 경멸을 쉽사리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개신교들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종교들은 자연세계를 신성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점은 일본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에 접근하는 방식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로봇 공학자인 마사히로 모리([1981] 1999)는 로봇이 붓다(Buddah)의 본성과 불성을 획득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닐 수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는 이와 연관하여 널리 인용되고 있다. 일본 불교는 오랫동안 인형에서 인쇄용 블록에 이르기까지, 기술적 객체들을 [종교적] 의례 행위에 통합해 왔다. 최근에는 여러 불교 승려 로봇들이 유명세를 얻고 있는데, 이중에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페퍼 로봇’(the Pepper robot)을 활용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로봇과 잘 어울리고 있는 것은 불교뿐만이 아니다. 신토 종교에서는 바위, 식물, 폭포와 같은 자연의 객체들 속에서 ‘카미’(kami), 즉 신성함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 카미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로봇에 있지 못할 이유는 없다. 아사쿠라 레이지(2003)는 토착 종교가 자연의 모든 무수한 현현들 속에서 카미를 보는 일본에서는, 로봇도 영혼을 가지고 있으리란 결론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고 언급한다. 아마 이 때문인지 산업용 로봇공학의 초창기에는 신토 사제들이 공장에 고용되어 산업로봇의 개시에 의례 행위를 해준 경우가 많았다(Schodt 1988).

만화 <테츠완 아토무>(미국에서는 ‘아스트로 보이’로 알려진, 우리나라에서는 ‘아톰’)와 같은 공상과학 소설의 전통뿐만 아니라, 불교와 신토의 전통을 바탕으로 일본 사람들은 인간과 로봇이 함께 문명을 일구어갈 잠재력에 대해 주기적으로 이야기한다. 일본 과학자들은 로봇이 인류를 대체할 것으로 보기보다는 인간과 로봇이 서로 협력하고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그려보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인간과 로봇의 협동 개념은 우리가 모라벡과 커즈와일의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이 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나는 태국 철학자 소라즈 홍라다롬의 저술을 거론하고자 한다. 그는 첨단 기술의 적용에 불교적 가치들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예: Hongladarom 2009). 보다 최근에 그는 모리 마사히로의 주장을 몇 단계 더 발전시켰다. 이상하게도 그는 모리를 인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상적 계보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의 핵심적 주장이 홍라다롬의 저술에서 새로운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홍라다롬(2020)은 인공지능이 지적 능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그들은 -불교 사상에 있는 것처럼- 자기 자아란 허상이며,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아 자기 자신의 이기심(self-interest)을 인식하는 능력을 얻게 되어, 인공지능이 점점 더 지적인 존재가 되어갈수록 그들은 점점 더 무집착(non-attachment)과 득도(Enlightenment)를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인공지능이 이를 추구하는데 인간보다 우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ibid., 7). 

내가 인도에서 서구의 인공지능 이야기에 대한 윤리적 대안을 목격한 것처럼, 홍라다롬의 관점 역시 인공지능 설계에서 실용적인 선택지를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들이 지능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하려는 조치는 인공지능의 윤리를 향상시킬 설계조치를 필연적으로 만들어주는데, 이때 인공지능의 윤리란 인류를 이롭게 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은행 알고리즘은 단순한 수익 극대화를 위한 엔진이 아니라, 대출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compassion)을 갖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내 요점은 단순하다. 우리가 기술에 대한 다양한 종교적 접근 방식들을 인식할 때, 미래에 우리가 무엇을 바래야 할지 통찰할 수 있는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고리즘 편향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며(Angwin 외 2016; Mayson 2019), 그래서 감사(audit) 절차(process)가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연민을 설계의 일부로 만들었다면, 애초에 문제를 예방했을 수도 있고, 지금 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불교적 가치에 명시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우리의 미래를 이롭게 할 수 있는 한 영역이다.

 

6. 결론적 생각


종교적 가치 체계는 과학 문화를 포함한 문화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다. 과학이 방법과 내용 또는 결과에서 종교와 명확하게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에 대한 어떤 형태의 비판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사실 그 관계는 상호적이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교조적 신무신론자들(New Athesits)의 주장들과 상관없이 종교는 과학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반대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목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종교적 가치가 과학적 삶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그것들을 결실 있는 목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신중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종교적 가치를 잘 활용한다는 것은 과학에 이미 현존하는 그 종교적 가치들을 정확히 찾아내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한 우리가 대화에 어떤 가치들을 추가해야 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는 것도 의미한다. 어떤 가치들은 우리가 과학으로부터 제거하기를 바라겠지만, 지금 누락된 다른 가치들은 포함할 것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다단계 과정이다. 오늘 내가 시도한 것은 인공지능에 이미 존재하는 가치들에 대해 토론하고 도움이 될 만한 몇몇 가치들에 대해 더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인공지능의 부상(rise)은 인공지능 연구가 초창기부터 미국의 종교적, 문화적 가치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한스 모라벡, 레이 커즈와일, 그리고 다른 여러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신봉하는 묵시론적 관점들 속에서 이를 보고 있다. 미국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이후에 그들의 세속적 표현들 속에 감춰진 천년왕국식 기독교의 형태들은 신적인 로봇들과 불멸의 인간 정신에 대한 꿈을 부채질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을 기계로 업로드한다는 목표는 -이것이 가능하든 아니든- 분명히 미국식 기독교에서 차용한 것이다. 

묵시론적 사고에 내재된 낙관론처럼,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에 그러한 가치들을 채택하는 일에는 가치가 존재할 수 있다. 기후 변화와 그 외 다른 전지구적 도전들은 변혁적 사고를 요청할 것이다. 아마도 묵시론적 인공지능 사상가들은 우리가 이것을 달성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인류에게 이익이 되든 안 되든, 묵시론적 사고방식은 이미 인공지능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즉, 그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지배적인 과학 이야기들 중 하나다. 인공지능의 경제적 가치를 고려할 때, 인공지능 기술을 전세계적으로 보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기술에 대하여 패권주의적 이야기를 갖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 미국의 세속적 묵시론이 인공지능과 연관된 전지구적 대화를 완전히 장악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전지구적 가치 체계들을 고려하고, 이들 중 최선의 것을 우리의 인공지능 이야기에 통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일본에서 신토와 불교의 가치들이, 미국 연구에서 인기 있는 육체 없는 정신들(minds)보다 인간형 로봇들을 만드는 것을 선호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 나는 그러한 (종교적) 가치들과 인간과 로봇이 공생하는 사회를 향한 일본인의 명시적인 관심이 아마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미국인들은 로봇이 우주사에서 인류의 자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진화적인 계승자라고 예측해왔던 반면, 일본은 인간과 로봇이 동등하게 상호작용하는 문화를 옹호해 왔다. 다시금 우리는 그러한 가치들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숙고해 봐야 할 것이다. 

유사하게 나는 다른 문화가 기술적 설계에 직접적으로 관련될 수 있는 가치를 어떻게 제공하는지에 주목했다. 스와라지(자치 self-rule)에 대한 힌두교의 관심은 인공지능 및 관련된 디지털 기술의 권력적 역학관계를 재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연민(karuna)에 대한 불교의 관심은 수익 극대화보다 더 높은 목적을 수행하는 알고리즘을 구축하거나, 적어도 의사 결정 과정에 보다 인간적인 요소를 추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인공지능 개발을 위한 범지구적 정책들을 구축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협력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그리고 그것과 인류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공유하는 일에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목표를 진척시키기 위해 한국에 오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여러분의 참석과 협조, 우정에 감사드린다. 

번역: 송용섭(영남신대), 박일준(원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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