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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신학노트3-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
장경현  |  claremontkr@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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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2월 10일 (일) 00:00:00 [조회수 : 5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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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신학노트3-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1. 들어가는 말

   
교계에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진 오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최명관 역., 서광사) 책을 읽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이름을 딴 이 책은 도덕.윤리의 중심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 사상(실재론)에 눈 뜨게 해 줍니다. 플라톤이 이상이요, 공동체요, 의무요, 사회주의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이며, 개인이며, 목적이요, 민주주의자가 됩니다. “행복을 목적(지고의 선)으로… 진리를 즐겨 관조하고… 좋은 습관 갖음으로 중용의 덕으로… 훌륭한 삶을 살기…” 뭐 이 정도로 요약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복잡한 그의 언어로 들어가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을 것입니다. (괄호의 숫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책을 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성서의 장절과 같은 것입니다.)


2. 원의 중심이 먼저인가, 주변이 먼저인가?

플라톤은 (수학자답게) 순수한 사유 속에서 善의 이데아를 그리고 있는데 반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자답게) 그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개개의 사물에 내재한 善을 보고 있습니다. (1096a) [*. 플라톤은 관념론의 대부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론의 대부가 아닌던가!] 이 善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 최대로 잘 드러날 때에 이루어 진다고 봅니다. 의술에 있어서는 병 고침이… 造船에 있어서는 배갉 병법에 있어서는 승리갉 경제학에게 있어서는 富갉 목적이 되는데… 이러한 목적의 실현이 곧 善이라고 봅니다. (1094a, 1097a) 다만 플라톤이 제1의 원인, 곧 善의 이데아 하나를 보는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사물에 있어서의 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1096a, 1096b) 그리고 이 善 가운데 으뜸 가는 善은 종속적인 善보다 더 위에 있는 善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馬具의 제작이 승마의 기술에 종속하므로 승마의 기술이 마구의 제작 목적보다 으뜸이 되고… 승마의 기술이나 모든 군사적 행동이 병법에 종속한다고 볼 때 병법의 목적이 승마의 기술이나 군사적 행동보다 으뜸이 되고… 이 병법의 목적은 또 다시 더 큰 (사물의) 목적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1094a)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으뜸가는 목적, 곧 최고의 善을 다루는 기술을 <정치학>이라 여깁니다. (1094b) 그리고 정치학이 목표로 삼는 최고의 것, 즉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善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幸福”을 말합니다. (1095b, 1097b)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면을 이성에서 찾는데… 이 이성적인 부분은 이성적 원리에 잘 순응한다는 부분에서… 그리고 이성적 원리를 소유하며 이성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찾습니다. (1098a) 따라서 인간의 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덕(훌륭함)에 일치하는 정신의(이성의) 활동”으로 보고 있으며(1098a) 이는 곧 그의 “행복”의 定義가 됩니다. 다만 그는 最高善을 행사하고 있는 것(활동하고 있는 것)을 (플라톤처럼) 最高善을 소유하고 있는 것(정신의 상태로 있는 것)과 구분하여 最高善의 “행사” 혹은 “활동”을 행복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1099a) 따라서 “행복”은 플라톤의 善의 개념과 맞먹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행복이 제1원리인 사실은 “행복 때문에 다른 모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1102a)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행복은 “어떤 종류의 정신의 유덕한 (훌륭한) 활동”이기 때문에 “행복은 온전한 덕과 생애 전체를 통하여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 됩니다. (1100a)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훌륭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을 이야기 합니다. 전자는 교육에 의해서 후자는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인 덕을 먼저 전개하는데… 그 기초가 되는 사유방법은 “중용”에 있습니다. (1104a-1107a) 즉, 그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덕은 일종의 과도함도 모자람도 없는 중용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1106b) 예를 들면, “용기있는 사람”은 무모한 사람과 겁쟁이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며, 같은 이치로, “절제”는 방종과 무감각사이엡 “관후”는 방탕과 인색함 사이엡 “긍지”는 허영과 비굴사이엡 “온화함”은 성급함과 노할 줄 모르는 無性味사이엡 의분은 악과 질투사이엡(등등)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1107b-1108b)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원의 중심을 찾는 예를 듭니다. (1109a) 그리고 원의 (완벽한) 중심은 찾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양 극단(과도함과 모자람)을 버려나가야 한다는 사유 방법을 택합니다. (1109a-1109b) [*. 플라톤이 원의 중심을 먼저 보고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의 중심을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양 극단 곧 과도함과 모자람을 버려 나가는) 원의 주변 모습을 먼저 보고 있습니다. 이 <원의 중심> 비유는 인간의 사유 방법에 있어서 중요한 갈림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원의 중심을 먼저 보는 것은 (플라톤처럼) 유토피안적인 사고 방법을… 원의 주변을 먼저 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현실주의적인 사고 방법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 인간은 모두 Platonist 아니면 Aristotelian으로 태어난다고 했던가!) 여러분은 원의 중심을 먼저 보십니까, 주변을 먼저 보십니까? 맛있는 음식이 있을 경우, 먼저 먹습니까? 나중에 먹습니까?


3. “덕(훌륭함)”있는 사람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인 덕(훌륭함)을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에서 5권에 걸쳐 전개하는데… [그 기초가 되는 사유방법이 “중용”에 있음은 (1104a-1107a)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그에 앞서 덕(훌륭함)에 관하여 오리엔테이션을 먼저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훌륭함)”은 “정념과 행위”에 관계된 것으로 먼저 “유의적인 정념과 행위” 그리고 “무의적인 정념과 행위”를 구분하고 덕을 유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1110a-1111b) 유의적인 것은 의도된 행위이고 무의적인 것은 “무지”에 의해서 혹은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행위인데… 덕은 유의적 행위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무의적 행위는 덕과는 상관없이 비난이나 칭찬 받을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 정신병자의 행위… 혹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의 행위를 덕(훌륭함)과 관련하여 논할 수는 없을 테니까…말입니다. (1135a)]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훌륭함)”을 이루는 과정은 각각의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이 “선택”의 의미를 “욕망,” “노여움,” “소원,” 그리고 “의견”과 비교하여 구분을 합니다.(1111b-1112a) “욕망과 노여움”은 비이성적인 동물도 공유하고 있지만 “선택”은 (이성적인) 인간만이 갖고 있다는 점에서… “소원"은 “목적”과 관계하지만 “선택”은 “수단”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목적) “소원”이고.. 부자가 되기 위한 어떤 행위(수단)는 “선택”이 됩니다]… “의견”은 (행위가 아닌) “참인가 거짓인갚에 따라 “영원한 것들과 불가능한 일들”에도 관여하지만 선택은 (행위가 포함된) “좋고 나쁨”에 따라 각 사람의 “성품”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봅니다. (1111a-1112b)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선택”이란 이성적 원리와 사유를 통한 “숙고”를 통해서 이루어진 행위(유의적 행위)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숙고는 각 개인의 힘이 미칠 수 있고 또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 됩니다. (1112a) 그리고 여기서 숙고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됩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고칠까 말까 하고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칠까를 숙고하는 것처럼 즉, 목적을 설정해 놓고서 그 목적을 어떻게 그리고 무슨 수단을 써서 달성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1112b) 때문에 “선택”이란 한마디로 인간 자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에 대한 숙고된 행위가 됩니다. (1113a)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이리하여 목적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요, 수단은 우리가 숙고하고 선택하는 것이므로, 수단에 관계하는 행위는 선택에 의거하며, 또 유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덕의 활동은 수단에 관계한다.” (1113b)

요약하면, (도덕적인) “덕(훌륭함)은 중용이요, 또 성품이며, 덕은 그 본성상 그것을 낳는 행위를 하게 하는 동향을 가지고 있으며, 덕은 우리의 힘의 범위 안에 있고, 유의적이며, 또 올바른 이치가 명하는 것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1114b) 이렇게 오리엔테이션을 끝낸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훌륭함)”의 몇 가지를 그의 사유 방식인 “중용”에 따라서 검증해 나갑니다.

“용기”(1115a-1117b)는 “공포와 태연함”의 감정과 관련한 것으로 “무모함”과 “비겁” 사이의 중용이 됩니다. “절제”(1117b-1119b)는 “쾌락”(촉각에서 오는 실제적 향락, 즉, 음식물이나 성교 같은 향락)과 관련된 것으로 “방종”과 “무감각” 사이의 중용이 됩니다. “관후” (1119b-1122a)는 “재물”과 관련된 것으로 “방탕”과 “인색” 사이의 중용이 됩니다. “호탕”(1122a-1123a)은 역시 재물과 관련이 있으나 그 규모가 큰 경우와 관련하며 “쩨쩨함”과 “속악 혹은 몰취미”의 중용이 됩니다. “긍지(1123a-1125a)는 “정신의 큼”에 관련하며 “비굴”과 “허오(虛傲)”의 중용이 됩니다. “온화”(1125b-1126b)는 “노여움”에 관한 것으로 “성급함” 혹은 “화를 잘 냄”과 “무성미(無性味)” 혹은 “골낼 줄 모름”의 중용이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외 여러 덕목들을(우애, 진실, 의젓함, 염칡 등등의 덕목) 같은 방법으로 전개합니다.

[**. 공포와 태연함… 쾌락… 재물… 정신의 큼… 노여움… 등등이… 있을 때… 있고… 없을 때… 없는 사람…은 용기, 절제, 관후, 호탕, 긍지, 그리고 온화한 사람입니다. “덕(훌륭함)”있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전도서(3장) 기자의 지혜를 득한 사람입니다. 지도자들… 대통령,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 감사원장, 대법원장, 이장, 통장, 군수, 도지사, 장성, 장교, 판사, 검사, 도지사, 회장, 사장, 과장, 부장, 계장, 상무, 국무총리… 그리고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 권사, 집사, 감리사, 감독회장, 감독, 목사, 장로…님들… 모두모두… 이런 “善”한 사람... "덕(훌륭함)"있는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4권까지 보았습니다.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훌륭함) 가운데 가장 큰 덕으로 생각되는 正義에 대하여 논합니다. “정의 속에는 모든 덕이 다 들어 있지 않은가!!” (1129b)


4. 正義와 지적인 덕(훌륭함)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에서 正義와 不正義에 대하여 논합니다. 그는 “1) 어떤 성질의 행위에 이 양자 (정의와 부정의)가 관계하며, 2) 정의란 어떤 종류의 중용이며, 3) 옳은 행위란 어떤 두 극단 사이의 중간인가를 고찰”하게 됩니다. (1129a)

먼저 正義는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게 하며, 옳은 태도로 행동하게 하며, 또 옳은 것을 원하게 하는 ‘성품’”이라는 일반적인 定義를 고찰해 나갑니다. 여기서 “옳음(정의)이란 준법적인 것과 공정한 것을 포함하고, 부정이란 무법적인 것과 불공정한 것을 포함”하는데… (1129a) 국가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법이라고 한다면) “모든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의 공동 이익을 목표로 삼고 제정되었기엡” 국가(국가적 공동체)를 위하여 행복 혹은 행복의 조건들을 산출하고 보전하게 되는 행위(즉, 법을 지키는 행위)를 옳은 행위(정의)라고 봅니다. (1129b)

여기서 국가의 법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덕목들, 용기, 절제, 온화 등등의 덕을 명(시)하기 때문엡 (다시 말하면, 용기, 절제, 온화 등등의 덕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에)… (법을 지키는 행위로 여겨지는) “正義”는 완전한 덕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덕과 정의는 서로 같은 것이지만, 그 존재 양식은 같지 않게 됩니다. 즉, 개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상태로 있는 덕이… 타인과의 관계를 가지게 되면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他人의 善”이 됩니다. (1129b)

(보편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플라톤과는 달리)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에 있어서도 합법적인 것으로서의 정의(보편적 정의) 보다는 공정하고 평등한 것으로서의 정의(특수한 정의)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이 특수한 정의는 분배적 정의와 시정적 정의로 나뉘는데… 분배적 정의는 “명예나 금전이나 이 밖에 국가의 공민간에 분배될 수 있는 것들의 분배에 있어서의 정의”이고… 시정적 정의는 “사람과 사람의 상호 교섭에 있어서 시정하는 구실을 하는 정의”가 됩니다. (1130b-1131a) [굳이 표현하자면 전자가 형사상의 정의라고 한다면 후자는 민사상의 정의가 될 것입니다.]

분배적 정의의 초점은 “균등”에 있으며 부정의는 “불균등”에 있습니다. 여기서 정의는 비례적인 것이며 부정의는 이 비례를 깨는 것이 됩니다. (1131b) 여기서 비례는 기하학적 비례입니다. 시정적 정의에 있어서도… 초점은 일종의 균등이요, 또 부정의는 일종의 불균등이지만 이 때의 비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기하학적 비례가 아니고 산술적 비례가 됩니다. (1132a) 여기서 정의란.. 이득과 손실과의 중간(1132b)이 됩니다. [기하학적 비례는 A:B=C:D 와 같은 것이며. 산술적 비례는 A-B=C-D 와 같은 것입니다. (ref. 151)]

결국… 정의란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과 부정한 행위를 당하는 것 사이의 중간적인 것이 되는 데 부정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너무 많이 취하는 것이요, 부정한 행위를 당한다는 것은 너무 적게 취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정의란 일종의 중용이지만 덕들과 같은 모양으로서의 중용은 아닌 것이 됩니다. 그것이 중용인 까닭은 부정의가 양극단에 관계하는 것인데 반하여 그것은 하나의 중간적인 것에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1133b)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지배자는 정의의 수호자요, 만일 그가 정의의 수호자라고 한다면 또한 균등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만일 옳은 사람이라면 자기의 몫에 들어 오는 것 이상으로 취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에게는 어떤 보수를 주어야 한다. 그 보수란 다름아닌 명예와 특권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 충분치 않은 사람들은 폭군이 된다.” (1134b)

옳은 행위란 무조건적인 의미에서의 선에 참여하면서 그것을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 나는 것이 되는 까닭에 정의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것”이 됩니다. (1137a) [신들에게 분배니… 균등이니… 비례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의 덕을 “성품의 덕”(도덕적인 덕)과 “지능의 덕”(지적인 덕)으로 나누고… 2권-5권에서 이러한 성품의 덕을 논하였습니다.]

제6권에서는 지능의 덕(지적인 덕)에 대하여 논합니다. 성품의 덕은 중용에 기초해 있는데… 중용은 올바른 이치가 일러주는 데로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올바른 이치인가 하는… 이성적 원리를 파악하는 부분”(지적인 덕)이 이제 과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1138b, 1139a)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端初(원인)가 없는 부분”을 성찰하는 것을 “인식적 부분”이라 칭하고 “달리 있을 수도 있는 것들”을 성찰하는 것을 “思量적 부분”이라 칭하면서 논의의 초점을 후자에 맞추어 나갑니다. (1139a) [*그는 언제나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전자에 대한 대상은 진리이고, 후자의 대상은 올바른 욕구에 대응하는 진리가 됩니다.

그는 정신 안에 행위와 진리를 다스리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이는 감성, 이성, 그리고 욕구입니다. 여기서 감성은 그에게 있어서 전혀 행위의 단초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무시하고… [짐승이 이를 가지고 있지만 (짐승과 같은 행위를) 행위라고 할 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성과 욕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사유(이성)의 긍정과 부정 속에서 욕구의 추구와 회피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성”이 주장하는 바의 것을 “욕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선택이란 숙고한 욕구이므로 좋은 선택을 하려면 이치도 옳아야 하거니와 욕구도 바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치가 주장하는 바의 것을 욕구는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1139a) 결국, 실천적이고 사유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 좋은 상태란 올바른 욕구와 일치하는 진리가 됩니다. (1139b) [*. 플라톤이 이성(사유)적인 부분만(보편적인 것) 이야기 하고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욕구”(개별적인 것)를 덧붙이고 있는 셈입니다.]

그에 따르면, “제작된 것은 무조건적인 의미에서는 목적일 수 없지만 실천되어진 것은 무조건적인 의미에서의 목적이며 따라서 좋은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요, 또 욕구는 이것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따라서 “선택은 욕구적 이성 내지 사유적 욕구이며, 그러한 행위의 단초는 인간”이 됩니다.(1139b) 그에게 있어서 이성과 사유가 없거나 또는 윤리적인 성품이 없다면 선택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전자의 입장에서 플라톤의 입장을 받아 들이는 것이고 후자의 입장에서 그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으로 하여금 긍정과 부정을 통해서 진리를 소유하게 하는 상태(즉, 지적인 덕)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이는 “기술,” “학적 인식(학문),” “실천지(실제 생활의 지혜),” “(철학적)지혜,” 그리고 “(직관적)이성”입니다. [여기서 그는 오류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속단과 억견(판단)을 포함시키지는 않습니다.] (1139b)

여기서 학적 인식이란 “다른 식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적인 것으로… 이 학적 인식의 대상은 필연적이며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것이 됩니다. 이는 “가르쳐 질 수 있는 것… 배워질 수 있는 것… 논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39b)

“다른 방식으로도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적인 것으로는… 제작과 관련된 것이 “기술”이며(*물건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지식),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것이 “실천지”(실제 생활의 지혜)입니다. (1140a) 실천지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에 관해서 잘 살필 수 있는 것” (1140a) “인간을 위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해서 참된 이치를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 (1140b)를 말합니다.

이성은 직관적인 능력으로 학문을 우러나게 하는 원리가 됩니다. 학적 인식의 근본 전제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학적 인식일 수도 없고, 기술일 수도 없고, 실천지일 수도 없기 때문에 (학적인식은 논증될 수 있는 것이요, 기술이나 실천지는 “다른 방식으로도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이 근본 명제들을 파악하는 것이 “이성”인 것입니다. (1141a, 1142a) 실천적 근본 명제의 기초가 되는 개별적인 것들의 파악도 이성이 하는 일에 포함되는데 그 어느 경우에나 이성은 직관적인 능력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1143b)

(철학적) 지혜는 “온갖 학적 인식 가운데 가장 완성된 것으로… (따라서 智者는 근본 명제들로부터 도출된 것을 알 뿐 아니라 또 근본 전제들 자체에 관한 진리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직관적 이성과 학적 인식이 합쳐진 것이요, 가장 고귀한 일들에 관한 학적 인식”이 됩니다. (1141a) 아리스토텔레스는, 예를 들면, 아낙사고라스나 탈레스는 (철학적) 지혜는 가졌으나… (그들의 지혜는 “인간적인” 선이 아니므로) 실천지(실제 생활의 지혜)는 없다고 봅니다. (1141b) 실천지는 “인간적인 것들” 및 “거기 관해서 사량하는 것이 가능한 것들”에 관계하는 것인데… 이들은 그런 부분이 결여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지와 이해의 차이…[“실천지의 목적은 무엇은 해야 하고 무엇은 해서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므로 실천지란 결국 명령을 내리는 것인데 이에 반해서 이해력은 그저 판단만 하는 것”(1143a)]를 말하고 … 이어서 (철학적) 지혜와 실천지(실제적 지혜)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면서 (철학적) 지혜는 행복의 形相因이며, 실천지(실제적 지혜)는 도덕적인 덕이 원하는 적절한 목적에 대하여 적절한 방법을 쓰게 한다고 봅니다. (1143b)


5. 最善의 德(훌륭함)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에서 “우리가 피해야 할 윤리적 덕목으로 세 가지를 논하는데… 곧 “악덕과 자제력이 없음과 금수같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악덕은 덕의 대립으로, 자제력 없음은 자제의 대립으로, 초인간적이고 영웅적이고 신적인 성질은 금수같은 상태의 대립으로 보고 (1145a) 이를 논의해 나갑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방법론을 우리는 그의 언급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모든 경우에서처럼, 여기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소견을 살펴 보고, 먼저 그 속에 있는 여러 가지 난점을 논하고 나서, 가능하면 더 나아가 정신의 이 여러 가지 상태에 관한 세상의 여러 견해 가운데 옳은 것을 밝혀야 한다. 혹 이렇게 할 수 없다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수의 견해, 그리고 가장 유력한 견해를 밝혀 보아야 한다. 만일 여러 가지 반대를 물리치고, 또 세상의 여러 견해들 가운데 미비한 것을 제거하면 이 문제를 우리가 충분히 밝힌 것이 된다. (1145b)” 이러한 언급은 그의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개별적인 것에의 관심이 어떠한 지를 잘 보여 줍니다. 특히 “가정이 국가보다 앞선다” (1162a) 혹은 “개별적인 교육은 공공적인 교육보다 더 좋다”(1180b)는 그의 생각은 단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 즉 제 1원리를 보전하는 것이고 악덕은 “근본을 파괴하는 것”인데 수학에 있어서 공리가 근본이듯이 행동의 영역에서는 목적이 근본이 된다고 봅니다. (1151a)

아리스토텔레스는 판단을 옳게 하는 사람이라도 자제력이 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비판합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자제력 없이 행동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혹은 “누구든지 최선의 것으로 판단하는 것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즉 사람은 오직 무지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다”는 입장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개별적 사물에 관심을 갖고 관찰을 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관찰된 사실들에 맞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1145b) 즉, 그는 인식보다 강력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동의하나, 누구나 자기에게 좋게 여겨지는 것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1145b)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식을 쓰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그는 지적하고 이러한 상태의 예로… 잠자고 있는 경우, 미친 경우, 술 취한 경우 등등을 듭니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상태임을 지적하는데… 이는 인식은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있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감성의 지배 영역에 속해 있고… 이 감성적 인식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할 때 자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146a) 결국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의 언어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내는 소리”(1146a)와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분노에 있어서 자제력이 없는 것이 욕정에 있어서 자제력이 없는 것보다 덜 추하다는 사실을 논합니다. 분노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화를 내는… 이를 테면 성급함과 관련이 있어 어느 정도 이치를 따르지만 욕정은 이치를 따르지 않고 욕정에 정복당하는 것으로 봅니다. (1149b)

제 8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친애에 대하여 논합니다. 친애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덕이 아니라 덕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1155a) 그는 “서로 친애하는 사람들끼리는 정의가 새삼스럽게 필요하지 않지만 이에 반하여 옳은 사람들간에는 정의 외에 또한 친애도 필요하다”고 보며 또한 "정의의 가장 참된 형태는 친애의 성질을 띤 것”으로 여김으로써 친애를 정의보다 더 큰 항목으로 보고 있습니다. (1155a) 그는 더 나아가 “친애는 어떠한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악한 사람들은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인지…. 친애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인지… 등등을 다루어 나갑니다. (1155b)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이들의) 쾌락을 위한 친애나 (노인이나 공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유용성을 위한 친애를 논한 후에 완전한 친애는 “선하고 덕에 있어서 서로 닮은 사람들의 친애”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 친구를 위한 무조건적인 친애가 되며 영속적인 것이 됩니다. (1156a-b)

아리스토텔레스는 國制에 있어서 세 가지를 논하는데… 군주제와 귀족제 그리고 공화제(유산자제)를 논합니다. 군주제가 타락하면 참주제가 되고 귀족제가 타락하면 과두제 그리고 공화제가 타락하면 민주제가 됩니다. 여기서 군주제를 가장 좋은 것으로 그는 여기고 있습니다.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최선의 것이 최악의 것의 반대가 되듯이 군주제의 타락, 곧 참주제가 최악이 되는데 참주는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1160a-b) 귀족제는 그 통치자들의 악덕으로 말미암아 과두제로 이행하게 되고… 공화제(유산자제)는 민주제로 이행을 하게 됩니다. 그는 “민주제는 모든 타락한 형태들 가운데 그 나쁜 정도가 가장 적은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국제의 본래의 형태로부터 타락한 정도가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1160b) 여기서 그는 부모와 자녀들과의 관계를 군주제로… 부부의 공동체를 귀족제로… 형제의 공동체를 공화제(유산자제)… 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160b-1161a) 이 여러 국제는 각기 정의를 내포하는 바로 그 만큼 친애를 내포한다고 봅니다. (1161a)

제 9권에서도 그는 친애의 여러 가지 면을 계속 이어서 논합니다. “상대방이 전과 달라졌을 때 친애의 관계를 끊을 것인가, 혹은 그대로 계속 할 것인가?”(1165a) “好意와 合心과 친애의 차이점?” (1166b-1167b)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것인가, 혹은 남을 사랑할 것인가?” (1168a-b) “행복한 사람에게 친구가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 (1169b) “얼만큼의 친구를 가져야 하나?”(1170b-1171a) 등등을 논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사람은 가장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 때 그의 自愛는 욕먹는 부류의 자애와는 다른데… 후자가 정욕이 명하는 대로 사는 데 반하여 전자는 이치에 따라서 살며, 또 후자가 이익이 되어 보이는 것을 욕구하는 데 대하여 전자는 고귀한 것을 욕구하는 차이가 있음을 밝힙니다. (1169a) 따라서 “선한 자는 자애자가 되어야 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1169a)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자 있다는 조건에서 온 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아무도 이것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요, 그 본성이 남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1169b) 사람이 행복하려면 덕 있는 친구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1170b)

제 10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과 행복에 대하여 논합니다. 그는 에우독소스의 定義 “쾌락이 곧 선”이라는 주장을 점검하면서(1172b-) 쾌락이 곧 선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에게 있어서 선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그에게 있어서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일의 궁극목적” (1176a)이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수단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1176b) 그리고 “행복한 생활은 덕 있는 생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177a) “덕을 따라 사는 사람은 행복”(1179a)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최선의 덕은 이성에 따라서 “진리를 관조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1177a-b) 다른 류의 덕들, 용기, 정의, 절제… 등등도 “진리를 관조하는” 순수관조에는 못 미치는 것이 됩니다.(1178b) 즉, “완전한 행복은 관조적인 활동”이 됩니다. (1178b) 따라서 진리를 관조하는 사람, 즉, 철학자는 “신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1179a)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것이 “본성”에 의한 것인가, “습관”에 의한 것인가, “교육”에 의한 것인가를 (1179b) 논의하면서… “습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만 “습관”이라는 것이 좋은 양육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좋은 양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선한 사람이 되려면 좋은 양육을 받고 좋은 습관을 붙여야 하며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며 또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나쁜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할진대,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모름지기 일종의 이성과 올바른 명령을 따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1180a)” 여기서 이성과 올바른 명령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 힘은 구속력이 있는 법률과 같은 데서 나오므로… 그는 마침내 “정치학”으로 논의를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6. 나가는 말

요약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궁극적 목적… 곧 善은 “행복”이며, 이 행복은 (중용적인 사유방식에 따른) “덕(훌륭함)있는 생활”이며, (많은 다른 덕이 있겠지만) 가장 최선의 덕 있는 생활은 이성의 활동에 따라서 “진리를 관조하는 일”이 됩니다. 덕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 즉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좋은 습관 혹은 좋은 성품이 뒤따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성과 올바른 명령에 따른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는 구속력이 있는 법률과 같은 것으로 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다음 논의는 정치학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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