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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신학노트1-다원주의
장경현  |  claremontkr@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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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2월 05일 (화) 00:00:00 [조회수 :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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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목회자의 신학노트>란 큰 주제 아래 제가 이해한 신학적 관점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학자들이야 <眞>의 세계 속에서 신학을 하지만 목회자야 <善>의 관점에서 신학을 하지 않겠습니까? <眞>과 <善>의 세계 모두를 조금씩 맛 본 제 경험을 살려… (전에 썼던 글도 주제별로 조금 추리고) 생각나는데로 계속 써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신학이 주는 풍성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


목회자의 신학노트1-다원주의


1. 들어 가는 말

오늘날 다원주의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교계 내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몇 년 전 어느 목회자와 다원주의와 관련하여 대화하다가 그 꽉 막힘에 놀라면서… 제 나름대로 적었던 글입니다. 다원주의에 대한 여러 생각들… 정리하시는 데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학의 ABC

기독교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 곧 하나님에 대한 담론입니다. 그런데 (Feuerbach처럼 신을 인간의 투영물로 보지 않는다고 하면…) 개념상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이고… 담론을 펴는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논리적으로 상대적인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을 “절대”(완벽)라고 하는 의미에서 논할 수가 없습니다. 신학적인 담론을 논하면서 “절대”라고 하는 것은 철모르고 떼쓰는 아이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불경한 일이 됩니다. 때문에 신학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상대”를 담보하면서 전개해야 합니다. “상대”를 담보로 해서 전개되는 수많은 신학적인 담론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혹은 믿어야 할) 구체적인 열매, 곧 교리라고 하는 것을 만들게 됩니다. 즉, 교리는… “상대”를 담보로 전개된 신학적 담론이기는 하지만… 많은 이들의 논의와 합의를 거친 이유로 어느 정도의 절대성” (혹은 “객관성”)을 한 공동체(기독교)에서 갖게 됩니다. 신학적 담론을 통하여 합의된 “절대성” 혹은 “객관성”이라는 성격 때문에 이를 위배하는 경우에는 그 (기독교) 공동체에서 배척당하기도 합니다.

많은 교리들 가운데서도 우리 감리교는 25가지의 교리(감리회의 종교강령-교리와 장정 앞부분 참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들의 핵심적인 부분은 아마 “사도신경”으로 모아질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신앙고백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또한 이 신앙고백은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한 “실존적”인 처절한 몸부림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즉, 내적으로 “절대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를 믿고 고백하는 이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적 절대성" 곧 신앙고백이 외적으로 드러날 때에는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론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1차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로 고백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2차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고 물으면 대답은 사람들의 관심 정도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교리적인 언어를 다시 써서) “’구원’ 받는 것” 혹은 “‘영생’을 얻는 것” 혹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혹은 “거듭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는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것” 혹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 혹은 “삶을 부유케 하기 위한 것”… 등등의 다양한 답이 나옵니다. 3차적인 질문으로 “구원”이니 “영생”이니 “천국”이니 “거듭남”이니 “행복”이니… 등등을 다시 물으면 또 다시 다양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여기에 또다시 4차적인 질문… 5차적인 질문… 등등으로 계속 물음이 이어진다면… 아마 믿는 이들의 모습은 제 각각일 것입니다. 그래도 1차적인 고백(예수는 그리스도)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즉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 사업하시는 분들은 혹 그들의 용어로… 노동하시는 분들은 혹 그들의 용어로… 정치하시는 분들은 혹 그들의 용어로… 철학하시는 분은 혹 그들의 용어로… 등등 다양하게 2차 3차 4차… 적인 질문들의 답이 나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각가지 종교 문화가 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에 유교의 문화에서 자라신 분들은 혹 그들의 용어로… 불교의 문화에서 자라신 분들은 혹 그들의 용어로… 도교나 무속의 문화 속에서 자라신 분들은 혹 그들의 용어로… 2차 3차 4차…적인 질문들의 답이 나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1차적인 답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다양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1차적인 답에 대한 2차 3차 4차 5차… 적인 질문의 답은 각자가 처한 삶의 장으로부터… 다양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여깁니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사상(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과 다양한 종교의 문화권 안에서 살고 있으며 또 살아 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도저히 떼어 낼 수 없는 이 다양한 다원(주의)의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identity를 확보하면서 함께 살아 갈 것인가, 어떻게 함께 평화의 길을 모색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갖고 씨름하는 사람들이… 그(것)들과 대화를 모색하는 다원주의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원주의자는 혼합주의자 혹은 포괄주의자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혼합 혹은 포괄주의자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여 하나의 종교 이데올로기… 일종의 우주 종교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1980년대 초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melting pot” 이론 [한 솥에 이것 저것(다양한 이민자들의 다양한 사고)을 다 넣고 끓여서 (미국식에 맞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이론]이 이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자는 자신의 identity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사상(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과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다원주의자[자신의 identity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사상(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과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를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네… 혹은 이단이네… 하면서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내적 절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 대한 2차 3차 4차… 적인 자신들의 “해석”(예를 들면, 거듭남 혹은 객관적 계시? 혹은 계시진리?)을 가지고서 그들에게 잣대를 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됩니다. 더구나 거기에 자신의 해석은 “절대” 혹은 “객관”이라 여기고 다른 이들의 해석은 “상대” 혹은 “주관”이라 여기며 “이단” 혹은 사단의 영”이라고 한다면… 휴우~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identity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사상(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 혹은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자들의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3. 사유방식 (a way of thinking)

저는 위에서 “어떻게 자신의 identity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사상 (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 혹은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갚…하는 문제가 다원주의자들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첫번째로 사유방식 (a way of thinking)을 살펴 봅니다. 사실… 어떤 사유방식을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은… “절대주의” 혹은 “포용주의” 혹은 “다원주의” 가운데 어떤 길로 들어 설 것인가... 하는 중용한 갈림길이 됩니다.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에는 보통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헤겔 류의 “both-and”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킬케골 류의 “either-or” 방식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both-and” 방식은 “이것도 저것도” 모두 보면서 제 삼의 합을 찾아 가는 방식이고 “either-or”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방식입니다. 일찍이 헤겔은 “both-and” 라는 변증법적 사유 방식을 가지고 “역사”를 읽었고 킬케골은 “either-or”라는 실존론적 사유 방식을 가지고 “신앙”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역사를 읽는 것은 (역사는 자아와 타아의 만남이므로) 외재적인 요소이고 실존이라 함은 (스스로에 대한) 내재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재적 실존을 읽는 데는 “either-or” 방식이 그리고 다원적인 삶의 역사를 읽는 데는 “both-and” 방식이 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자… 곧, 자신의 identity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사상(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과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를 하는 자는… 신앙이라고 하는 실존적인 identity 를 고수하면서 남과 대화 (역사를 만들어 가는) 하는 사람이기 때문엡 이들에게 있어서 위의 두 사유 방식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은 불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존적인 신앙고백은 “either-or”의 방식이… 타자와의 대화에는 “both-and” 방식이 필요할 터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다원주의자는 (외적으로는) “both-and” 그리고 (내적으로는) “either-or”의 사유 방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원주의자는 비록 “either-or”에 의한 신앙고백의 주관적 진술이 있다고 해도 기독교 공동체가 아닌 타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객관적 혹은 역사적 진술을 원할 때에는 “both-and”의 사유 방식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사유 방식을 아우를 수 있는 사유 방식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김지하는 “아니다-그렇다”라는 논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아니다-그렇다”의 논리를 동학 사상에서... 최제우의 불연기연(不然其然) 곧,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의 논리에서 찾습니다. (ref. 김지하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70-73 그리고 169-170.) 제가 보기에 이는 김지하나 최제우의 독특한 사유방식은 아니고… 동북 아시아 지역의 문화에 팽배해 있는 陰陽의 사유방식에서 오는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 “낮이다”라고 했을 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낮이 아니다”가 됩니다. “밤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다”라고 했을 때 10년이고 20년이고…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아니다”가 됩니다. “어른이다”가 맞는 명제가 될 것입니다. “낮이다” 혹은 “아이다” 라는 명제는 “시간”(kairos)에 따라서 객관성을 잃게 됩니다. 결국 참 명제는 “낮이면서 낮이 아니다” 혹은 “아이이면서 아이가 아니다”가 됩니다. 혹은 “지금”이라는 “어떤 시간의 조건 하”에서 “낮이다” 혹은 “아이이다”라는 명제가 객관성을 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의 조건을 거는 것은 “절대”의 의미에서 객관을 갖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시간”(kairos) 뿐만 아니라 “장소” (topos)에 따라서도 명제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솥뚜껑이다”라고 하는 명제는 어떤 식당(topos)에 가면 “불판이다”라고 하는 명제가 더 맞게 됩니다. (솥뚜껑을 거꾸로 놓고 불판으로 쓰는 식당이 요즘 많이 있습니다) “시간”(kairos)과 “장소” (topos) 뿐 아니라 “목적” (telos)에 따라서도 명제는 달라집니다. 밥이 식사용일 때는 밥이지만… 우표를 붙이기 위해서 쓰일 때는 밥이 아니라 밥풀이 됩니다. 이렇듯이 “시간”(kairos)과 “장소” (topos)와 “목적” (telos)에 따라서 어떤 명제가 “일 수 있고/아닐 수 있고”가 됩니다. 이것이 “아니다-그렇다”의 논리이며 음양의 논리입니다. Taylor 라고 하는 해체주의자 (deconstructionist)는 이를 “/”를 이용하여 “A/the theology”라는 표현을 씁니다 저는 “/”를 이용하여 “절대/상대” 혹은 “상대/절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위의 “절대/상대” 혹은 “상대/절대”를 “both-and”와 “either-or”의 사유방식을 이용해서 표현하면 “either-or/both-and” 혹은 “both-and/either-or”가 될 것입니다. “either-or”나 “both-and”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meta-언어가 되는데… 상대의 개념아래 절대와 상대가 있는 “BOTH ‘either-or’ AND ‘both-and’” 혹은 절대의 개념아래 상대와 절대가 있는 “EITHER ‘both-and’ OR ‘either-or’ 의 개념이 될 것입니다.

다원주의자는 이러한 사유방식, 곧 “절대/상대” 혹은 “상대/절대 혹은 “BOTH ‘either-or’ AND ‘both-and’” 혹은 “EITHER ‘both-and’ OR ‘either-or’ 혹은 “A/the” 혹은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 의 사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어떤 조건 (시간, kairos; 장소, topos; 목적, telos)… 에 따라서 “객관” 혹은 “절대”를 주장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또한 반대로 어떤 조건 (시간, kairos; 장소, topos; 목적, telos)… 에 따라서 “주관” 혹은 “상대”를 주장할 수 있는 단초도 제공합니다. 이들은 이제 “자신의 identity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사상 (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 혹은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가지고 대화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무엇이 대화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갉 하는 문제가 대두 될 것입니다.


4. 대화의 초점

저는 위에서 다원주의자 [자신의 identity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사상 (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 혹은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를 하고자 하는 이]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할 것인가?,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 하는 문제를 던졌습니다.

사실 다양한 사상 (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과의 만남과 대화에 대해서는 (혹 지독한 배타주의자들이 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를 싸잡아 “정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은) 그렇게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플라톤 철학이 바울이나 어거스틴의 신학엡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퀴나스의 신학엡 그 근본적인 틀을 제공했다는 기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중세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철학에 다름 아님을 알고 있다면… 여타 사상과의 만남에 대해서 그렇게 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제는… 아마도 타 종교와의 만남과 대화에 있을 것입니다. 타 종교와의 만남 혹은 대화에 있어서 대화의 초점은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각 종교의 “교리들” (“상대”를 담보로 해서 논의된 신학적 담론 중에서... 논의와 합의를 거쳐 특정한 공동체에 “객관성”이 부여된 명제들… 감리교는 25가지의 종교강령이 있습니다)을 가지고 대화에 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다원주의자들의 대화에 있어서 사실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교리”에 초점을 맞춘다면… 더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리가 (“신앙”이라고 하는 주관적 진술을 떠나 “역사”라고 하는 객관적 진술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절대”의 영역에 속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니, “천국”이니 “신(하나님)”이니 하는 개념을 가지고 그와 유사한 타 종교의 “교리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둘째는 각 종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대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비교적 쉽게 대화를 풀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각 종교는 서로간에 다른 “교리”도 있겠지만 또한 서로간에 같은… (교리라고 하기보다는) “가르침”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황금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 (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는 명제는 “가르침”의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고등 종교라면은 어느 종교나 가지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면… 힌두교는 “Let no man do to another that which would be repugnant to himself”가 있고 유교는 “What you do not wish others to do to you, do not do to them”이 있고 불교는 “To all is life dear. Judge then by thyself, and forbear to slay or to cause slaughter.”가 있습니다. 모두 같은 취지의 뜻으로 보통 “황금률”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서로 공유하는 가르침에는 황금률 외에도 사랑, 정의, 평화, 평등, 진, 선, 미, 자유 등등의 인간 지고의 가치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쉬운 만남이 될 것입니다.

셋째는 각 종교의 “교리”나 “가르침”이 아닌… 동시대에 속한 각 종교인들이…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대화에 임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한 공동체의 인간으로서… 예를 들면 가정, 학교, 직장, 국갉 등등의 한 일원으로서 각가지 “사회적 이슈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각 종교는 나름의 “교리”와 “가르침”의 검증을 통한 후에 가부간 혹은 찬반간의 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원불교, 카톨릭, 그리고 개신교의 “삼보일배(도)”의 행진은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한다는 데 각 종교의 뜻이 모아진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종교인들의 “삼보일배(도)”의 “행진 그 자체”에 시비를 거는 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시비를 건다면 “새만금 간척 사업”에 대한 시비를 걸어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대화의 초점은 각 종교의 “교리” 혹은 각 종교의 “가르침” 혹은 각 종교인이 처한 “사회적 이슈”가 다원주의자의 대화의 초점이 될 수 있습니다.

“교리”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고… 많은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교리를 더 잘 이해하거나 혹은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그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교리를 믿고 따르며 준수하는 이들 (교회의 성도 혹은 다른 종교의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필요한 대화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만남과 대화는… 대화자들 서로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 예를 들어 저는 개인적으로 불교의 3毒, 곧 탐(貪), 진(嗔), 치(癡)를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서 받았던 세 가지의 유혹… 그리고 예수가 받았던 세 가지의 유혹 등과 결부해서 묵상하고는 합니다. “물질”에 탐낸다는 것… “사람”에게 성을 낸다는 것… “지혜(신)”에 있어 어리석다는 것… 이 세 가지 유혹은 인간에게 언제나 있는(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어찌 이를 이겨낼 수 있을까… (대승불교의 경우) 불가의 禪 수행으로 가능할까… 예수의 이김은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등등의 만남과 대화! 이는 제가 속한 공동체 곧 기독교의… 교리인 “罪”를 더 잘 묵상 (혹은 이해)하기 위한 만남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러한 대화가 자신의 영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제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편입니다. (사람이 어찌 모두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묵상을 토대로… “물질에 義를!… 사람에게 情을!… 신에게 聖을!”이라는 (나름대로의) 답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가르침”으로 대화를 하는 것은 “덕목”을 나누는 것이 됩니다. 사실 가장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황금률과 같은 것으로… 서로 같음을 확인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사실 “쉬운 것”이기에 “왜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만은… 이러한 대화는 세 번째 대화의 초점 곧 “사회적 이슈”를 함께 나누기 위한 전제적 대화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보일배(도)”를 함께 하려면 적어도… “가르침”에 있어서… 이를테면 “생명의 존엄성”과 같은 “가르침”에 공감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만남과 대화가 될 것입니다.

“사회적 이슈”로 대화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교리”나 “가르침”을 토대로 해서… 어떤 특정한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타 종교인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일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모를까… 사실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목회자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안쓰러울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대화의 주제, 곧 “가르침”과 “사회적 이슈”를 가지고 만남과 대화의 장을 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과 대화는 제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음껏 나누고 있습니다. 다만 첫 번째 대화의 초점 곧 “교리”에 대한 만남과 대화는 저 스스로 하는 편이고, 종교인들(신학을 공부하신 분들)하고는 혹간 나누기도 합니다.

아마도 다원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분들의 공통된 질문이 “그렇다면 선교(전도)를 하자는 것이냐? 말자는 것이냐?”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원주의자에게 있어서 선교(전도)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5. 선교 혹은 전도

저는 위에서 “다원주의자에게 있어서 선교(전도)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선교(전도)는 가능”합니다. 사실 가능하지 않다면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전도)가 없다면 그 공동체가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까닭입니다. 뭐… 굳이 구분을 안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만은 “선교”는 敎를 베푼다는 뜻이고 “전도”는 道를 전한다는 의미인데… 敎보다는 道가 선행하는 개념이기에 저는 “전도”라는 말을 더 선호합니다.

[** 잠깐 삼천포로 가면… 사서중의 하나인 중용(中庸)에서 중(中)은 성(性)이라고도 하는 첫 번째 원인 (the proto-cause)이고 용(庸)은 일상적인 삶을 뜻하는데 도(道)와 교(敎)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용의 도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명하는 바 [성(性)]을 쫓는 도(道)와 그 도(道)를 지켜주는 교(敎)의 일상적 삶을 말합니다. 중용 1장에 하늘이 명함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쫓음을 도(道)라하고 [率性之謂道], 도를 지킴을 교(敎)라고 [修道之謂敎]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中)은 성(性)에 응하는 천하의 근본이 되고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중(中)을 화(和)하며 드러나게 하는 것이 도(道)가 되는 것이며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이 도(道)를 지킴이 교(敎)가 [修道之謂敎]되는 것입니다. 즉, 중(中)>도(道)>교(敎)의 순으로 그 중요성이 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선”敎”라는 말보다는 전”道”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선교 혹은 전도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context(시간 kairos, 장소 topos, 목적 telos)에 속한 이들에게 한 (신앙)공동체의 가르침을 (敎 혹은 道) 베푸는(宣) 혹은 전하는(傳) 것이 될 것입니다. 敎 혹은 道라고 하는 것은 (물론 그에 대한 뜻, 곧 “해석”을 요하기는 하지만) 이미 그 (신앙)공동체에서 담론을 통하여 정해져 있는 것이고… 문제는 특정한 context를 어떻게 읽느냐… 그리고 그 특정한 context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 가르침을 (敎 혹은 道) 베풀 것인가 혹은 전할 것인갉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즉 특정한 context를 먼저 읽고… 이해하고… 그에 상응해서 베푸는(宣) 혹은 전하는(傳)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context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이 분석을 통한 context의 “이해” 없이 그저 敎 혹은 道를 베풀고(宣) 혹은 전하는(傳) 것은… 때로 베풀고(宣) 혹은 전하는(傳)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로막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더 세분해서 보아야 할 터이지만) 광범위하게 본다면… 단일 종교 문화이면서 다 인종 문화의 context (더러 아닌 곳도 있지만 유럽이나 북 남미 지역)도 있고, 단일 인종 문화 이면서 다 종교 문화의 context (더러 아닌 곳도 있지만 아시아 지역)도 있고,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면서 현대 문명에 뒤쳐진 context (더러 아닌 곳도 있지만 아프리카 지역)도 있습니다. 여기서 각 context에 따라서 선교 혹은 전도의 모습이 달라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context, 곧 시간 kairos, 장소 topos, 목적 telos에 따라서 주관 혹은 객관이 모두 주장될 수 있음은 전 글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context를 본다면… 단일 민족 문화에... 다 종교 문화에 (더 상세히 들어 가면 특정한 context에 따라) 부촌 혹은 빈촌이 있을 수 있고… 농, 어촌, 혹은 도시가 있을 수 있고… 나이에 따라… 교육 정도에 따라… 기후에 따라… 참으로 다양한 context가 존재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전도)대상이… 어떤 특정한 context에 속해 있는지를 읽어야 하는데… 다원주의자는 그 context를 “다양한 사상 혹은 다양한 종교 문화의 context”에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선교 혹은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화 혹은 만남 그 자체”가 선교이며 전도가 됩니다. 다 종교 문화 권에서 타 종교와의 대화와 만남을 갖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개성에 따라서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다’는 입장은 가질 수 있겠지만…) 그들과 “공존하지 않겠다” (싸우겠다) 이거나 “그들에게 선교 혹은 전도를 하지 않겠다” 하는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인데… “공존하지 않겠다” (싸우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이고 다 종교 문화에 대한 정면 거부이기 때문엡 아마 산에 들어 가던지 (진다면)… 감옥에 가던지 (다 종교를 인정하는 사회법을 어기게 되므로)… 중세기의 암흑기로 돌아 가던지 (이긴다면)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교 혹은 전도를 하지 않겠다” 고 하면 이는… 잘 생각해 보면… 전도자의 “직무유기”가 됩니다. 타 종교(인)… 그(들)에 대하여 선교 혹은 전도하는 것이 곧 다원주의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 기아와 질병… 혹은 인종 차별, 계급차별, 성차별, 혹은 정치적 억압 등이 있는 context가 선교와 전도의 주요 context가 될 때에는 그에 대하여 “알거나” 혹은 “알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처럼… 다 종교 문화의 context가 선교와 전도의 context가 될 때에는 그에 대하여 “알거나” 혹은 “알려고 하는” 자세는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자의 선교와 전도의 주요 과제로… (기아, 질병, 인종차별, 성차별, 정치적 억압, 그리고 타 종교 문화… 등등이 지역적으로 딱히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은… 광범위한 범위에서… 아프리카에서 기아와 질병 문제를 만나고… 유럽과 북 남미 지역에서 인종차별 혹은 성차별 혹은 정치적 억압문제를 만나는 것처럼… 타 종교 문화권에 있는 아시아에서는) 타 종교와의 만남과 대화를 가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될 것인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토착화의 문제(다 종교 사회라는 한 context에서의 敎와 道의 모습)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토착화는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에도 명시된 감리교의 자랑스런 특징입니다. (ref. 교리와 장정, 제1편 역사와 교리, 제1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 제2장 교리, 제2절 기독교대한감리회 신학을 위한 지침, 5. 토착문화) 결국… 다원주의자의 선교 혹은 전도는… (물론 “가능”하며… 다 종교 문화라는 특정한 context 안에서) 敎 혹은 道의 “토착화”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 여기서 베풀고(宣) 혹은 전하는(傳) 기독교의 가르침을 (敎 혹은 道)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교 혹은 전도”하면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이라는 한 가지 교리만을… 그것도 “문자 그대로 떠 올리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선교 혹은 전도”의 “전부”라고 여겨지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예수 믿고 죽어 천당 간다’라는 가르침이 과연 기독교의 전도자가 전할 敎 혹은 道의 내용 ‘전부’인갚 혹은 “’예수 믿고 죽어 천당 간다’는 가르침에 대한 제2의 제 3의 … 뜻과 해석은 없는갚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다음 장에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2001년 2월 1일에 쓴 글 중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 전도자의 상을 한 번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과연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 지하철을 탔습니다. 어느 사람이 들어 와서 외칩니다. "예수 믿고 천당에 가십시오." 잠시 후 그는 지갑에서 현금 4만원을 꺼냅니다. 천국의 전화번호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승객들에게 물었습니다. 맞추면 4만원을 준다고 했습니다. 또 잠시 후 그는 66-3927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총 66권이고,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 해서 66-3927이라고 했습니다. ... ??? 그리고는 몇 마디 더 하고는 다음 칸으로 사라졌습니다. 몇몇 승객들은 피식대며 웃었고, 저는 멍한 것이 한 대 맞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왔습니다.

또 다른 어떤 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문구를 시뻘겋게 써서 가슴과 등뒤로 걸친 샌드위치맨이 지하철에 올라타서는 뭐라고 한참 연설하고는 (제게는 거의 한바탕 욕설을 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만은) 사라졌습니다. 내용인즉, "예수 믿고 천당," "안 믿으면 지옥"입니다.

어느 마켓 앞에서 한 전도자와의 짧은 대화: "예수 믿으십시오/ 믿고 있습니다. … 교회에 다니십니까? / 다니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 구원의 확신이 뭘 말하는 것입니까? … /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까? / 우리 xx 교회에 나오셔서 구원의 확신을 받으십시오. / 교회에 다니고 있다니까요... /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지요. / 죽어서 천당 가는 것 말입니까?"***]


6. 천국-없다?

저는 위에서 “’예수 믿고 죽어 천당 (천국이라는 개념이 더 적합한 말이 되겠지만) 간다’라는 가르침이 과연 기독교의 전도자가 전할 敎 혹은 道의 내용 ‘전부’인가... 혹은 “’예수 믿고 죽어 천당 간다’는 가르침에 대한 제2의 제 3의 … 뜻과 해석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 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천국… 죽어서 우리가 가는 천국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차원을 생각해 볼 일입니다. 0차원을 우리는 0이기는 하지만 표현 할 때는 점으로 표현합니다. 0차원인 점이 모여서 이루어진 선을 1차원이라고 합니다. 1차원인 선이 모여서 평면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이를 2차원이라고 합니다. 2차원인 평면이 모여서 입방형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이를 3차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하면 3차원인 입방형이 모여서 4차원의 어떤 것을 만들어 낼 텐데… 우리는 여기서 이를 사유할 수 없습니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사유할 수는 있지만 3차원적인 한계 내에서 사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3차원의 한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3차원의 한계는 2차원인 시간(선의 시작과 끝은 시간을 만들어 냅니다)과 3차원인 공간(평면의 시작은 끝은 공간을 만듭니다)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벗어나지 못함을 말합니다. 즉,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딘가에" 천국이 있다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유하는 3차원적 제약 안에서의 서술입니다. 3차원적인 관점에서… 즉 어느 시간 속에 (이를 테면 사후에) 그리고 어느 공간에 (이를 테면 북극성에?) 천국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가정하면… 시간의 끝을 동시에 생각해야 합니다. (불가에서는 억겁이니 하면서 광대한 시간을 이야기하지만 수 억 억 억… 겁이라고 해도 그 끝은 있기 마련입니다) 즉, 시작의 시간이 있으면 끝의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천국의 삶이 “영원” 혹은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됩니다. 시간이 존재한다면 “영원” 혹은 “영생”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을 가정하면… 공간적 제약을 동시에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라는 공간 안에 A가 있으면… 저기라는 다른 공간 안에 같은 A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는 공간 속에서 감지 할 수 있는 물체 (이를 테면 육체)가 있다는 것이고 이는… 천국은 물체(육체)가 아닌 이를 테면 영이 있다는 명제에 모순됩니다. 공간이 존재한다면 물체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영”과 같은 것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천국이 “영원” 혹은 “영생”이라 하고… 공간적인 개념의 (평면이 만들어 낸 입방형의) “물체”가 아닌 (새로운 차원의) “영”이 가는 곳이라고 본다면… 천국이… 시간의 개념인 “언젠가" 그리고 공간의 개념인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이 언젠가 어딘가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공간적 개념에서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다”는 명제와 시간적 개념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다”라는 명제도… 자체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다”라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특정한 공간을 전제로 하는 천국은 넘어서 계시는 것이며…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셨다”라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창조하신 분께서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실 터이기 때문에 특정한 시간을 전제로 하는 천국은 넘어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언젠가 어딘가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없는 것인가? 적어도 3차원적인 의미에서는… 즉 언젠가 (죽어서) 어딘가에 (북극성에?) 있다고 하는 천국은 이미 자체로 모순이며 이러한 의미에서의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없는 것인가? 우리가 고백하는 천국은 모두 거짓인가? “천국은 없고 모두 거짓이다” 라고 답을 한다면 3차원적인 사고의 한계 속에서 정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정말 3차원적인 사고 밖에 못하는 것일까? 만일에 3차원적 사고를 넘어서 한다면… “천국은 있다”라는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3차원의 사고를 넘어서는… 시 공간을 넘어서는 사고를 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것입니다.


6. 천국-있다?

저는 위에서 “천국은 없고 모두 거짓이다” 라고 답을 한다면 3차원적인 사고의 한계 속에서 정답이 될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정말 3차원적인 사고 밖에 못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제기 하였습니다. 만일에 3차원적 사고를 넘어서 한다면… (논리적인 모순이 없이) “천국은 있다”라는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저는  2장 "신학의 ABC”에서 상대적인 인간이 절대적인 하나님을 논할 때에는 “상대”를 담보로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개념이 인간의 개념보다 더 상위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찬 가지로… 천국은 3차원적인 한계를 넘어선, 즉 시.공간을 넘어선 개념이기 때문에 3차원적 사유를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사유보다 더 위에 있는 상위 개념이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서술이 상대적인 것처럼 (한계 혹은 모순을 갖는 것처럼) 천국에 대한 인간의 서술도 상대적인 것 (한계 혹은 모순을 갖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3차원적인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즉 시.공간을 넘어서는 사유 속에서 “천국”은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다행히도 인류는… Einschtein 과 Heisenberg 이후에 the theory of relativity, Quantum 이론… 혹은 이와 유사한 Chaos 이론, Hologram이론, Fussy 이론, Butterfly 이론, Big Bang 이론… 등등을 전개하면서… 3차원적인 사유의 한계 즉, 시.공간적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시작했으며… 이는 아마도 21세기 새로운 개척의 영역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러한 이론들이 “객관성 있는 담론”으로 그 토대가 마련된다면… 천국을 이해하는데 혹은 이해하도록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현재로서는… 다만… “meta-언어적인 표현” (이를 테면 해석을 요하는 은유, meta-phor) 혹은 “신앙고백”으로나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비유”로 (비유는 언제나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리교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시.공간적 의미에서… (시간의) “때”와 (공간의) “곳”이 있는데… 다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때”와 “곳”이 “천국”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을 뜻하는 “때”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시간이기 때문에) 3차원적인 시간의 의미를 넘어서는… 다시 말하면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고 “카이로스”의 시간이 됩니다. 그리고 공간을 의미하는 “곳”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곳이기 때문에) 3차원적인 공간의 의미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간이 됩니다. 하나님 스스로 차원을 넘어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면… 시.공간의 3차원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천국은 meta-언어적인 표현으로 “시.공간을 넘어선 시.공간 안에 있다”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앞부분의 시.공간은 3차원적인 것이고 뒷부분의 시.공간은 3차원을 넘어서 있는… 즉 “하나님 (어찌 하나님에게 차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의 뜻”이 실현된 개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극성(^^)에 천국이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북극성에 천국이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때”와 “곳”이라면)… 없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때”와 “곳”이 아니라면)”가 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때’와 ‘곳’”… 그 “때”와 “곳”이 “천국”입니다. 오늘날… “천국”이 아닌 시.공간을 “천국”이라 하고… “천국”인 시.공간을 “천국"이 아니라 하니… 쩝!


7. 글을 맺으며…

다원주의자 (자신의 identity를 지키면서 다양한 사상과 다양한 종교와의 대화를 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서 쓴 그 동안의 글을 요약하면… 상대적인 인간이 절대자 하나님을 논할 때에는 언제나 “상대”를 담보해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절대성을 놓칠 수는 없기에 새로운 사유 방식 곧 “절대/상대” 혹은 “상대/절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타 종교와 만나는 다원주의자의 대화의 초점으로는 “교리”와 “가르침”과 “사회적 이슈”가 있는데… “교리”로 대화하려면 각자가 속한 신앙공동체의 “교리”를 더 잘 이해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며… “가르침”과 “사회적 이슈”로 대화하는 것은 무난하게 우리가 (일반 목회자가) 받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원주의자가 시도하는 다양한 사상과 다양한 타 종교와의 대화는 그 자체로 그들의 “선교 혹은 전도”가 되는 것이며 이는 다원주의자의 몫이라는 것과... 이러한 논의는 "토착화"로 이어지는데 "토착화"는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담론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나아가 “토착화”는 감리교의 자랑스런 특징이라는 점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원주의에 있어서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구원"과 관련된… "천국"에 대한 논의를 “절대/상대” 혹은 “상대/절대”의 개념으로 “있다/없다” 혹은 “없다/있다”의 방식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다른 여타의 주제들에 대해서도 각자의 처한 신앙고백 속에서 “있다/없다” 혹은 “없다/있다”… 혹은 “맞다/틀리다” 혹은 “틀리다/맞다”의 주장들이 오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끝으로…

우리 (목회자) 모두는 각각의 신학을 가지고 있고… 그 속에서 목회하면서 신앙 생활을 할 터인데…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성숙된 장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 동안 미천한 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늘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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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현 (218.145.253.114)
2006-12-07 12:45:24
...
그 조직신학 교수는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혹은 포용주의)와의 구별을 못하고 계신 듯합니다. 위에 적은 melting pot 과 같은 혼합 혹은 포용주의는 분명히 다원주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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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
이성민 (211.108.181.247)
2006-12-06 19:32:42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다음 글은 조직신학 이ㅇㅇ교수의 글에서 옮긴 것입니다. 님이 말한 다원주의와 어떻게 다른지요?

"종교다원주의는 사실상 자기종교를 중심으로한 형식적 포용주의이든지, 종교적 진화이념을 추종하여 미래의 통합종교를 추구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일 뿐이다. 여러 종교를 포용한다는 말은 그것들을 통합하는 상위의 원리를 추종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하며, 상위의 종교원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는 신앙보다 이성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종교 또는 종교라는 이름의 이성주의에 불과하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신앙을 상실한 종교학자들의 이성적 유희로서, 신에 대한 헌신이나 실제적 신앙생활이 결여된 언어의 게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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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
하늘뜨락 (58.143.152.119)
2006-12-06 00:31:35
장목사...
동학공부하러 오시게 그려...
연세대 알렌관에서 11일 늦은 5시일쎄.. 물론 저녁은 줌세
불연기연은 한자를 고쳐야쓰겄네..
내내 몸조심하이
리플달기
5 7

출처 국민일보 이미지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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