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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소울 푸드 국밥이야기
임석한  |  skygrac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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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12월 15일 (수) 00:07:10
최종편집 : 2021년 12월 15일 (수) 00:07:33 [조회수 : 3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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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선이 주어지면 중국인은 튀기고 일본인은 회를 뜨고 한국인은 국물을 낸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나라처럼 국물에 진심인 나라가 없다. 같은 쌀 문화권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국물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한국이다. 국과 함께 우리의 식문화는 예부터 밥 문화이다. 밥을 먹을 때 꼭 국이 함께 등장했다. 그 밥과 국의 콜라보가 이루어진 음식이 바로 국밥이다.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면 뜨끈한 국밥이 먹고 싶어진다. 우리나라 국밥의 종류는 셀 수도 없이 다양하다. 순대국밥, 설렁탕, 돼지국밥, 시레기국밥, 굴국밥, 우구지국밥, 콩나물국밥, 소머리국밥, 오소리국밥, 뼈해장국, 수구레국밥, 선지해장국, 육개장, 추어탕, 갈비탕, 황태국밥, 통영시락국밥, 속초문어국밥, 제주몸국 등등 매일 하나씩 골라먹어도 될 만큼 다채롭고 전국 어디서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

사극 드라마에 보면 시장 주막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국밥을 파는 주막장면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국밥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조선 후기 대거 등장한 보부상들이었다. 조선시대 경제가 발달하면서 보부상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생필품, 소금, 세공품 등의 물품으로 장사를 했다. 보부상들은 쉴 곳이 필요했고 주막은 숙소와 식당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주막에서 이들에게 제공했던 것이 장국밥이었다. 뚝배기에 밥을 담고 양지머리 살이나 우둔살에 무를 넣고 끓인 장국에 양념고기, 산적, 도라지, 고사리 등을 고명으로 얹어 먹었다. 장국밥은 간장으로 국물의 간을 맞춰 구수한 맛을 끌어내 장국밥이라 불렀다. 전국에 쌀과 무명 대신 화폐가 통용되고 이와 함께 외식 문화가 탄생하면서 서울에 수많은 장국밥집이 탄생했다

장국밥의 밥을 따뜻하게 제공하기 위해 발전한 우리 민족의 독자적 기술이 ‘토렴’이다. 보온밥솥이 없었기에 지어놨던 밥은 시간이 경과하면 금방 식어 버리고 딱딱하게 변했다. 식은 밥을 국에 그대로 말면 국물도 미지근해지고 맛도 떨어졌다. 토렴은 찬밥에 뜨거운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가 헹궈내어 밥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데우고 불리는 조리과정이다. 일본과 중국에는 없는 우리나라만 있는 독특한 방법이다. 이런 토렴기술과 장국밥의 인기에 맞물려 조선의 24대왕 헌종도 변복을 하고 드나들었다는 무교탕반이라는 국밥집도 기록에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무교탕반은 폐점을 할 정도로 장국밥의 시대는 저물게 된다.

그러면서 등장한 또 다른 국밥이 바로 뽀얀 국물의 ‘설렁탕’이다. 과거 조선시대 소는 궁궐, 관청의 허가를 받아서 도축되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소를 금하는 정책도 점차 무너지며 소고기의 민간 소비가 자유로워졌다. 그러던 중 1890년대 갑오개혁이 일어나면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백정에서 벗어난 일부는 직접 설렁탕집을 차렸다. 특히 살코기를 팔고 남은 부속 부위들을 이용해 설렁탕을 만들었다. 1904년에 종로에는 ‘이문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생겼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설렁탕집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전쟁물자 보급을 위해 식용소고기 생산정책으로 육우들이 대량생산하였다. 일제가 자국 군데에 보급할 소고기 통조림을 만들기 위해 조선의 소고기 생산을 늘리면서 통조림에 쓰이지 않는 부속 고기가 남아 돌게 되었는데 때마침 서울에 인구가 급격하게 몰리면서 재료도 남아돌고, 먹을 사람도 남아도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로인해 1920-1924년 사이 서울 내 설렁탕집 수가 25개에서 100개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된장이나 간장 베이스가 아닌 고기로 우린 국물은 그야말로 새로운 맛이었고 심지어 가격도 저렴했다. 장국밥이 20전이었다면 설렁탕은 10-13전 정도였다. 양반, 하인, 심지어 일본인들까지 설렁탕을 주문해 먹기 시작해 설렁탕 배달부가 넘쳐났다고 한다. 

비록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양반들은 처음에 설렁탕 먹기를 꺼려했었지만 장국밥의 반값정도인 저렴한 가격과 빠른 서빙 그리고 슴슴하면서 중독적인 감칠 맛 때문에 설렁탕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최고의 히트상품이 된다. 설렁탕의 인기는 여러 신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1924년 10월 2일 매일신보에서는 ‘설렁탕은 실로 조선 음식계의 패왕’이라고 소개했고 일제강점기 배경인 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날’에도 등장한다. 가난한 인력거꾼 김첨지가 병든 아내에게 끝끝내 먹이지 못한 것이 바로 설렁탕이다. 

날씨가 추워졌다. 역전국밥집에 가서 뜨끈한 오소리국밥 한 그릇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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