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김명섭 목사의 말씀학교
“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나?” 말라기1장 1절~5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1년 11월 29일 (월) 20:18:02 [조회수 : 72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나?” 말라기1장 1절~5절

 

 

1. 이스라엘을 향한 말라기의 경고

 

① (1절)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온전한 십일조를 강조하는 말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말라기서의 핵심주제는 십일조가 아니라 치유와 회복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말라기가 제시하는 치유와 회복의 방법은 온전한 예배다. 말라기는 ‘나의 사자, 언약의 사자(천사, 메신저)’라는 뜻이다. 초대교부들 가운데 일부는 말라기의 저자를 에스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말라기는 다른 소선지서의 제목과 달리 특정한 선지자의 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익명(무명)의 선지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인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언자(선지자, 선견자, 대언자, 메신저)의 진위여부와 진정한 권위는 자기주장이나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전달하는데 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의 문제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대중가수처럼 대중이 원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본분은 청중이 듣기 원하는 말이 아니라 말라기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달하는 데 있다.

 

② 말라기서의 몇 가지 특징

▶ 말라기가 전하는 본래적인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선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전이해가 요구된다. 말라기는 다른 소선지서와 달리 기록시기를 특정하지 않지만, 본문의 내용에 총독이 등장하고 성전제사의 타락상과 부패한 사회상을 살펴볼 때 스가랴의 예언으로부터 약 100년 후,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동시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바사제국이 통치하던 ‘B.C. 539~331년경’으로 추정된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대로 외적인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면적 신앙은 여전히 무너져있었다. 형식적으로 예배는 드리지만 감격은 없고 기도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다. 찬송은 부르지만 감사와 기쁨은 없고 성경말씀은 듣지만 삶의 변화는 없었다. 무기력한 신앙과 영적 나태함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예수께서 저주하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막11:12~21)’처럼 가지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실존이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말라기의 예언은 외적인 신앙생활을 지속하면서 정작 내적인 삶의 변화는 경험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을 향한 경고다. 말라기의 경고는 단순한 비난이나 책망이 아니라 침체와 타락에 빠진 원인을 규명해서 치유와 회복으로 나가는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세 가지 이유

 

① (2절 상)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변함없이 고백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해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무지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렘31:3)”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하고 인자한 사랑(헤세드, 아가페)이다. 잘하면 사랑하고 잘못하면 미워하는 조건적 사랑이 아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우리의 배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리지 않으신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 (롬8:38~39)” 내가 주님을 놓치더라도 마치 번지점프의 줄처럼 여전히 날 붙잡고 계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②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두 번째 이유는 광야 같은 고난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왜 고난이 계속되고 속히 구원하시지 않으시냐는 항변이다. 식민지배로 인한 포로생활 속에서 메시야 도래가 지연되는 지루하고 고단한 현실 때문이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5~6)” 과실수의 전지작업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함이고 잔디를 깎아주면 뿌리가 강해지고 잡초가 사라지듯, 하나님의 징계도 사랑이고 징계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고난 중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③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이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모두 고침을 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 예수께 나와서 감사와 영광을 돌린 것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서도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생명, 건강, 물질, 자녀 내 삶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삶은 그 자체가 은혜다. 모든 삶은 예배에서 시작된다. 왜, 모든 삶이 예배에서 시작될까? 예배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 이스라엘의 성공은 예배의 성공이다. 은혜가 없으면 감사가 사라지고,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 기쁨은 감사에서 나오고 감사는 은혜를 기억할 때 나오는 까닭이다. 예배의 본질은 잃어버린 은혜를 다시 새롭게 기억해내는 것이다.

 

 

3.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까닭

 

① (2절 하~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 하나님은 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신다는 우리의 통념에 반하는 질문이다. 단순히 편애나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25:32,34).” 에서는 하나님의 자녀 된 본분과 특권을 망각하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을 가리킨다. 에서는 보이지 않는 미래적인 축복보다 눈에 보이는 당장의 유익에만 급급한 삶의 대명사다. 이러한 삶의 방식과 태도는 개인의 인생에 그치지 않고 자손만대로 이어진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선호하고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다. 옳고 그름보다 손해냐 이익, 하늘의 보화보다 땅의 보화, 명분보다 실리, 직분보다 사리사욕을 추구한다. 미래적이고 지속가능한 가치보다 지금 당장 눈앞에 일회적인 가치를 선호하는 삶이다. 사실은 하나님이 에서를 버린 것이 아니라 에서가 하나님을 멸시해서 저버린 것이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 에서보다 야곱을 사랑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이 말씀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 먼저 되는 이가 많으리라(막10:31)”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작은 자를 들어서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8~29)”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거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만 교만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이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하면 안 되는 것은 돈 자랑, 힘자랑, 지식 자랑이다.

 

② (4절)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예다. 에돔의 삶에 방식은 에돔의 멸망을 예언했던 오바댜서에 분명하게 기록된다.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서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옵1:3).” 에돔의 수도는 오늘날 요르단의 페트라 지역인데 페트라는 큰 바위라는 뜻이다. 에돔(이두메, 붉다)은 세일 산이라는 지정학적인 요충지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렸다. 에돔 땅은 한마디로 최고의 ‘명당’이었다.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서 끌어내리겠느냐’ 오늘날 소위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부동산불패의 신화는 오만의 극치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교만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고 결국 망하게 한다. ‘교만필패(驕慢必敗)’인 까닭이다. 하나님은 에서의 교만을 미워하신 것이다.

 

③ (5절)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 얼핏 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지만 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지경은 선민 유대인을 가리키고 이스라엘 지경 밖은 이방인을 통칭한다.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몰랐지만 택하심을 받지 못한 이방인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을 누렸다는 역설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던 의인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죄인이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대반전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말라기의 예언은,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3:57)”,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4:24)”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예수께서 고향인 나사렛과 가버나움에서 아무 기적을 행치 않으시고 이방인에게 많은 기적을 베푸셨다. 오늘날까지 예수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안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밖에서 만왕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신다. 왜 지경 밖에서 크실까?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처럼 소중한 가치를 몰라보는 무지와 가까이 있으면 귀한 것을 모르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를 내리듯 차별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 사는 인생은 없다. 다만 장대비가 쏟아져도 장독대에 뚜껑이 덥히면 물 한 방울 들어갈 수 없듯이 악인은 은혜를 깨닫지 못할 뿐이고 선인은 은혜를 알고 사는 차이다.

▶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것은 우리의 통념이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다. 이것을 지금은 모르지만 그 날에는 확실히 보고 다 알게 될 것을 예고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축복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다. 구원의 기준은 장자와 같은 혈통이나 직분, 형식적인 율법준수 여부와 같은 외적인 조건 따위가 아니다. 삶의 우선순위와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고 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달려있다. 유능함으로 오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의뢰하는 사람이다. 선지자 말라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편리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사랑을 모르고 사는 에서인가?, 아니면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만끽하며 사는 야곱인가? 

김명섭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1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