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임종석 칼럼
‘주의 품은 뜻 나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기도하는 사람들― 살진 돼지를 행복하다 할 것인가 ―
임종석  |  seok9448@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1년 10월 28일 (목) 03:55:20
최종편집 : 2021년 11월 08일 (월) 23:38:38 [조회수 : 902]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이 세상에 왜 그렇게도 많은 이단들이 생겨난 것일까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7:7)

우리 믿는 사람들은 기도에 관해 생각하거나 말할 때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떠올리기도 하고 언급하기도 할 만큼 기도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한 가지로 말씀하시지 않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한 것일까요.

혹자는 ‘구하’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호소, ‘찾’는 것은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한 것을 얻기 위해 이어 하는 행동, 그리고 ‘두드리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같은 일을 인내하는 가운데 기다리며 계속적으로 반복하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저로선 이 같은 본문의 말씀에 따른 해석엔 공감이 되지 않지만, 그 해석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하나의 독립된 어구이라 한다면 그에는 절대적으로 동감입니다. 구하는 것을 주실 줄 믿음으로 기도하며, 그 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수험생이 합격을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제의 행동으로 옮겨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중도에서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합격증을 손에 넣는 순간까지 공부를 계속하듯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토마스 롱 같은 이는 이 세 가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구하’는 것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고 하는 기도, ‘찾’는 것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잘 모른 채 하나님께 나아가 그것을 찾는 기도, ‘두드리’는 것은 다급하여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경우 또한 본문의 말씀에 따른 해석엔 공감되지 않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그러니까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고 하는 기도가 있고, 또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잘 몰라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며 하는 기도가 있다는 데에는 견해를 같이 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다급한 일에는 그게 무엇이 됐건 무작정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구하’고, ‘찾’고, ‘두드리리’라 한 말씀에는 ‘무엇을’이라고 하는 목적어가 없으니 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한 것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 이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말씀하심으로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병행절 눅11:13은 그것이 ‘성령’라 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얻고자하여 기도드리는 것이 ‘성령’만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말씀의 한 절 또는 한 단락만을 떼어내어 독립된 말씀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사항을 놓고도 정반대의 표현으로 기록된 말씀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데에서는 같은 것인데도 하라 하는데, 다른 데에서는 하지 말라라 하는 것과 같은 식이지요. 그러기에 성경은 신구약 66권의 전면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단이라는 것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다 성경을 그렇게 읽지 않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자의적으로 해석한 탓이고요.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께서는 모두에 인용한 말씀의 바로 앞 장 마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먼저’란 물론 시간적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중심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마5-7장)의 절정에 해당되는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중한 말씀이지요. 크리스천이 추구해야 할 가치관의 중핵입니다.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6:31)라고 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지상(至上)의 목표로 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중심에 놓고 기도해야 할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을 성경 66권을 알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되 머리로, 지식으로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기노스코<γινώσκω>·야다<ידע>)이지요. 말씀이 내 안에서 진짜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육화(肉化)이지요.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라 한 찬송가 540장(통219)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하여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고저러고 할 것까지도 없이 그 방대한 성경 66권을 다 알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요? 그렇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리 살겠다 결심하고 결단을 내려, 그것을 조금씩이라 할지라도 실천으로 옮겨 갈 수는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극난한 일입니다. 그리하다 죽게 되면 죽는다는 각오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나의 아담의 후예로서의 인간된 모든 것, 육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 못된 자아, 성질, 구습, 구태 같은 죄성(罪性)의 나를 죽이지 않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요, 이 또한 말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역시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성경 66권을 정독으로 일독하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체험적으로 알아 실천에 옮기려 하는 시도인들 하기가 쉽겠습니까.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내용을 단순화 할 수 있는 데까지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요일4:8)이시니 성경을 요약하고 요약하면 결국 ‘사랑’이 됩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도 그러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했으니까요. (마22:37-40 참조)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우리의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2:5)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하여 살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뜻대로 살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결국 성경 66권의 가르침에 따라 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핵심의 말씀과 최상·최고의 예배

 

저는 앞에서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성경 66권의 중핵에 해당된다는 의미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는 성경 66권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작은 복음’이라 하기도 하고,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이라 하기도 하지요. 우리가 믿는 목적을 밝힌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이미 믿어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 백성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가기 전의 이 세상에서도 하늘나라를 누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12:1)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 하는 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12:1), 즉 최상, 최고의 예배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일상을 착한 삶이 되게, 사랑의 삶이 되게 하라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기도의 중심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기도하다 보면 그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불분명한 때도 있습니다. 큰 맥락에서라면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과 같은 거라는 것을 알지만, 좀 더 세밀한 부분을 들어 기도하다 보면 잘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를 먼저 드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앞에서 기도에 관한 토마스 롱의 세 가지 견해 중 세 번째의 다급한 일에는 그게 무엇이 됐건 무작정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과거형으로 말씀드린 것은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기라도 할 경우, 무엇을 생각하고 말고 할 경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살려주시라 그저 무작정 매달리는 것이지요. 얍복 나루에서의 야곱처럼,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있는 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본령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이루어 주시라는 기도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이 진짜 말씀이 되게 해 주시는 길로 들어서게 해주시는 것이지요. 말씀이 자신의 안에서 육화된다는 말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으로부터 나오셔서 내 안에 들어와 살아계시며 주인으로서 나를 주관하시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림속의 호랑이가 밖으로 걸어 나오며 어흥 하고 포효하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그림 속 호랑이는 절대로 그리될 수 없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안과 밖에 살아 계시며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는 가운데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급하여 사력을 다해 매달린다고 다 그런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선일 경우에 한합니다.

 

 

살진 돼지를 보고 행복하다 할 것인가

 

우리는 열심히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지 않으셨음에도 그 이유조차 알려 하지도 않고 그냥 또 다른 기도를 드리는 일이 많습니다. 그 기도를 이뤄 주시지 않는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사도 야고보를 통하여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약4:3)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의 정욕은 사전적 의미와 다른 데가 있습니다. 구하라, 주신다는 말씀은 전술한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를 전제로 한 것인데, 그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가 정욕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하여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약5:15)하신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약5:16)이 크다. 그렇다고 물론 ‘믿음의 기도’가 ‘병’만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지요. 구한 모든 것을 이뤄 받게 하는 것이지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그 같은 믿음으로 기도드린 여인이었습니다. 불임의 그녀가 아들을 주시라 기도한 뒤 이미 수태를 한 것으로 믿고 수심 가득했던 얼굴에서 근심의 빛이 사라졌던 것이지요. 그리고 얻은 아들이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쉬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의 후예로서의, 죄성의 인간 나를 죽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그런 나를 완전히 죽여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설령 완전히 죽인다 해도 어느 틈엔가 다시 잡초처럼 돋아나는 것이, 인간의 내면에서 그처럼 돋아나는 것이 죄성입니다. 그러니 그러는 족족 잡초를 뽑아내어 제거하듯 제거해야 합니다. 거듭 하는 말이지만 죄성의 나를 죽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내 뜻대로 되어 주실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그게 기도의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를 사력을 다해 계속 드려 가게 되면 나는 죽고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게 되는데, 그럼에 따라 자신이 드리는 기도를 이뤄 주신다는 믿음,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새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12:1)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롬14:8 참조).

‘산 제물’ ‘살아도’ ‘죽어도’ ‘사나 죽으나’ 표현만을 놓고 본다면 살벌하기까지 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각오와 결단으로 기도하며 그리 살다 보면 죽어 영생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생전의 이 세상도 하늘나라로 누리며 살게 됩니다. 찬송가 438(통495)장 가사처럼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것이지요. 은총의 삶, 복 받은 삶, 행복한 삶을 누림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저만의 실하지 못한 행복이 아니라, 아니면 살진 돼지의 그것 같은 행복이 아니라,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그런 풍요로워 실속 가득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임종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48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3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일봉성도 (122.101.20.19)
2021-10-28 10:44:39
목사님 대장동 사건은 살펴보지 않으셨나요?
임종석 목사님 지난번 칼럼에서 국민의 힘 소속인 윤희숙 의원이 제출한 사직서를
가지고 여러이유들 들여가면서 디스 한번 하셨었던게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임종석 목사님의 칼럼이 언제 쯤에 올라울까 좀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허물을 눈 가리고 아웅하면서 대충 넘어갈려는
돈키호테 리재명의 대장동 사기 사건에 대해 임종석 목사님이 중립적인 위치에서 뭐라고
비판을 하실지 궁금했었거든요.
저는 내심 목사님께서 아주 강도높게 그를 비판하는 칼럼을 기제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기대가 과했는가 봅니다.
야당 사람들에 대해서 칼날 같은 잣대를 들이대며 비판하시더니 문재인 대통령이나
여당 인사에 대해서 거의 비판하는 칼럼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비교하긴 그렇치만 전 임종석 목사님이 TBS 교통 방송을 진행하는 김어준과 비슷한
성향의 분이구나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대게 비판을 하는 것은 힘없는 야당보다는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진 집권세력들을 향해
비판을 하고 채찍질을 하는 게 다반사입니다.
즉 정신 똑바로들 차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국정을 잘 수행하라는 의미에서일겁니다.
그런데 몇 언론사와 몇 명의 칼럼니스트 그리고 김어준 같은 사람들은 그 반대편에
서서 따로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잘해서 역성을 들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친여 성향을 보이는 건 이들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해가면서 자기들이
누려온 혜택과 기득권을 놓기가 싫어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의 본분을 망각한 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내년에 정권이 바뀌면 이런 사람들은 과감하게 내치고 다시는 언론이나 방송사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언론이나 방송이 제대로 서야만 사회가 더 건전해지고 더 발전을 하기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리플달기
5 10
김경환 (211.54.116.232)
2021-10-28 16:15:49
이재명이나 임종석이나
1. 이재명 대통령 후보에 관하여

이재명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밝힌 사람입니다. 즉 어릴 때 밥벌이 하느라고 공돌이 하다가 손이 뒤틀어져 군에 가지 못했고, 영화배우가 맡긴 사건을 처리하다가 몇 번 그 배우의 집에 간적이 있고, 형수와 다투다가 순간적으로 욱하여 형수에게 쌍욕을 했으며, 지난 대선 때 문재인에게 아주 심하게 대했더니 대깨문에게 찍혀서 지금도 고전하고 있으며, 대장동에서 뜯은 돈으로 경기도민에게 마구 뿌렸고, 냄새 맡고 몰려드는 조폭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결코 그들에게 고개 숙이지 아니하였고... 민주당 경선에서 50%가량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머리회전이 빨라서 법적으로 책임질 일은 거의 다 비켜갔는데... 무상연애, 검사사칭 등 큰 사건은 福이 많아서 사건 자체가 놀라서 이재명이를 비켜서 지나갔습니다. 정말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골프장 캐디 한번 잘못 건드렸다가 패가망신 당했고, 안희정의 경우는 福이 지리 지리도 없어서 콩밥 먹고 있는 데 말입니다. 1년 4개월 동안 뭔 여자를 데리고 놀면서도 흔적이 별로 없고, 그 재판도 요리조리...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대단한 기술입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데, 이런 前科 4犯 이재명에게 40~30% 국민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재명이라면 무조건 좋다고 하는 국민이 있는 이상 이재명은 훨훨 날아다닐 겁니다.

2. 임종석 칼럼니스트에 관하여

임종석은 시종일관 右派는 까고 左派에게는 오냐오냐 합니다. 이게 이 사람의 本性인데 별 것 아닌 일로 이 사람의 본성을 바꾸라고 윽박지른다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미전향 장기수들 중 강성파는 끝까지 대한민국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북한만을 바라보다가 감옥에서 그대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을 뗀 김영삼이가 이인모 노인을 북한으로, 김일성 품으로 돌려보낸 적도 있습니다. 임종석 칼럼니스트는 자기 사상을 그대로 간직할 자유가 있습니다. 나의 경우 나는 극우꼴통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 데 누군가가 나보고 “너는 극우꼴통이다!”라고 일갈하면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이승만-전두환을 존경하고 김일성-김구 일당을 싫어하는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말입니다. 임종석 칼럼니스트가 좌파를 끼고 도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데 남이 이것 그만 두라고 하여 임 칼럼니스트가 덜컹하고 그만 둔다면 그건 쪼잔한 인간일 뿐이지요.

왜 이런 댓글을 다느냐고 의아해할 텐데... 노태우 사망으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태우는 5.18에 대해 사과했는데 이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5.18폭동’의 개가 되어 전두환에게 알랑거려 대통령이 되었다가 단물 다 빨아먹고 나니 이제는 신발을 거꾸로 신어 ‘5.18민주화운동’의 과실을 얻고자 발버둥 치다가 국가장이라는 또 다른 단물도 넙죽하고 받았군요. 노태우 같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간신배 인간보다는 시종일관한 임종석 칼럼니스트가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임종석 칼럼니스트에게 좌에서 우로 변절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기보다는 그의 주장이 엉터리라는 걸 밝혀 그를 부끄럽게 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리플달기
4 3
일봉성도 (122.101.20.169)
2021-10-29 07:39:39
중립적이지 않다면 정치적 칼럼은 쓰지 않으셔야 합니다.
김경환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팩트에 기인한 일리가 있으신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이재명이가 이번 국감에서 마치 싸움닭 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저런 정신적이 부분에
문제가 있었던거군요.
그래서 소시아 패스란 말도 나오게 된 거고요....
이재명과 민주당이 대장동 사건과 선을 긋고 있지만 지금 매일 새로운 증거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아마도 계속 피해 가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민주당은 이재명 다음의 플랜을 빨리 준비를 해놔와 할 것 같다고요....
사견이지만 제가 봐도 대통령을 감당할 만한 인격과 성품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수로 임종석 목사의 정치적 성향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라면 모를까 대한민국에선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뭐든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같은 잣대로 평가를 해야지 누구는
엄청 날선 비판을 하고 누구는 언급조차 안 하시니 이 건 잘못된 게 아니냐는 걸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안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면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고 또한
칼럼니스트로서의 자격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편향적인 생각을 가진 분이시라면 정치적인 비판의 칼럼은 멈추시고 이번과 같은
칼럼이나 쓰시길 권면 드립니다.
리플달기
4 3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