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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으로 부터의 탈주
이관택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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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9월 16일 (목) 01:29:47
최종편집 : 2021년 09월 16일 (목) 01:34:05 [조회수 :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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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으로 부터의 탈주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 수지·추재훈·영민, 들녘, 2019

책의 제목을 보고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제목은 10여 년 전의 내가 천착했던 고민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 통일과 인권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의 주된 고민은 “통일운동”을 하되 어떻게 하면 소수자의 인권을 담지하며 활동할 수 있을까에 집중되었다. 당시는 ‘민족’이라는 포괄적 개념 앞에서 오히려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의 인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성중심, 권위주의, 집단체제의 성격을 고스란히 가진 채, ‘민족 자주’라는 구호와 거시적 세계질서에만 초점을 맞춰온 이 전의 통일운동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와 함께하는 운동으로서 확장되기엔 그 한계가 분명해보였다. 더군다나 70년간 이어진 분단국에 살고 있는 이상 통일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틀의 통일운동을 구상하는 일은 더욱 시급하게 느껴졌다. 

그 때 내가 찾은 돌파구가 바로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은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기존의 틀이 아닌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사안을 재구성하는 실천철학이었으며, 무엇보다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페미니즘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올바르고도,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고민의 단초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과 작은 시도를 꾀해보았지만, 결국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마치 톱니가 무뎌져서 서로 겉도는 사이처럼 보이는 통일과 페미니즘을 구체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순전히 나의 부족함 탓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소위 MZ세대라 불리는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향한 페미니즘적 고민을 때론 날카롭게, 때론 자기 고백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물론 이들의 작업은 나의 고민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통일’에 대한 담론을 확장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틀을 사용하려고 했던 나와 다르게, 저자들은 ‘페미니즘’적 고민을 적용할 대상으로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분단국’에 방점이 찍혀있던 나와 다르게 저자들의 고민은 ‘페미니즘’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생각해보면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사회는 두 가지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하나는 강남역살인사건과 미투운동을 지나면서 진행된 ‘페미니즘 리부트’이며 다른 하나는 3차 남북정상회담을 전후로 무르익은 ‘한반도 평화무드’였다. 각각 현대사의 커다란 족적으로 평가될 만한 두 가지 사건은 한반도가 여전히 분단국이라는 상황과, 여전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에 의해 수많은 생명들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는 바로 그 구체적 상황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분단국이기 때문에 더욱 ‘남성적’이라 인식되는 승리에만 집착하고, ‘여성적’이라 치부되는 패배를 혐오하면서 도무지 용인할 수 없는 사회적 장치들과 표현들이 난무했던 한반도라는 공간은 말 그대로 야만적이었다. 야만은 가부장제의 다른 얼굴이며, 땅 밑에서 지속되고 있는 끝나지 않는 전쟁의 증거였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D.P>가 서글픈 분단국에서의 남성적 야만성을 ‘탈영’이라는 구체적인 소재로 폭로했다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하는 이 책의 저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분단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가부장제의 실체를 폭로하며, 결국 야만으로 부터의 ‘탈주’를 시도한다. 

그렇다. 10년전 의 나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보다는 차라리 ‘탈주’를 시도했어야 했다. 분단국으로 부터의 탈주,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주, 야만으로 부터의 탈주 말이다. 결국 분단국으로 부터 탈주를 한다는 것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지 않으면서, 승자도 패자도 되지 않으면서 한반도의 공간을 평화롭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로 하나씩 하나씩 일군다면 우리 안에 숨겨진 야만의 표정을 지워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가 승자이며 패자라는 사실, 나아가 가해자이며 피해자라는 사실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 - 본문 중 -   

이관택 목사 (라오스평화선교사, 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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