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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하우스》 (The Lighthouse, 2019)
이진경  |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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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9월 13일 (월) 21:52:24
최종편집 : 2021년 09월 13일 (월) 23:12:02 [조회수 :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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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라이트하우스》 (The Lighthouse, 2019)

 

등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광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배가 길을 잃지 않고 뭍에 닿을 수 있도록 빛으로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영어는 이 등대를 근사하게도 빛의 집, 즉 라이트하우스(lighthouse)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영화 《라이트하우스》의 등대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길을 인도하고 혼돈으로부터 인간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등대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욕망의 상징이며, 이 욕망을 둘러싼 인간의 파멸을 낱낱이 비추는 도구일 뿐이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2019년 작 《라이트하우스》는 심지어 공포영화라는 장르에 포함되기도 한다. 장르가 말해주는 것처럼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감독은 영화 속의 등대가 남근(男根)을 상징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상징은 성적이기보다는 철저하게 권력적이다. 1890년, 신참 에프라임 윈슬로는 이미 섬에서 등대지기로 일하고 있는 선임 토마스 웨이크와 함께 등대를 관리하는 일을 위해 외딴 섬에 도착한다. 그러나 선임 토마스는 에프라임을 철저히 등대로부터 배제시키며 그에게 허드렛일만 시킨다. 토마스는 철저하게 등대를 독점한다. 등대에 접근하고 싶은 에프라임의 불만과 분노는 날이 갈수록 싸여가고 두 사람의 갈등은 점점 더 파국을 향하여 고조된다.

고전영화처럼 거의 정방형의 화면비율에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관련된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독선과 폭력, 권력을 탐하나 그 권력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한 하등의 노력도 하지 않는 나태함과 교활함. 토마스와 에프라임은 절대 권력을 둘러싼 갈등과 그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는 상징의 향연이다. 정방형과 흑백의 화면이 주는 답답함 속에서, 난해하지만 흥미로운 상징들의 향연이 엄청난 두 배우의 연기와 함께 펼쳐진다. 상징들은 많은 신화적 요소들을 불러온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토마스의 모습에서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으며 예언력을 지니고 있으나 사람들에게 예언을 들려주기 싫어하는, 즉 능력을 독점하려는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를 읽는다. 영화는 에프라임에게서 불을 인간에게 전해주고 그 벌로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을 욕망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인간을 파멸시키는 인어 세이렌을 환상 가운데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의 모든 요소가 인간의 욕망추구와 그로 인한 인간의 파멸을 보여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모티프를 읽기도 한다. 빛의 근원인 등대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토마스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대제사장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아니라면 가장 거룩한 곳에 들어갔을 때 죽음을 당하는 것도 마침내 등대로 들어서 파멸하고 마는 에프라임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아니더라도 성경은 절대 권력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독점적인 권력을 탐하고 갈취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만 갖고 있는 권력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는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로 인해 파멸했다. 그 권력을 지닐 자격이 없었으면서도 그 권력을 탈취했다. 그렇게 그 아담은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젊은 에프라임은 자신의 죄를 가벼이 여겼으며 새 삶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당연하고도 충분한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머나 먼 외딴 섬으로 도피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다시금 그는 욕망한다. 그리고 파멸한다. 영화 중반에 에프라임은 자신의 본명이 토마스임을 고백한다. 두 사람의 토마스, 그리스도인들은 토마스(=도마)가 쌍둥이를 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두 토마스는 동일한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또 한 명의 토마스일지도 모른다. 욕망의 빛을 둘러싼 수많은 나방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빛은 어둠을 비추고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날것의 강렬한 빛은 눈을 멀게도 만든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한 욕망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눈이 멀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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