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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 심하보 목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재영  |  ojy0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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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9월 10일 (금) 20:06:24
최종편집 : 2021년 09월 10일 (금) 20:23:37 [조회수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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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

토마스 라나커(Thomas Linacre)는 영국의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주치의였고, 왕립의과대학의 설립자였으며, 위대한 르네상스 사상가인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경의 친구였다. 그는 말년에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복음서 한권을 받아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성경은 성직자의 전유물이어서 보통 사람은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리나크르는 교회사의 암흑기 중에서도 가장 칠흑 같은 시기를 살고 있었다.

즉 알렉산더 6세가 교황권을 쥔 시대였고 보르기아 교황이 뇌물, 타락, 근친 상간, 살인 등으로 기독교의 수치스런 역사에 크게 기여한 시기였다. 리나크르는 사복음서를 읽고서 한편으로 놀라면서 마음이 괴로웠다. 그는 “이것이 복음서가 아니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정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다. 

지난 날 누구나 선뜻 입에 올려 폄하하는 이가 없던 고귀(高貴)한 자리가 이젠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치기만만(稚氣滿滿)히 보여 경멸(輕蔑)과 조롱을 당하는 비극적인 세태에 우리가 살고 있다. 지금 국가의 현재와 미래의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大統領)직(織)을 존중하고 그 외의 대법원장과 국가의 공권력을 비롯한 기관을 인정하며 기대하는 이들이 있는가? 소수의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편 가르는 이들 외에는 인정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속한 조직과 주변인들에게 오히려 조롱을 받는 불신의 시대가 되었다.


전광훈 목사의 등장.

박근혜대통령의 탄핵으로 온 나라가 온갖 유언비어와 함께 혼란 중에 제대로 검증 할 여유도 없이 선동과 증오 속에 새 정부가 등장을 하였다. 문제는 새롭게 출발하는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부터 말의 성찬 뿐 그의 인격과 품격이 아닌 자칭 “캠코더”라는 신조어와 함께 중요한 자리마다 함량미달의 인사들이 등장을 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중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기대하든 이들까지 저들의 지나온 삶의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국민들이 염려와 함께 분노를 갖게 되었다. 인간 대부분 죄인들이지만 구설에 휘둘리는 이들이 국가의 공직(公職)에 오름은 본인을 비롯한 모두의 재앙이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의아해하면서 분노하는 가운데 전광훈 목사가 등장을 하였다. 그의 시의 적절한 자칭 “사이다 발언”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자 일부 정치모리배들까지 모여드는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정작 문제는 그가 내세운 목적에 뒤따라야할 인품이 구비되지 못하여 그의 다듬어지지 못한 거침없는 막말수준의 함부로 내뱉는 말, 경솔하고 천박한 행동, 그 주변 인물들까지 무책임하고 예의 없는 언사와 저속한 처신으로 인하여 점차 상식적인 이들이 그를 멀리 하게 되었다. 이제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사역에까지 자신들이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원인은 본인들이 내세우는 애국(愛國)에 걸 맞는 신앙의 인격과 덕(德을 갖추는 자기성찰을 소홀히 한 까닭이다. 

 

   
▲ 전광훈 목사 심하보 목사 ⓒ사랑제일교회와 은평제일교회 홈페이지

심하보 목사.

지난해 10월 26일 밤 10시 수많은 이들이 광화문에서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모인 자리에 등장한 심하보 목사의 12분의 짧은 간증 “나는 비겁한 목사였습니다”라는 메시지는 한순간에 13만의 조회 숫자와 수많은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1백만의 조회숫자를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그 이후로 그는 수많은 이들에게 유명인사가 되어 전목사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코로나 정국에서 나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들은 그동안 독재와 불법, 사회주의이념(社會主義理念)에 대하여 경각심을 일깨웠다.

깊은 내용 모두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이 갑자기 그동안 주장하든 미래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서로가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상대편을 공격하는 상식이하의 행태를 보여 이들을 지지하고 따르든 수많은 이들을 아연실색케 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하나같이 목적에 따르는 신앙적인 인격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가엾은 모습들이다. 누군가 그런 표현을 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는 것은 함정이다…”지난 주간 시골에서 만난 자칭 광화문까지 참석했던 장로님 부부들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국가를 염려하는 고귀한 뜻에 비하여 또 한편으로 죄를 짓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쓰렸다. 지금도 여전히 좌, 우를 불문하고 목소리 큰 자들이 옳다고 윽박지르면 정의(正義)가 되는 시대,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가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책임.

오늘 우리의 기독교대한감리회가 130여년을 존재하고 있는 신앙의 토양은 한때 불교와 유교가 융성했던 역사의 토대위에 있다. 과거 그 융성에 비하여 지금은 유명무실한 앞선 그 역사가 한편으로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자신이 따르는 진리를 위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고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하여 그 호응으로 전국 산천마다 사찰을 세워온 1천500여년의 불교가 쇠망(衰亡)하는 기간은 고작 15년이 걸리고, 뒤를 이어 등장한 유교(왕으로부터 정승, 판서, 지방향반까지 모두가 신자)였음에도 6백여년의 그 유교가 허물어지는 기간은 불과10여년이 걸렸다. 역사학자들의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13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전 국민의 18%의 어설픈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오늘 우리 기독교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가?...

이생의 삶이 전부이기에 이 땅에 사는 삶이 끝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이들과 달리 내세의 주님 앞에서 영원을 향한 심판을 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그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분명한 “네비게이션”이 있다. 만약 그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그가 어느 여정의 삶을 이끌어 왔든지 인위적인 삶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본인이 소명자요 지도자라는 확신이 있다면 수많은 추종자들, 요란한 칭송과 자기스스로를 높이는 구호보다는 그는 먼저 그분 앞에 계신 오로지 유일한 청중이신 그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으로 살고 그 생을 마치면 된다. 그 외의 것들을 기대하며 두리번거림은 모두가 위선이요 객기며 허세다.   

기독교는 말(言)의 종교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크리스천들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다. 그러므로 경박한 말을 하는 자가 신중한 사람일 수 없고, 사려 깊은 자가 천박한 말을 할 수는 없다. 하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야 두말해 무엇하랴, 성경말씀에도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 구도자들에게 실수보다 더 나쁜 것은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그 타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이들은 주변에서 자신의 피를 끓게 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심령이 뜨겁다는 것과 피가 뜨겁다는 것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상식과 생각 있는 이들마다 너나없이 국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는 시대에 적과 동지가 어디 있는가? 죠나단 에드워즈(18세기 미국교회를 구한사람)의 표현대로 “이 시대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잠시 지나가는 세상, 이 땅에서 주님 만나면 그는 어느 형편에 있든지 영원한 생명, 그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도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풍전등화’ 조국의 위기에 눈물로 중보의 자리에 엎드린 예레미야의 그 눈물이 필요하다.  

글을 마치며...

어느 랍비를 찾아갔던 한 박식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결코 나이가 어리지 않았지만,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랍비를 찾아가 본적이 없었다. “평생 무엇을 했는가?”라고 랍비가 물었다. “탈무드 전체를 세 번 훑었습니다.” 그 박식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 랍비는, “그래. 하지만 탈무드가 자네를 훑고 지나간 건 몇 번이나 되나?”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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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9-11 05:04:26
정치적 술수 관점에서, 출발은 좋았으나 결국에는 용두사미가 된 전광훈 목사!
전광훈이 실패한 이유는 아주 성급하게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자 한 과시욕 때문이다.

아프간 탈레반 2기 정권이 재집권한 과정을 살펴보면 탈레반 최고지도자는 公開的으로 全面에 나선바 없다. 막후에서 조정역할만 한다. 이런 방식은 종교지도자로서의 역할과 정치지도자로서의 역할이 서로 충돌하지 아니하고 매끄럽게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마피아 보스처럼 뒤에서 탈레반 내의 각 세력을 놓았다 내렸다 하면서 각 세력을 상호 견제하도록 만드는 정치력이 있었기에 종교최고지도자 겸 정치최고지도자로 높여지게 되었다. 아프간 탈레반 최고지도자는 이란의 호메이니 집권방식을 벤치마킹할 수준의 두뇌와 인내심이 있었기에 아프간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의 경우 그 자신은 경건한 일에 몰두하고, 추잡한 일은 아들 체자레 보르지아에게 시켰다. 즉 ‘아버지 로마法王’은 미사나 집전하고 막후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는 경건한 일을 하여 일반 민중의 시선을 빼앗고 ‘아들 추기경’은 무력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아버지의 권력 강화에 기여했다. 마키아벨리는 행동대장 체자레 보르지아를 높게 평가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 분담으로 그들의 왕국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전광훈이도 출발은 좋았다. 전광훈의 인격이 탈레반 최고지도자(또는 이란의 호메이니)나 알렉산레르 6세보다 못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성공하고 전광훈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전광훈의 <성급한 야욕> 때문이었다. 처음 황교안을 내세워 막후에서 정치할 때 나는 호메이니, 알렉산데르 6세처럼 한국에서도 정치지도자 겸 종교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황교안을 너무 쥐어짜서 황교안이 반발하자 전광훈이 직접 정치에 나서기로 한 때부터 잘못되었다. 황교안이가 전광훈 마음에 안 들면 대타로 김문수나 김경재를 내세워 막후정치를 계속하는 게 正道였다. 황교안이 전광훈을 이용하고 길에다 내다버린 격이 되었다. 김문수나 김경재를 황교안 代打로 내세웠더라면 전광훈이 황교안으로부터 이용당한 후 ‘팽’당했다기보다는 전광훈이가 황교안을 ‘팽’시켰다는 느낌을 주었을 터인데( 이게 정치력인데) 인격이 그렇고 그런 전광훈이 섣불리 정치 전면에 나섰다가 그의 本色이 다 드러나 정치지도자로서 빵점, 종교지도자로서도 빵점이 되었다. 나는 황교안 後任으로 그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 때부터 전황훈이 몰락했다고 본다.

호메이니나 탈레반 최고지도자,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그저 좋은 인상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친아들에게 온갖 더러운 일을 시켰다. 그래서 그 자신도 살고, 그 친아들도 살게 되는 지상왕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혀서라도 뭔가 해보겠다고 나선 전광훈에게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 성공했던 정치 겸 종교 선배들을 벤치마킹할 만한 명석한 두뇌가 없었다. 눈앞에 급급한 욕심만 있었다. 전광훈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그 본색을 스스로 다 까발렸는데... 하필이면 그 본색이 아주 더러웠다. 그러니 점점 더 쪼그라들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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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116.33.84.49)
2021-09-18 18:53:56
전광훈먹사님은 1990년대중반이전까지는 무명인물이었음~!!!!!
전광훈먹사가 언론에 처음으로 등장한건 1996년 3월 국민일보를 통해서였는데 그전에는 어떤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그 어느 좌~우파개신교언론사들에서도 알려지지않았을정도로 초짜무명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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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 (59.0.33.240)
2021-09-18 14:48:42
비판하기전에..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정부에서 예배 자체를 규제하거나 드리지 못하도록 강권하고 있고, 심지어 교회 패쇄까지 할수 있는 행정 명령을 시달하고 있습니다. 신사참배이후 이렇게 하나님앞에서 예배가 금지되거나 드리지 않도록 제한하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목사들은 신변안전과 여러가지 이유로 정부에 제대로의 의견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 장로교 단체에선 성도들이 돈을 모아 헌법 위배 명목의 재판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빌미로 인해 한국 교회의 예배를 탄압하는 현 정권에 왜 신변안전만 생각하고 침묵해야 합니까? 전목사의 거친 태도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나, 전목사처럼 용감하게 정부에 대해 교회 탄압에 대한 분명한 의견을 용기있게 제시할 목사가 과연 한국교회에 얼머나 있을까요? 누구나 장단점이 있기 마련힙니다. 정부는 전목사에 대해 인신공격적인 언론 플레이로 한국 교회의 이단으로 몰고 갈 태세이지만, 깨어 있는 주의 진정한 종이라면 한국 교회 예배를 탄합하고자 하는 정부의 숨겨진 모습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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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열사 (4.7.67.126)
2021-09-17 04:18:17
길고긴 7H잡sorry
유신의 망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 눈에 모든 일이 좌파 우파로 나눠서 보이겠지만,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식과 비상식으로 이슈를 판단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께서 하신 말과 예수께서 사신 삶이 그 기준이 되어야지 아직도 철지난 이데올로기 투쟁에 빠져서 좌파가 어쩌니 사회주의가 어쩌니하는게 우스울 따름이다. 이게 감리교 평균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기사는 결국 감리교에서 큰소리내는 50대 이상 남성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해서는 결국 매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투사하여 던져준 선별된 이슈밖에 모르니 이런 무식한 글을 아무런 부끄러움없이 명문이라 자신하며 공론장인 인터넷에 공개한 것일테다.
이 글의 필자는 감리교 젊은 목회자나 교인들하고 대화해본 경험이 없지 싶다. 아마 그들과 대화해 보았다해도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리 없다. 글에는 그 사람의 인품이 담겨있는데 이 글에는 글쓴이의 높은 자존심과 낮은 자존감, 쓸데없는 아집만 보이니까.
전광훈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인간의 자질에 미달되기 때문이다. 즉, 비상식적인 인물, 자신의 사익을 위해 예수를 팔아먹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근데 당당뉴스는 무슨 틀딱들 집합소냐? 댓글다는 할아버지 몇명 빼곤 아무도 답을 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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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80.231.212.250)
2021-09-19 09:07:54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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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영 (180.231.212.250)
2021-09-19 09:10:08
그저 길가 집 짖는 犬공으로 알고 지나칠 수 있으나
명색이 신앙인이니 당당을 기웃거리겠지...
비난이든 악풀이든 본인 이름 하나 밝히지 못하면서
흔적을 남기는 모습이 참으로 연민의 마음이다.
이런 이가 만약 牧師라는 타이틀까지 차고 있다면
본인이나 가족들 얼마나 비극인가? 등장 자제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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