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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가는 순리
황은경  |  hallofreu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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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9월 08일 (수) 23:28:14 [조회수 : 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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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늦장마 이후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느껴졌다. 일교차가 심해지면서 계절은 그렇게 바뀌기 시작했다. 장마가 걷힌 후, 맑은 하늘을 바라고 따가운 낮 햇살을 바랬지만, 근 며칠 동안 하늘은 꾸물꾸물 회색빛을 내더니 엊그제는 또 종일토록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음성에서 서울을 가는 내내 가늘고 세찬 비가 시야를 가렸다. 연신 와이퍼를 작동하였으나, 아주 굵은 비 앞에서는 와이퍼가 왼쪽 오른쪽으로 바뀌는 사이 덜컹거리는 가슴을 안고 운전을 해야 했다. 별로 반갑지 않은 비였다. 

원래 처서부터 백로 전까지는 강한 볕이 내려주면서 늦여름의 맺어가는 작물이 여물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올해는 처서부터 보름 동안 줄곧 비를 뿌렸다. 그 바람에 지난번 말했듯이 고추와 토마토 수확이 물 건너갔다. 그리고 강한 볕이 내려 준 뒤 백로에 비가 내려주면 그것은 익어가는 작물에 금상첨화로 더 잘 여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번 백로에 내린 비는 그다지 도움을 주는 기상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늦여름 작물 수확은 파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얼마 전 안타까운 소식은,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태백의 고랭지 배추가 출하를 앞두고 배추무름병으로 밭에서부터 이미 녹아내려 수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기후위기로 인한 우리의 밥상이 위협을 받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도시에서는 시장만 나가면 손쉽게 채소와 과일 등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장에 오기까지의 과정들을 들여다보면 한 작물을 얻기 위해 농부의 90여 일의 고된 손길은 묻혀지기 일쑤다. 오히려 유통업자의 경매 단가로 농민이 욕을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지고 본다면 소비자만큼 원생산자인 농부도 농산물 가격에는 속이 상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소비자는 비싸다고 하여 화나고, 농부는 너무 적은 이윤에 야속할 뿐이다. 그러니 올해처럼 때는 때이나 그 때에 제 일을 하지 못하게 될 때는 그 속이 얼마나 타겠는가. 나처럼 껄렁껄렁한 농부도 고추 2줄과 토마토 20주의 열매에 속이 상한데, 농사를 업으로 삼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은 얼마나 더 속이 타 들어갈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한 해 한 해 마주하는 기후 위기로 맞는 농사의 미래는 딴 세상, 먼 우주의 일이 아닌, 더 이상 손을 놓고 바라보고 있을 드라마 내용이 아니다.  

그나마 건진 몇 개의 고추를 철망에 널어 말리고 있다. 처서 전에 딴 고추도 여짓껏 널려 있다. 고추 건조기가 없어 그저 가을볕을 의지하고 있는데, 이 볕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쨍하고 해뜰 날을 기다려도 하늘은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은 듯 하다. 고추를 하나하나 정렬하여 잠깐 나오는 해 앞에 내놓는다. 고추가 좀 숨이 죽어준다면 가정용 건조기에 하루 정도 말리고, 얼추 말려진 고추는 마지막으로 하루나 이틀 정도 볕을 쪼아준다. 그러면 고운 빛을 내는 건고추가 되고, 그것들을 모아다가 방앗간에 갖다주면 고운 빛만큼이나 고운 가루로 환생을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김장도 하고 반찬도 하는 것인데, 웬걸? 기대가 컸던가. 사심이 컸던가. 원하는 양에 3분이 1도 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보름 동안 내린 비속에서 자란 고추는 거의 곰팡이가 슬었다. 한쪽 모퉁이가 동그랗게 곰팡이가 피면 하루 이틀 지나 십중팔구 고추 전체로 곰팡이가 옮겨가서 그 고추는 저 멀리 풀밭으로 던져지게 된다. 성한 부분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고추를 조각내지만 수고한 만큼 얻어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그동안 공들인 나의 정성을 떠올리며 상하지 않은 귀퉁이만이라도 구해내려 또 애를 쓴다. 기른 정이 무섭다는 말처럼 농사에도 기른 정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 미처 피지도 못한 꽃, 자라다 만 작은 고추, 크기는 굵으나 비로 인해 썩어지는 고추, 자라기는 했으나 익다 만 고추 등이 아마 추석이 지나면 더 이상 수확을 기대하기 힘들다 보기 때문에 고추밭의 고추대는 모두 뽑혀지게 될 것이다. 오월의 따뜻한 바람과 함께 시작한 고추, 한여름의 뜨거운 볕을 온 몸으로 빨아들이며 빨갛게 물들어가고, 드디어 고운 자태를 드러내어 마디마디 똑똑 따는 기쁨을 주었던 고추는 보름간의 긴 비와 찬바람이 부는 가을과 함께 자신의 소임을 다했음을 보고하고 마침내 땅으로, 흙으로 한 줌의 귀한 거름으로 떠나갈 것이다. 셈이 빠른 인간인 나는 기대했던 것보다 얻지 못하여 야속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찌 고추를 탓할 수 있으랴! 고추는 자연이 오고 가는 순리대로 행했을 뿐이니 나도 그에 맞춰 마음을 내려놓아야지. 그러니 있는 고추만이라도 정성껏 따서 말려서 고마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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