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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상생을 위한 젠더 스펙트럼
최은영  |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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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9월 07일 (화) 15:35:43 [조회수 :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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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박사(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사무총장)

 

무지개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자연 속에서 보기 어렵다면 인위적인 도구, 프리즘을 이용해 햇빛을 분산시켜 빨간색에서 보라색까지의 연속된 색, 무지개를 볼 수 있다. 잘 아는 대로 이렇게 생기는 빛의 띠를 ‘스펙트럼’이라고 한다. 스펙트럼은 과학적 정의에 그치지 않고 추상적 개념이나 견해에서, 여러 가지 갈래로 나뉠 수 있는 범위라는 인문학적인 뜻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최근 또 다른 스펙트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한 상담 TV프로그램이었는데, 부모에게 아이의 문제를 상담해 주는 과정에서 나온 ‘자폐스펙트럼’이다. 최근 정신의학에서는 자폐증의 공식 명칭을 ‘자폐스펙트럼 장애’로 바꿨다고 한다. 자폐증이 지닌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사는 눈을 맞추거나 소통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이는 아이를 관찰한 후에 부모에게 설명해주었다. 아이가 일반 아이들과는 달리 자폐스펙트럼에 속해 있어서 타인을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존재로 느낀다고 했다. 나아가 아이가 그 상황이 상당히 불안하고 두렵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설명하며 부모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고 조심해서 행동하도록 일깨워주었다.

젠더 스펙트럼도 마찬가지이다. 단 두 개의 성으로 고정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성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인정과 상관없이 이미 다가와 있다. 그것은 무지개 색과 같이 그 자체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지 편견이나 차별, 혐오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교만하고 독단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한다. 대표적인 예로 차별금지법에 대해 양 극단의 입장은 2007년 발의한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대립의 골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여자와 남자라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이들의 일방적인 횡포이자 공포를 야기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역사적으로 존재한 성소수자에 대해 대놓고 부정시하고 차별과 폭력을 조장하는 가짜 뉴스를 디지털시대와 맞물려 생산, 확산시키면서 말이다. 마사 누스바움(M. Nussbaum)에 의하면 “폭력에 관한 문학은 반복해서 공감이 부족한 인격이 타인에게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가 우리의 상상력으로 타인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끔찍한 짓을 하는데 덜 주저할 것”이라고 말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 인권의식이나 존중, 포용력 등 사회가 요청하는 것에 교회가 매우 뒤떨어진다. 물론 교회 전체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일례로 차별금지법만 보더라도 우세한 교세를 드러내는 몇몇 교회가 나서서 적극 반대한다.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한다. 대표되는 이들이 기독교인이라고 볼 때 부끄럽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한 치의 실수나 오류 없이 지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천여 년 전 예수 시대로 가보자. 많은 사람들은 세대, 인종, 국가, 장애, 성 등 여러 차이를 넘어 평등하게 대하고 행동한 인물을 예수에게서 찾는다. 당시 젊은 유대인이었던 예수는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지만, 때론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고고한 율법을 준수한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마 23:33)라는 심한 말씀도 하셨다. 그 대상이 된 이들은 당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위대하고 존경받고 철저히 율법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감히 누구도 그들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개의치 않고 단호하게 아닌 것에는 “아니오!” 하셨다. 그간 차별을 받아도 그것이 차별인지 모르는 사이 차별과 배제가 내면화된 사회에서 이등 시민, 아니 결혼이나 취직 등 많은 분야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성소수자들을 위해 예수와 같이 지적하고 “아니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에게든 친근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삶의 지침과 기준이 되는 책이다. 하지만 그 해석과 설교가 얼마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에 있는 이들을 아우르지 못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언자를 통해, 성서의 저자를 통해, 오늘날 목회자, 신학자, 신앙인의 목소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스피커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누구를 위해 행할 것인가? 적어도 가장 고통받는 그 한 사람이 있다면 그와 동일시하시며 아파하시는 예수를 통해 차별 없는 성경읽기를 권하고 싶다.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마저 물질화되고 소비되고 있지만, 기독교인이라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성경해석이 전통에 의존해 차별을 조장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저항하는 행동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불안의 사회를 살면서 익명성을 가장해, 지금의 불안의 탓을 돌릴 대상자를 찾아내고 그들에게 무차별적인 언사를 쏟아낸다. 대표적인 예가 성소수자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인 오늘날, 더 쉽게 편리한 방법으로 글로, 말로, 행동으로 생산해 버린다. 누군가를 병들게 하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디지털 기술로 인한 빠른 정보의 확산은 가짜뉴스를 양산하기도 하고 사실 어느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예전에는 어떤 생각에 대해 자기 그냥 주변 사람들끼리만 얘기하고 이렇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는데 이제 그런 표현들이 막 퍼져나가면서 집단으로 힘을 행사한다. 많은 곳에서 차별금지법이 갖는 폐해와 제정시 겪게 될 소위 가짜뉴스를 양산하며 불안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그것이 큰 문제이다. 사실 단순히 젠더에서 그치지 않고 세대간, 종교간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개인화된 사회에서 이런 집단논리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어쩌면 차별금지법(포괄적 평등법)을 반대하는 사람이나 찬성하는 사람 모두 전 국민의 눈으로 보면 아주 소수에 불과할 수 있다. 그 일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가 없어져야하는 근거로 그들이 교회 예배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교회는 오히려 그러한 사람이 자신의 온전한 존재 전체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끔 충분히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리스도의 정신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 내에서 반대의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차분히 공부하며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자료들을 소개하고 싶다. 이미 기독교 내에서도 학문적인 연구와 결과물은 저서로, 번역서로 계속 나오고 있다. 무지개신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무지개신학시리즈가 있다. 여기서 출간되는 책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고유한 능력을 발휘하여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출발했다. 기대한 대로 계속해 성소수자 이해를 돕는 출판물들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윌터 윙크 편의 『동성애와 기독교신앙』, 야마구찌 사토코의 『동성애와 성경의 진실』, 저스틴 타니스의 『트랜스젠더와 기독교신앙』, 패트릭 챙의 『무지개신학』과 『급진적인 사랑: 퀴어신학개론』과 『죄로부터 놀라운 은혜로』, 데린 게스트 등이 편집한 방대한 『퀴어성서주석』이 있고 2020년에 한티재에서 나온 박경미 교수의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도 적극 추천한다.

최근 성소수자들과 같이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껴안아 주는 모임, QnA(큐앤에이)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마음을 모아온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연대체가 구성된다고 한다. 이는 작은 나비가 태풍을 불러오듯 그러한 나비효과가 되리라 생각한다. 마구 떠드는 외침이 아니라 정제된 언어로 설득하고 진중하게 가는 모습, 진보하는 한국교회의 성숙함을 보고 싶다. 서구 유럽사회에서 성소수자 문제가 더 이상 큰 이슈가 되지 않듯이 한국사회도 이 분열과 갈등을 지혜롭게 이겨낼 때 진일보 하리라 본다. 스펙트럼 안에 있는 다양성이 무지개를 통해 노아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회 곳곳의 무지개들을 찾아가게 되길 바라며 지금까지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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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9-07 17:34:05
예수님의 가르침을 심히 왜곡하는 글이다
예수님은 힘없는 弱者이면서 동시에 대중사회로부터 疏外된 사람을 보살폈다. 한국의 동성애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만일 동성애자가 자기의 권리를 찾겠다며 이른바 바리새인과 결탁까지 했다면, 예수님은 이들을 보살폈을까?

한국의 동성애자는 사회적 弱者가 아니다. 동성애자는 이미 언론, 국회, 종교계, 사회단체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표계산에 바쁜 국회의원 수십명이 이른바 차별금지법을 입법시키기 위해 준동하고 있다. 한국의 동성애자 세력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동성애자 세력은 일부 기득권 세력과 손잡고 동성애 반대자를 골목 구석으로 내몰고 있는 형국이다.

<동성애자 개인>과 <동성애자 세력>은 다르다. 개인은 이성적이지만 군중에 휩쓸린 개인은 愚衆이 되기 쉽듯이... 세력화, 우중화 된 동성애 세력에 대해 아부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그럴듯한 이론을 제공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집단으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력화 되지도 못하는 인생이면서 동시에 사회 밑바닥에서 멸시당하는 인생을 돌본 것이지 현대판 바리새 세력(일부 국회의원, 일부 언론, 일부 사회단체, 일부 종교단체 등)과 손잡을 정도의 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한 소수자 인생까지 돌본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예수님이 어떤 소수자를 돌 본 것인지 잊지 말라! 소수자이기만 하면 단지 소수자란 그 이유만으로 사회적 약자이거나 사회적 강자이거나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돌봤다고 착각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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