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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란 누구인가? -뉴노멀 시대의 목사 전망
지형은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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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9월 06일 (월) 21:34:11 [조회수 :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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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란 누구인가? -뉴노멀 시대의 목사 전망

 

-지형은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들어가는 말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일을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가 나뉩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큰일을 겪으면서 정신의 인식과 연관된 사유와 판단에 따라 신체를 중심한 사회 경제적 구조의 변화를 도모합니다. 21세기의 오분의 일을 지나면서 지구촌이 겪고 있는 전염병 코로나19가 인류에게 그런 상황입니다. 오늘 제 발제의 제목 자체가 코로나19와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이른바 ‘뉴노멀 시대’란 표현에 코로나19 와중 또는 그 이후에 이어질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에는 그 이전부터 진행돼 온 4차 산업혁명 또는 인더스트리4.0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사안들이 포함돼 있기도 합니다.

‘목사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다룰 때 핵심 논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크게 변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걸려 있는 성경에 근거하여 논의한 목사직은 어느 시대나 문화권을 막론하고 비슷할 것입니다. 다만 각 시대와 상황에 따라 나름의 과제가 있어서 목사직 관한 본질적인 내용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발제의 부제가 바로 상황에 관한 표현입니다. ‘뉴노멀 시대의 목사 전망’ 말입니다. 

제 발제에서 먼저 목사직의 본질에 관하여 짤막하게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세미나에서는 유기성 목사님이 이 주제에 관해서 ‘목사란 누구인가? -목사의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발제하시니까 저는 짤막하게만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의 상황을 살피겠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와중에서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당혹감과 목사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보겠습니다. 상황에 관한 논의에 근거해서 앞으로 전개될 뉴노멀 시대의 목사직에 관해서 의견을 개진하겠습니다. 오늘 제 발제에서는 목사직의 논의 중에서 주로 목사 직무의 영역과 그에 관한 인식을 다루겠습니다. 이것이 코로나 상황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이기 때문입니다.

언어 사용에 관해서 하나 미리 말씀드릴 것은, ‘한국 기독교’와 ‘한국 교회’란 표현에서 한국 기독교가 더 광범위한 범위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란 표현은 전체 기독교 현상 중에서 주로 교회의 목회 현장을 중심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발제에서는 ‘한국 교회’란 표현으로써 어떤 때는 한국 기독교란 뜻까지 포괄할 것입니다.

 

목사직의 본질

 

목사의 직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위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신앙고백이라는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마태복음 16장 13~19절을 근거로 하여 요한복음 21장 15~17절, 마태복음 28:18~20절이 목사직의 중심 본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먹이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말씀이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육신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1장 1~18절 특히 14절에 말씀이 삶이 되는 거룩한 운동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은 기독교 신앙의 대전제요 토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의 흐름에서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과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들 삶에 아예 이사 오셔서 함께 사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구까지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표현으로 하면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 하늘 아버지의 나라가 사람 사는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목사의 직무에서 말씀 사역이 심장입니다. 초기 교회의 이야기를 담은 사도행전 1장부터 6장 7절까지에 이 점이 아주 뚜렷합니다. 특히 6장 1~7절에 교회 공동체 사역의 심장이 말씀 사역 곧 ‘로고스의 디아코니아’인 것이 명백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말씀 사역 곧 말씀이 삶이 되게 하는 일이 목사 직무의 심장이라는 것에서 목사직을 맡은 사람들은 이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청을 받습니다. 자신이 먼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깨닫고 그 깨달음대로 사는 것 곧 말씀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가 말씀 묵상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목사의 직무를 맡은 이들에게 말씀 묵상은 직무의 전제 조건입니다. 자신이 목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 묵상은 목사직의 기능이 아니라 목사직의 기능을 덕스럽게 수행하기 위한 목사직이란 존재의 전제 조건입니다. 말씀 묵상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며 살 수 있고 이로써 인격과 일상 그리고 사회와 역사의 변혁이 가능합니다. 말씀이 삶이 되는 거룩한 운동을 위해 하나님께서 목사의 직무를 제정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지평

 

벌써 꼬박 20개월 동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한국 교회는 당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신천지 집단을 통한 대량 감염이 발생하면서 정통 교회와 이단을 그리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사회적 관행 때문에 교회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감내했습니다. 이후의 상황에서 교회들에서도 우려할 만한 감염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방역 지침이 강화되면서 이른바 ‘대면예배, 비대면예배’라는 코로나 상황의 특수 용어가 사용되면서 교회의 입장이 갈리기도 했고 복잡해졌습니다. 교우들이 모이지 못하면서 헌금이 줄어들고 교회의 사역에 타격이 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의 외형적 규모가 양극화돼 있는 한국 교회의 구조가 코로나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교회들마다 인터넷 시스템을 통한 예배의 송출에 힘썼고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찬식을 진행하는 것 등과 관련하여 신학적 논의가 산발적으로 있었습니다. 일부 교회는 정부의 방역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했고 예배의 자유를 지킨다며 소송도 진행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예배당에 모이는 구조를 중심으로 사역을 진행해 왔다는 것입니다. 모이고 만난다는 점은 신앙의 본질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목회가 교회에 등록돼 있는 사람들, 특히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들을 목회의 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 사회와 교회의 교우들이 연관된 교회 밖의 사람들은 거기에서 사람들을 교회의 제도적 영역 안으로 데려오기 위한 대상일 뿐입니다. 선교 또는 전도란 개념을 아직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제도적 교회의 구성원을 만든다는 좁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기독교적인 영역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 자체 곧 교회가 존재하는 오늘날의 세계 자체가 목회의 대상이라는 개념이 아주 취약합니다.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동떨어진 섬처럼 고립돼 있는 현실이 코로나 상황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영역은 근본적으로 온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섭리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서 일하십니다. 목사의 직무에서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지평입니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의 표현대로 “모든 민족”이며 사도행전 1장 8절의 표현대로 “땅 끝”이며 에베소서 1장 23절의 표현대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입니다.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이 지평을 잃어버렸습니다. 목사의 직무에서 늘 온 세상을 바라보면 사회 역사적 지평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구한말에 우리나라 땅에 들어왔을 때를 생각하면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우리는 서구 열강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탐욕으로 나라가 기울어가던 불쌍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때 기독교 신앙은 나라와 민족의 희망이었습니다. 초기에 들어온 장로교와 감리교든 나중에 들어온 다른 교단들이나 신앙 운동 단체들이든 그들의 목표가 자기 교단이나 단체의 세력을 불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의 민초들에게 전해져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희망으로 살면서 한반도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초기의 한국 교회는 이 땅 전체와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 역사적인 흐름에서 분리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양적인 면에서 고도성장을 구가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자기 집단 안에 들어온 사람들만을 위한 닫힌 제도가 되었습니다. 개 교회와 교단들과 단체들이 주로 자기 집단의 세력 확산에 집중했습니다. 지평 상실, 교회의 큰 병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6절이 목사직의 지평과 연관된 말씀으로서 중요합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한글 성경 번역들이 개역개정판의 이 번역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처음 부분을 이렇게 옮겨야 좋습니다. 
“또 이 우리에서 나오지 않은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

통상적으로는 “이 (양의)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란 표현에서, ‘이미 우리에 들어와 있는 양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고 아직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이라고 이해합니다. 어떤 양의 우리를 설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안과 밖을 나누며 그 우리를 더 확장한다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생각하면 의미가 다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16절 전반부는 ‘이 우리에서 나오지 않은 양들’이란 뜻입니다. 독일어 취리히번역이나 루터역 성경, NIV나 다른 영어 번역들도 그렇게 옮겼습니다. 그러면 “이 우리”란 표현은 유대인 집단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문맥이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집단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말고 이방인들 곧 다른 민족들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따르게 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민족들이 생명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해석은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더 깊이 수긍이 됩니다. 20~24절을 보십시오.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는 헬라인 몇 사람 곧 ‘다른 우리 곧 이방인 집단에서 나온 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감격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6절 후반부를 보면 어느 하나의 종교 집단을 가정하고 그 집단을 중심으로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집단 중심적 사고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 모든 민족을 품으시는 구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 외의 다른 민족들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이고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나 교단이라는 특정 집단의 물리적인 세력이 확장된다는 번영신학과 성장주의에 매몰되어가면서 한국 교회는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돈은 많고 동원할 사람은 많아도 한국 사회의 가치와 정신문화를 이끌어가는 힘은 잃어버렸습니다. 남북이 갈린 상황에서 한반도 전체와 동아시아를 끌어안고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묵상하고 깨닫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참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사도행전인데,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양적인 성장이 기록돼 있어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 그 어디에도 어느 한 지역교회가 계속해서 양적으로 커진다는 유형은 없습니다. 땅 끝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라는 사명의 확산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 사명을 위한 과정적 존재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들은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타자를 위한 존재입니다. 한국 교회의 목사직이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깨달아 헌신하지 않고는 뉴노멀 시대에 우리 사회와 오늘날의 세계에서 지도력을 갖기 힘들 것입니다. 뉴노멀 시대의 목사는 교회가 위치한 지역 사회를 비롯해서 우리 사회 전체와 오늘날 세계의 역사 흐름에서 목사의 직무를 담당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근원

 

잃어버린 지평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잃어버린 근원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잃어버린 지평은 목사의 직무와 연관된 사회 역사적인 측면과 연관돼 있습니다. 목사직의 시공간이 무엇이냐는 논의입니다. 이에 비해 잃어버린 근원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현상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시원(始原)에 관한 논의입니다. 기독교의 근원과 뿌리는 유일하고 완결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입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한국 교회가 성서라는 근원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가 드러났습니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갈등 문제를 살피면 이 점에 관한 논의가 쉽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한국 사회에서 오래된 문제입니다. 이 갈등은 지역, 계층, 세대, 학연 등 다른 여러 요소와 결합되거나 연결되면서 작동합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정치 사회의 영역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대립 항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일으키는 기본적인 틀입니다. 특히 양대 정당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이 문제가 한국 교회와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습니다. 보수의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 또는 교회라는 현상은 정치적인 영역의 보수 진보와 연결되어 작동해 왔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일부 극우 보수 집단의 목사들은 대놓고 정치 활동을 해왔습니다. 일반 정치권의 보수나 진보 집단이 한국 교회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이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의제를 사회 정치적 논쟁의 장에 조금만 끌어들이면 한국 교회가 쉽게 반응하며 논쟁에 뛰어듭니다. 동성애와 관련된 차별금지법, 평등에 관한 법률, 건강가정기본법 개정 등이 그렇고 이슬람 문제나 미국, 일본, 북한 관계가 그렇습니다.

해방 이후의 우리 역사에서 보수와 진보의 사회적 갈등은 언제나 한국 교회와 연동돼 있었습니다. 제이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구도에서 형성된 냉전 체제와 그에 깊이 연결된 육이오 한국전쟁,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의 친일 성향,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 시절의 반공 이념과 미국 중심의 외교 상황 등에서 한국 교회의 보수 우익 성향이 형성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진보적 흐름도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만 다수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정치 사회적인 영역에서 교회 자체의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늘 보수나 진보에 종속돼 있었다고 보입니다.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성서에 확고하게 발을 딛고 서서 교회 자체의 영역을 확보해야 마땅한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승만에서 박정희와 전두환과 박근혜 등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에는 한국 교회의 보수적 흐름이 정치적으로 화답했고, 김대중 노태우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진보 정권에는 한국 교회의 진보적 흐름이 또 정치적으로 화답했습니다. 교회는 이래저래 정치 사회적으로 보수나 진보에 끌려가는 종속 변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에서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자신의 땅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잃어버린 자신의 땅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 땅을 되찾아 확보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로 돌아가야 가능합니다. 성경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확고히 서서 보수와 진보를 교회의 품에 끌어안아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에는 보수적인 세계관도 있고 진보적인 세계관도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서 무슨 판단을 하거나 무슨 행동을 하든지 성경의 큰 흐름에 서서 그 가치관으로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긴요합니다. 보수든 진보든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사용하는 집단을 거부해야 합니다. 보수든 진보든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과 권력을 움켜쥐려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관에 어긋납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본다면 인도적 인륜도덕, 생태적 환경윤리, 법치의 민주주의, 상생의 시장경제, 이 네 가지는 기독교가 발을 딛고 있는 성서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한국 교회가 확신을 가져야 할 사회 윤리의 기본 덕목입니다.

한국 교회가 한 십여 년 66권 성경을 붙잡고 처절하게 씨름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작업에서 목사직이 중심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목사의 직무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토대는 성서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입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깨닫고 그 말씀에 삶으로 순명(殉命)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움의 기본이고 이 기본이 바로 서야 비로소 목사다움이 가능합니다. 잃어버린 자신의 땅을 되찾기 위해서 한국 교회는 잃어버린 근원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얘기는 성서신학이 활발해지고 깊어져야 한다는 것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성서신학은 말 그대로 학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이라는 학문이 깊어지는 것과 교회가 갱신되는 것이 비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비례한 적이 더 많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며 사는 것, 이런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연대로 사회와 역사를 변혁시키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사는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뉴노멀 시대의 목사직은 하나님의 말씀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교회의 희망이 열릴 것입니다.

 

나가는 말

 

코로나19가 21세기의 인류에게 정신사적 인식의 전환과 문명사적 방향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로나19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지구행성이라는 한 배에 타고 있다는 것, 기후 위기 상황에서 어느 국가나 어느 민족만 안전한 시공간은 없다는 것, 인류의 연대와 상생의 윤리 없이 21세기의 인류가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중심 내용입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갑자기 적나라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특히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력의 중심에 서 있는 목사직이 현재의 당혹스러운 상황을 헤쳐 나가면서 미래를 열어가는 길은 잃어버린 지평과 잃어버린 근원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과 깨달음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돌이키고 행동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된 새로운 땅’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늘 중심에 품고 살았던 명제,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중심에 품고 목사의 직무에 헌신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근거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삶을 사랑으로 살림하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서 걸어가는 목사의 모든 직무는 말씀이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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