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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목사 김창식과 김기범 목사 안수와 그 역사적 의미
이덕주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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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9월 06일 (월) 21:23:06
최종편집 : 2021년 09월 06일 (월) 21:26:38 [조회수 : 2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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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목사 김창식과 김기범 목사 안수와 그 역사적 의미

 

이덕주(감신대 은퇴교수)

 

1. 한국 감리교회 선교역사(미감리회를 중심으로)

 

1884년 6월 24일 미감리회 일본 선교사 매글레이 내한하여 외부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미국인이 들어와 학교와 병원을 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음으로 한국의 문이 열렸다. 이에 따라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아펜젤러(H.G. Appenzeller)와 스크랜턴(W.B. Scranton), 그리고 스크랜턴의 어머니 스크랜턴 부인(M.F. Scranton)을 한국 개척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은 1885년 4-5월 서울에 도착하여 정동에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시병원을 설립하고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이 시작한 학교와 병원을 통해 기독교 복음에 관심을 표명하는 구도자들이 나왔고 이에 아펜젤러는 1887년 7월 24일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다. 이후 장경화와 유치겸, 노병선(노광옥) 등 배재학당 학생들이 계속 세례를 받음으로 아펜젤러는 서울 남대문 안에 한옥집을 사서 ‘벧엘예배당’이라 명명하고 한국인 주일집회를 시작하였다(정동제일교회의 출발).

1888년 5월에 일어난 ‘천주교 명동성당 건축사건’과 ‘영아소동’으로 기독교 선교가 중단됨으로 벧엘예배당 집회와 신학부 수업이 중단되었다가 가을부터 주일 집회를 재개하였는데 남자는 배재학당, 여자는 이화학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후 10년 동안 남녀가 따로 집회를 갖다가 1897년 정동 시병원 자리에 서양식 벽돌예배당을 건축함으로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정동 문화재예배당). 그 사이 교회는 꾸준히 발전하여 1889년 12월 정동과 아현, 상동, 동대문, 중앙(종로)교회로 서울구역회가 조직되었다. 1889년부터 서울 밖 선교를 본격화하여 우선 인천에 전도인 노병일과 전도부인 백헬렌을 파견하여 전도를 시작하였고 1891년 인천 제물포구역을 분립하여 존스 선교사를 담임자로 파송하였다. 이어서 1893년 평양과 원산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평양에는 홀과 김창식, 원산에는 맥길을 파송하였다. 이로써 평안도와 함경도, 북한지역으로 선교지역이 확장되었다. 남쪽으로는 1895년 수원과 공주에 선교부를 개설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1년에 이르러 미감리회 한국선교회는 지방회를 둘로 나누어 서울과 인천, 수원, 공주 구역을 관할하는 남한지방회(감리사 스크랜턴)와 평양과 진남포, 삼화, 증산, 운산, 수안, 원산 구역을 관할하는 북한지방회(감리사 노블)를 조직하였다.

참고로 1888년부터 1901년까지 미감리회 한국선교회의 교세 통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교사

(남녀)

본처전도사

교회당

교인총수

주일학교

입교인

학습인

총교인

세례

학교

학생

1888

6

2

1

11

27

38

34

3

43

1889

7

2

 

9

36

45

27

3

43

1891

11

1

 

15

58

73

9

2

76

1893

10

4

 

68

173

241

80

5

133

1894

14

2

 

76

145

221

51

4

170

1895

16

5

 

122

288

410

76

6

398

1896

14

8

 

223

588

811

145

7

536

1897

14

8

 

305

1,074

1,379

246

15

1,017

1898

19

10

15

556

1,502

2,058

461

27

1,115

1899

21

13

15

649

1,967

2,616

360

27

1,265

1900

24

13

38

792

3,105

3,897

580

25

1,409

1901

27

15

38

948

3,820

4,768

580

40

1,696

 

한국 선교에 착수한 지 3년 만인 1888년 통계에서 총교인은 40명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10년 후 1898년에는 2천 명을 넘겼고 1901년에는 4천 7백 명을 넘었으며 주일학교 학생을 포함하면 7천명에 육박하였다. 교회당 수도 1개에서 40개로 늘어났다. 매년 세례 받는 신입교인 수도 5백 명이 넘었다. 이런 양적 부흥과 성장으로 각 지방마다 목회자가 필요하였다.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남자 선교사 10여 명으로는 절대 부족하였다.

 

2. 신학교육과 토착인 목회자 양성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교육은 벧엘예배당에서 토착인 집회가 시작된 시기에 함께 출발하였다. 아펜젤러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배우려 찾아온 배재학당 학생들을 중심으로 1887년 가을 배재학당 안에 ‘신학부’(theological department)를 개설하고 방과후 시간에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토착인 목회자 양성과 신학교육의 출발이다(감리교신학대학교의 출발). 1888년 ‘영아소동’으로 신학부 수업은 중단되었지만 아펜젤러와 선교사들은 복음전도 사역에 관심을 둔 토착인 지도자들을 개인적으로 훈련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어느 정도 해소된 1893년부터 연회 안에 정규 토착인 목회자 양성과정을 만들고 농한기에 전도자 양성수업을 실시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신학반 혹은 신학회로 자리 잡았고 1900년부터는 신학회 교재를 겸한 <신학월보>를 간행하였다. 이런 신학회 수업을 받은 전도인들을 처음엔 교회 권사로 임명했다가 연회 과정심사를 거쳐 ‘본처 전도사’(local preacher)로 파송하여 선교사의 구역 목회를 돕도록 하였다. 감독의 파송을 받아 목회에 전념하는 ‘순행 전도사’(itinerant preacher)와 달리 ‘본처 전도사’는 자기 지역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성례(세례, 성찬, 축도, 혼인예식) 집행 권한은 없지만 설교와 교인 치리는 할 수 있었다.

다음은 1893년 이후 미감리회 연회에서 파송한 한국인 본처 전도사 현황이다.

 

연도

본처 전도사(구역)

1893

강재형(제물포)

1896

최병헌(정동) 노광옥(정동) 송기용(정동) 김창식(평양)

1898

김기범(제물포) 이명숙(제물포) 최병헌(정동) 김창식(평양) 이은승(상동) 노광옥(정동) 송기용(정동) 이승환(강화) 문경호(정동) 장경화(제물포) 이극혁(상동) 복정채(제물포)

1899

김기범(제물포) 이명숙(제물포) 최병헌(정동) 김창식(평양) 이은승(상동) 노광옥(정동) 송기용(정동) 오석형(평양)

1900

3년급

김기범(제물표) 김창식(평양) 최병헌(정동) 이은승(상동) 오석형(평양) 김상림(강화)

2년급

노병선(정동) 송기용(정동) 문경호(정동) 장경화(제물포) 이명숙(제물포) 이창학(상동)

1901

4년급

김창식(평양) 김기범(연안) 최병헌(정동)

3년급

오석형(평양) 노병선(정동) 송기용(정동)

2년급

김상림(강화) 문경호(정동)

1년급

장경화(제물포) 복정채(제물포) 박능일(강화)

 

 본처 전도사 파송에 변동이 많은 중에도 평양구역의 김창식, 제물포구역의 김기범, 정동구역의 최병헌이 4-6년 동안 꾸준히 전도사 사역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1901년 연회 기준으로 이들 세 전도사는 모두 ‘4년급’으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그런데 최병헌 전도사는 1900-1901년 사이에 아내와 두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유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던 최병헌은 집안 상사(喪事)로 인해 ‘1년간 근신’을 표명하며 목사 안수를 사양하였다. 그는 1902년 5월 연회에서 한국인 세 번째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로써 1901년 연회에서는 김창식과 김기범, 두 전도사만 목사 안수를 받았다.

 

3. 한국인 최초 목사를 배출한 1901년 연회


 
 감리교회 제도상 목사 안수는 연회(Annual Conference)에서 감독이 할 수 있다. 한국 감리교회는 1905년 ‘선교연회’(Mission Conference)를 조직하기 전까지는 ‘한국선교회’(Korea Mission)란 이름으로 중국 화북연회(North China Conference)에 속하였다. 그리고 매년 미국에서 감독이 나와 연회를 주재하였다. 비록 한국교회가 독자적인 연회를 조직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서 파견한 감독이 와서 화북연회 이름으로 목사 안수를 주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1901년 5월 9일부터 5월 14일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제17차 연회가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연회가 개최된 상동교회는 한국지방회 관리자인 스크랜턴이 담임하던 교회로 2년 공사 끝에 서양식 벽돌 예배당을 건축하고 ‘미드기념예배당’이란 명칭으로 연회 중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01년 연회를 주재하기 위해 방한한 데이빗 무어(Davd. H. Moore, 문대벽) 감독은 미국 오하이오주 아덴 출신으로 오하이오대학을 졸업한 후 남북전쟁 때 북군 민병대 장교로 참전하여 부상을 입은 후 제대하였고 이후 콜럼버스와 신시내티 콜로라도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콜로라도신학교 학장을 거쳐 덴버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1900년 5월 미감리회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어 한국과 일본 중국 관리 감독으로 4년간 시무하였다. 따라서 1901년 한국 연회는 그가 감독으로 선출된 후 첫 번째 아시아 여행이자 연회 주재였으며 또한 목사 안수였다. 무어 감독으로서도 의미 있는 연회였다.

 무어 감독이 주재한 1901년 연회에 참석한 선교사로는 선교 관리자 스크랜턴을 비롯하여 존스와 노블, 맥길, 벙커, 폴웰, 스웨어러, 벡크, 케이블, 모리스 등이었고 아펜젤러는 안식년 휴가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여선교부 소속으로 페인과 프라이, 홀, 루이스, 피어스, 해리스, 힐만, 해몬드, 에스티 등이었고 로드와일러와 커틀러는 안식년 휴가로 스크랜턴 부인은 병상에 있어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한국인 본처 전도사로는 김창식과 김기범, 최병헌, 이은승, 김상림, 노병선, 송기용, 문경호, 박능일, 이극혁, 고시영, 박성필, 김동현, 김익희, 박학신 등이 참석하였다. 연회 첫날 조직에 들어가 스웨어러가 영문 서기, 노병선이 한국어 서기, 이은승이 부서기, 스크랜턴이 통계 서기, 벙커가 회계, 벡크가 통계서기 부서기, 스크랜턴 통역으로 선임되었다. 

 연회 5일 째인 5월 13일(월) 한국선교회 관리자 스크랜턴은 한국인 본처전도사와 권사에 대한 과정심사 보고서를 감독에게 제출하였는데 김창식에 대해서 “평양 구역장 노블의 보고에 의하면 평양구역회 제4/4분기 계삭회에서 김창식의 본처전도사 직을 갱신하며 또한 집사 안수례를 받도록 천거하였다. 이에 그의 전도사 직책은 갱신되었고 그를 중국 화복연회 집사 목사로 안수하도록 추천한다.” 라고 보고하였고 김기범에 대해서도 “제물포구역 담임 존스의 보고에 의하면 제물포구역회 4/4분기 계삭회에서 김기벙의 본처전도사직 갱신 및 집사 안수를 천거하기로 하였다. 이에 연회에서 전도사 직책은 갱신되었고 중국 화북연회 집사 안수자로 추천한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최병헌에 관하여는 “정동구역 담임 스크랜턴의 보고에 의하면 정동구역회 4/4분기 계삭회에서 최병헌의 본처전도사 갱신을 천거하기로 하여 그의 전도사직은 갱신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런 보고를 접수한 연회에서는 남자 선교사 전원의 명의로 “김창식과 김기범을 본처 집사 목사로 안수할 것”을 천거하였다.

 이런 추천 과정을 거쳐 연회 마지막 날인 5월 14일(화) 오후 2시 상동교회에서 연회 마지막 순서로 김창식과 김기범, 두 전도사의 ‘집사(deacon)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었다. 무어 감독은 스크랜턴과 존스, 노블 등 ‘장로(elder) 목사’ 보좌로 선교사인 폴웰(ㄸ.D. Follwell)과 김창식, 김기범, 3인을 집사 목사로 안수한 후 맥길(W.B. McGill)을 장로 목사로 안수하였다. 선교 초기 한국 감리교회 목사는 집사와 장로, 두 고정으로 나누어 안수례를 행하였다. 집사 목사는 성찬례만 단독으로 집행할 수 없을 뿐 세례나 혼인예식은 집행할 수 있어 목회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무어 감독은 안수식을 마친 후 권면 요한계시록 7장을 본문으로 “직분을 받은 자 반드시 윗사람의 말을 순종할지라. 우리는 다 십자가의 군병들이니 군사가 만일 장수의 명령을 쫓지 않으면 필경은 패망할 터이오 장졸이 일심된 후에 능히 싸움을 이길 일이니 다 겸손한 마음으로 구주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다.

 이로써 한국 개신교회 최초 목사가 탄생하였다. 감리교회 기관지인 <신학월보>(1901년 6월)는 목사 안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이번 연환회에서 제일 긴요한 일은 대한 전도사 중에 김창식과 김기범 양씨를 선정하여 성품 주심이니라. 대개 우리 대한 예수 각명교회 중 전도하는 선생이 많으되 그중에 목사품이 있어 세례 줄 권세와 혼례를 행할 권세 중에 세례와 혼례 행함을 서양 목사와 동행할 수 있느니라. 대범 전도업은 지극히 높고 거룩하고 엄숙한 업이니 무릇 아무 사람이라도 가히 스스로 얻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성신의 사심을 당한 사람이라야 그 업을 할지니라(히 5:4) 우리 대한 미이미감리교회 중에 품을 가진 목사의 수효는 가장 적고 추수 걷어둘 것이 많아 구주 분부하신 대로 우리 연환회에서 추수하는 주인에게 구하여 일꾼을 보내어 추수하게 하여 주소서(마 9:38)하였는데 성신이 정령 인도하심으로 김씨 양제를 택하여 이 엄한 업을 맡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목사’를 보유하게 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대한 여러 각명 예수교회를 본즉 목사 성품을 받은 대한 형제가 없었으니 이번에 김기범, 김창식 양제는 모든 대한 형제 중에 비로소 처음으로 이 엄한 직분을 맡았으니 치하할 일이요 첫째는 대한교회 중에 품 받을 만한 형제가 있으니 교회를 치하하며, 둘째는 이 두 형제를 치하할 일이로다. 우리가 모든 교형 제자매에게 부탁하여 김씨 양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기를 청하노라.”

 한국 장로교회 기관지였던 <그리스도신문>도 짧게나마 감리교회의 목사 안수 소식을 알렸다. 

 “미이미교회를 혹 감리교회라고도 하며 며칠 전부터 연환회를 열고 대한 형제 중에 김창식씨와 김기범씨 두 분을 택하여 세례 주는 집사를 삼았으니 이 두 사람은 여러 해 전부터 주를 위하여 좋은 증인이 되었은즉 또 지금부터 흩어진 양을 위하여 좋은 목자가 될 터인데 김창식씨는 평양 노블 목사와 같이 있게 되고 김기범씨는 제물포 조 목사와 같이 있게 되었더라.”

 목사 안수식을 집례한 감독과 선교사, 이를 지켜본 동료 전도사와 권사들, 그리고 <신학월보>와 <그리스도신문>이 기대한 바와 같이 김창식 목사와 김기범 목사는 한국인 최초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교회를 위하여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았다. 

 

4. 김창식 목사와 김기범 목사의 삶과 목회


 한국인 최초 목사로 안수를 받은 김창식과 김기범, 두 목사의 삶과 목회 여정을 연표로 비교하여 정리하였다.

 

연도

김창식

김기범

1857

2월 22일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에서 출생

 

1868

11세부터 5년간 한학 공부

 

1869

 

8월 13일 황해도 연안군 해룡면 금천리에서 출생

1873

16세부터 5년간 집안 농사일을 도움

 

1878

21세 때 서울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젊은이를 보고 무단가출, 전국 유랑

 

1886

29세에 서울에서 박씨(노덕)와 결혼

 

1888

배재학당 학생 이무영(이교영)의 소개로 정동 올링거 선교사 집에 일꾼(마부 요리사)으로 들어가 일하며 복음에 접촉

 

1890

4월 10일 아펜젤러에게 세례 받음

인천에서 노병일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

1893

정동교회 권사로 임명. 홀과 함께 평양선교 개척

 

1894

5월 초 홀 부부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 평양 대찰리 한옥집에서 예배 시작(남산현교회), 5월 10-11일 평양기독교도박해사건으로 체포되어 평양 관찰사에 투옥되어 심한 매를 맞음. 한 달 간 요양. 6월 청일전쟁 발발 후 홀로 평양에 예배당을 지키며 교인과 피난민 구호활동

 

1895

미감리회 연회에서 평양구역 담임자로 파송되어 예배당 건축.

미감리회 연회에서 인천 제물포교회(내리교회) 본처전도사로 파송됨

1896

미감리회 한국선교회에서 본처 전도사로 파송됨. 노블과 함께 평양과 강서 용강 삼화 함종 증산 상원 등지 순회 전도 39곳 교회 설립, 신학회 수업

미감리회 신학회 수업

1897

 

인천 우각동과 용동, 담방리, 영종도, 부평, 김포, 강화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 연안 순회 여행 중 해적에게 화를 당함. 엡웟청년회 인천지회(나인데회) 총찰위원 및 학문국장으로 활동

1898

5월 23일 백일해로 죽은 홀 부인의 딸 에디스(3세)의 유해를 담은 관을 지고 육로로 1주일 걸려 서울에 도착하여 양화진에서 하관예배. 8월 31일 미감리회 연회에서 평양구역 순행 전도사로 파송. 삼화(진남포)로 이주

미감리회 연회에서 원산지방 전도사로 파송되어 맥길, 아펜젤러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원산에 도착, 원산 병원에서 전도 호라동, 원산 근방 학익동과 안변읍에 전도

1900

평양 삼화 강서 강서 함종 증산 등지 사경회 인도

10월 미감리회가 원산 선교를 남감리회에 이양하기로 결정함으로 인천으로 복귀, 연안구역 담임자로 파송되어 연안과 배천, 평산 순회 전도. 부임 직후 연안읍교회 교인들이 지방 관리에게 체포되는 사건 발생

1901

5월 14일 미감리회 연회에서 무어 감독 집례로 한국인 최초로 집사 목사 안수를 받고 수안에 파송됨

5월 14일 미감리회 연회에서 한국인 최초 집사 목사 안수를 받음. 11월 연안읍교회 부속학교 설립. 개성과 연안에서 남북감리교 연합사경회 인도

1902

미감리회 연회에서 신계구역으로 파송됨

12월 개성에서 남북감리교 연합사경회 인도

1903

 

미감리회 연회에서 인천 내리교회 부담임으로 파송됨. 11월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남북감리교 연합 사경회 강사로 참여

1904

미감리회 연회에서 북한지방 순행목사로 파송됨

 

1905

미감리회 연회에서 연안구역 담임자로 파송됨

2월 신병(신경쇠약증, 결핵, 심장병 등)으로 목회 중단

1906

미감리회 연회에서 신계구역 담임으로 파송됨

평양으로 가서 노블 부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요양

1907

미감리회 연회에서 영변지방 순행목사로 파송됨

3월 인천 내리교회 부흥회에 참석, 목회 복귀. 미감리회 연회에서 내리교회 부담임으로 파송됨

1908

3월 31일 미감리회 연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장로 목사로 안수받고 영변지방 신창구역 담임 및 순행 목사로 파송됨

미감리회 연회에서 내리교회 담임으로 파송됨(입교인 320명, 성인세례 423명, 유아세례 253명, 학습인 287명, 원입인 317명 총 1,600여 명)

1909

미감리회 연회에서 영변지방 신창 자파 양덕 구역 담임, 순행목사로 파송됨

질병 재발로 목회 중단

1910

미감리회 연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감리사로 선출되어 평양서지방으로 파송됨

6월 목회에 복귀하여 미감리회 연회에서 진남포교회로 파송됨

1912

 

3월 미감리회 연회에서 제명됨

1913

미감리회 연회에서 영변지방 감리사로 파송됨

2월 인천 내리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신앙고백, 인천 영화여학교 교장으로 사역에 복귀

1918

미감리회 연회에서 수원지방 순행목사로 파송됨

2월 부인(박루씨) 별세

1920

미감리회 연회에서 수원서구역 담임자로 파송됨

3월 27일 인천 우각동에서 별세, 수봉산에 안장

1921

미감리회 연회에서 해주지방 순행목사로 파송됨

 

1924

건강 악화로 은퇴(창설한 교회 48처, 관할 전도한 교회 125처, 방문한 교회 45처, 전도한 곳 170처)

 

1929

1월 9일 해주에서 별세

 

쓴 글

“마음 우희 꽃피는 거시라”(<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7.5.19.) “권면의 유익이라”(<대한 크리스도인회보> 1898.2.23.) “평양 교우 김창식씨의 보단”(<대한 크리스도인회보> 1898.9.7.) “평양 교우의 전도한 말씀”(<대한 크리스도인회보>1898.6.8.) “두 형제의 아사함”(<대한 크리스도인회보> 1898.11.16.) “제성 권면자 위문이라”(<대한 크리스도인회보> 1899.1.4.) “금생에 예비 내생지사는 사람의 본분이라”(<대한 크리스도인회보>, 1899.8.16.) “평안도 교회 소식”(<신학월보> 1901.4.) “겸손한데 거하야 사업은 크게 함”(<신학월보> 1901.11.) “식견이 부족이면 시여미시라”(<신학월보> 1901.11.) “남녀 경위문제”(<신학월보> 1903.8.) “전도인의 재덕”(<신학월보> 1904.2.) “상례는 마땅한 것만 행할 일”(<신학월보> 1907.3.) “나의 교역생활”(『승리의 생활』, 1927)

“고씨부인 별세한 일”(<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1.26.) “제물포 김기범씨의 보단”(<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9.7.) “시골 다녀온 일”(<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11.2.) “악인의 손에서 구원하심”(<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11.9.) “학문국을 진보케 하는 글”(<신학월보> 1898.11.16.) “원산편지”(<대한크리스도인회보> 1900.1.3.) “절주론”(<신학월보> 1901.1) “제물포 교우 장경화씨 별세함”(<신학월보> 1904.1)

 

5. 한국인 최초 목사 안수의 역사적 의미

 

 1901년 5월 김창식과 김기범이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사건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한국 토착교회 목회자의 지도력에 대한 확증을 의미하였다. 한국에서 첫 토착인 목사가 배출된 것은 개척 선교사들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선교에 착수한 지 16년 만이었다. 주변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진척이었다. 이는 그만큼 한민족이 기독교 복음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급속한 교세 성장과 부흥이 그 결과였다. 이와 함께 토착인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기독교 선진국 출신인 선교사들은 상당히 높은 도덕적, 신앙적 기준을 갖고 한국교회 전도자와 목회자를 선발하였다. 그렇게 선발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창식과 김기범이었다. 두 사람 모두 10년 이상 선교사를 도와 전도와 목회 사역에 임했다. 그 과정에서 선교사들을 ‘감동시킬 만한’ 믿음과 헌신, 그리고 희생적인 사역을 보여주었다.

 특히 김창식은 1894년 평양선교 개척과정에서 선교사를 도왔다는 이유로 평양관찰사에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는 중에도 신앙을 지킨 일로 선교사들을 감동시켰는데 홀은 그를 “예수님을 위한 신실한 순교자”라 표현하였고 홀 부인은 “조선의 바울”이라 불렀으며 스크랜턴은 “큰 믿음 안에서 인내와 기쁨으로 견뎌 낸 신실한 종”이라 극찬하였다. 김기범도 원산에서 선교사 없이 원산에서 홀로 사역한 일에 대하여 존스는 “고되기도 하였지만 시련을 잘 견디며 낙심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인천에서 함께 사역했던 케이블은 김기범의 “충성심과 능력 있는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한국에서 그리스도 사역을 위한 영광스런 기념비”라고 칭송하였다. 이런 선교사들의 칭송과 극찬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뛰어난 신앙과 지도력을 지적한 것으로 김창식과 김기범은 이를 대표하여 최초 목사로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둘째, 목사 안수를 받기 전과 받은 후, 김창식과 김기범은 감리교회의 전형적인 ‘순행 목회자’의 본이 되었다. 김창식과 김기범은 감리교 직제 상 ‘본처 전도사’였다. 즉 자기 고향에 머물러 생업에 종사하면서 목회를 돕는 이를 본처 전도사라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실제로는 감독이나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임지를 옮겨야 하는 ‘순행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개종 전 ‘전국 8도를 유랑해본’ 경험이 있던 김창식은 목사 안수를 받기 전부터 평균 3년 미만으로 임지를 옮겼다. 그의 증언이다. 

 “1899년에 목사[본처 전도사]의 안수례[임명]를 받고 삼화로 파송을 받어 두 해 동안 시무하고 다시 평양으로 도라와 일하다가 3년 후에는 황해도 신계로 파송을 받어 3년간 시무하였으며 그 후에 또 다시 평양 감리교회 제일예배당으로 파송을 받으니 그 때는 목사의 주택까지 다시 건축이 되었더라. 그 후에는 황해도 연안교회로 파송을 받어 오래 동안 시무하다가 다시 순행 목사로 피임되어 황해도 신계, 평안도 운산, 덕천, 개천 양덕, 맹산, 영변, 희천, 함경도 원산, 충청도 제천 등 각 지방으로 다니며 순회 전도 일을 보았고 1901년에는 평양 서지방 순행목사로 파송되여 진남포에 주택을 정하고 몇 해 시무하다가 1904년에는 영변지방 감리사로 피임되어 육년 동안 시무하였으며 그 후에는 경기도 수원지방 순행목사로 피임되어 1921년 매년회 때까지 시무하였고 또 해주교회로 파송을 받어 1924년 매년회 때까지 시무하다가 동년 매년회에서 노쇠로 인하여 은퇴의 은전을 받고...”

 그 결과 김창식은 1924년 은퇴하기까지 25년간 목회하면서 “이사한 수가 열 번이나 되고 교회 없는 곳에 들어가 새로 설립한 교회가 48처요 여러 교회로 돌아다니며 설교한 수가 115차요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에 손으로 가서 설교한 수가 45차인데 설교한 수를 총합하면 170차에 달하여” “조선 안에 감리교회가 있는 곳은 아니가 본 곳이 별로 없는” 결과를 보고하였다. 김창식만큼 여러 곳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김기범 역시 인천 제물포교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인천지방의 강화와 옹진, 영종, 부평 등지를 수시로 순회하였고 함경도 원산과 황해도 연안에서도 목회하였다. 이러한 ‘순행 목회’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전도와 목회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감리교 전도자와 목회자는 감독이나 감리사의 파송에 ‘절대 순종’하여 파송된 지역으로 가서 다시 옮겨 줄 때까지 머물러 전도하는 것을 본으로 삼았다. 이런 순행 목회를 통해 ‘교회를 내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으며 순종을 통한 겸비를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김창식과 김기범은 ‘감리교 전도자’의 원형이었다.

 셋째, 김창식과 김기범의 목사 안수를 계기로 한국 개신교회 목사 안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01년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로 예정되었다가 ‘집안 상사’로 안수를 사양했던 최병헌 전도사가 1902년 5월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어서 1903년 전덕기와 강인걸, 1907년 손승용과 홍승하, 권신일, 김우권 등이 계속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처럼 감리교회에서 계속 목사 안수가 이루어진 것에 자극을 받은 장로교회에서도 1901년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등 4개 장로회 선교부 연합으로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 후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실시하여 1907년 9월에 길선주와 한석진, 양전백, 이기풍, 송인서, 방기창, 서경조 등 제1회 졸업생 7명이 한국 장로교회 최초 한국인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렇게 장로교 첫 목사가 나온 1907년부터 미감리회는 종래의 신학회를 발전시켜 남감리회와 연합으로 ‘협성성경학원’(후의 협성신학교 및 감리교신학교)을 설립한 후 체계적인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과정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1901년 미감리회의 첫 번째 한국인 목사 안수는 한국 감리교회 뿐 아니라 한국 개신교회 전체의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과정을 한층 발전시킨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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