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일정한 행위나 노력 그리고 그 지속과 유지의 시간이 지나야 결과가 조금씩 나타나게 된다. 간장과 된장을 만드는 일은 잘 열매 맺은 콩을 깨끗이 씻고 정돈하여 적당한 열과 정성이 들어가고 알맞은 재료와 양념 등이 섞여 조화를 이루고 일정한 조건에 시간이 지나야 제대로 맛이 들게 된다. 김치도 유사한 정성과 시간이 조화를 이루어 맛있는 김치로 익어간다. 사람이 태어나 옹알이를 하고 고개를 가누고 몸을 뒤집고 서고 걷고 달리기 까지는 긴 시간과 돌봄이 있어야 한다. 자전거를 타거나 학생이 새 공부를 시작하고 학문과 지식을 넓혀 나가는 일과 직장인이 새 업무를 배우고 익혀 전문가가 되는 일도 마찬가지다.

서예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배우게 된다. 대학생 초기에 서예반에 들어가 서예를 공부하기로 맘을 먹고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한 적이 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서예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처음에 시작했는데 여러 날, 여러 달에 걸쳐 줄긋기와 길 영(永)자의 반복으로 조금씩 재미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활동이 왕성하고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대학 초년생에게 쭈그리고 안자 긴 시간 여러 날을 초보 서예 연습을 하는 것은 여간 쉽지 않았다. 점차 서예반 참석이 드물어지고 마침내 저절로 서예공부는 중단되게 되었다.

서예는 단순히 글자를 쓰는 일만이 아니다. 먹, 벼루, 붓, 종이 문방사우(文房四友)와의 조용한 만남이며 고전(古典)과 선현(先賢)들의 생각과 만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통해 자신과 깊이 만나는 일이다. 동서양 많은 선각자들과 그들의 삶과 고뇌가 담긴 말과 글은 다양한 형태로 인류에 전수되고 있다. 성현(聖賢)들의 언행과 문인들의 글은 후대에 이어져 말과 경전으로 때론 책이나 문건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사상과 가르침의 핵심은 서예나 미술품 등 예술의 형태로도 전해져 온다.

서예를 처음 공부하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서예가를 공부하다가 다음과 같이 한국과 중국의 대표 서예가들을 알게 되어 정리해 보았다. 한자에서의 유명 서예가들이 시대에 따라 등장하여 고유한 서체를 펼치어 왔다. 대표적 중국 서예가로 왕희지(王羲之, 321-379, 東晉)를 든다. 여러 서체를 두루 체득, 종합해 한, 위의 질박하고 웅혼한 서풍을 연미하고 유려한 서풍으로 바꿔 서예를 예술로 끌어 올렸다고 평가 받으며, 왕희지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그를 배우지 않고서는 서예를 말할 수 없었다고 평가되며 서성(書聖)으로 받들어졌다. 지영(智永,349-400)은 진,수(晋, 隋)간에 걸친 걸출한 서예가로 왕희지를 배워 뼈대를 얻고 여러 체를 섭렵하였고 초서와 해서가 출중하였고, 구양순(毆陽詢, 557-641 초당)은 벼슬이 솔경령, 홍문관학사에 이르렀고, 그가 쓴 '구성궁예체명(九成宮醴泉銘)'은 불후의 명작으로 구양순의 체로 이어졌다. 안진경(顔眞卿,709-785 당)은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며, 노군공에 봉해졌으므로 안노공이라 불리기도 하며,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을 변화시켜 왕희지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후대에 끼쳤다. 그 외에도 서예에 별과 같은 많은 명인들이 즐비하다.

우리나라에도 별과 같은 서예가들이 많았다. 신라의 김생(金生,711~791)은 해동 서성(書聖)으로 불리며 우리 서예의 첫 자리를 열었고, 이후 최치원(崔致遠, 857~908)은 그의 명필과 동시에 명문과 통합적 사상으로 당대를 이끌었다. 고려에는 탄연(坦然,1069~1118)과 이암((李巖,1297~1364) )으로 대표된다. 조선 초기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 李瑢,1418~1453), 석봉 한호(韓濩,1543~1605)이 대표 서예가라 할 수 있고, 이후 성호 이익의 형 옥동 이서(李潊.1662∼1723), 양사언(楊士彦,1517~1584)과 윤두서(尹斗緖,1668∼1715), 윤순(尹淳,1680~1741),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1705~1777) ) 그리고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우뚝 서 있으며, 물론 정계의 거두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1607~1689)와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 등도 유명한 서예가로 평가된다.

근대에 와서는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1903~1981 추사 이래의 대가로 추앙받을 정도로 아홉 차례 국전 심사위원(장) 예총회장 두 번,대한민국예술원회원(’54~’81) 등을 지내며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서예(書藝)로 할 것을 제창하여 관철시켰다. 그의 문하에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 한국 서예계의 기둥이 된 제자들이 나왔다.

소전과 함께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1911-1976)도 훌륭한 서예가였다. 소전이 예파(藝派) 서예가를 대표한다면 검여는 그 대칭 점에 섰던 법파(法派) 서예가의 대표로 평가된다.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1921~2006)도 당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이며, 특히 한글 서예를 발전시켰으며 『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책을 쓰고 '일중체'라는 서체를 확립시켰다. 후학으로 초정 권창륜 (艸丁 權昌倫) (1943 ~ ), 소헌 정도준(紹軒 鄭道準,1948~ ) 같은 제자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여초 김응현(如初 金應顯,1927~2008)도 유명한 서예가로 평가된다.

서예는 줄긋기와 점찍기, 삣침과 원 그리기, 갈고리 등의 기초로 통상 해서 (楷書), 예서(隸書), 전서(篆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다섯 가지 글자체를 공부하게 된다. 처음으로 배우는 글로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과 천자문 등을 익히고, 주자(朱子)의 권학시, 논어의 유명 글귀 등을 익히고, 점차 동양 고전을 배우듯 서예의 내용도 다양해진다. 4서3경과 불교의 경전과 고승들의 법어, 우리 선조들의 유명한 가르침 등과 국한문 성경의 내용들도 주요 서예공부 대상이 된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옛말이 아니라도 귀한 말씀과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쓰고, 새기고 게시하여 마음 판에 새기는 행위는 우리의 삶을 바르고 행복하게 이끌며 궁극에 우리의 이름을 후대에 남기는 단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의 깊고 큰 뜻과 감사의 표현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한 찬송가 작사가는 “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내”라고 노래했다.

사람은 자기의 생각과 삶의 자취를 글과 책으로 남기기를 희망한다. 서예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늘의 별과 같은 성현과 대가들의 가르침과 자세를 배우고 닦아 한걸음씩 나아가기로 마음 다짐해본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고 크고 아름답게 쓰고 새기고 펼쳐 이웃과 후대에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김홍섭 장로(인천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