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임종석 칼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가 한나로 살기
임종석  |  seok9448@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1년 08월 26일 (목) 00:21:46
최종편집 : 2021년 11월 08일 (월) 23:37:00 [조회수 : 867]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야곱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열심 있는 기도의 모범으로 야곱이 한 얍복 나루에서의 기도를 들기도 하는데요, 그 전말을 살펴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로서의 축복(장자권)을 형 에서로부터 가로챘습니다. 에서로서는 원한이 뼈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말에 따라 하란의 외삼촌 집으로 피해갔습니다.

외가로 간 야곱은 외삼촌의 두 딸을 아내로 맞아 데릴사위로 살며, 그 두 아내의 여종 한 명씩을 다시 아내로 하여 아내가 넷이 되었습니다. 아내들과의 사이에서 아들 열 하나와 딸 하나를 얻었고 막대한 재산까지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거기에서 더 이상 머물러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재산이 불어나자 욕심 많은 외삼촌 라반과 갈등이 생겼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이 있어 그에 따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야곱은 외삼촌 라만이 양털을 깎으려고 나가 집을 비운 사이 처자식과 종들을 거느리고 자기소유의 재산을 모두 챙겨 몰래 길을 떠났습니다. 도망을 친 것이지요. 그러나 야곱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당하게 얻은 자기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외삼촌이 욕심 많고 진실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보다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큰 죄를 짓고 그를 피해 이곳으로 오는 여정의 벧엘에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고,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며 그 외에도 크고 많은 약속을 하셨던 것이지요.(창28:10-22 참조) 그는 외삼촌과의 현실을 넘어서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사흘 후에서야 야곱이 도망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고도 그대로 보고만 있을 리 만무한 그였습니다. 그것도 야곱 일행이 사라짐과 동시에 가정의 수호신 드라빔까지 없어졌으니까요.

드라빔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재산 상속에 대한 법적 자격을 갖게 되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그것은 신적 영험이 있다고 믿어 구복, 점술, 신탁 등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라반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도 그는 야곱을 그대로 보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7일이나 걸려 야곱 일행을 추격했습니다.

사실 드라빔은 야곱의 아내로 라반의 딸 라헬이 훔쳤던 것인데, 그것의 가치를 알았기에 자칫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을 했던 것이지요. 어떻든 그녀의 재치로 아버지 라반에게 들키는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으나, 그로 인한 문제는 일개의 가정사로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드라빔 숭배로 인한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숭배가 실로 오랜 세월 동안 꼬리를 끌어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짓게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요, 이 사건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음 깊이 새겨둬야 할 점이 있는데, 아무리 사소한 죄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청산하지 않으면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떻든 하나님의 은총으로 야곱과 라반 사이에는 화친의 언약이 성사되는데, 이른바 미스바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야곱에게 있어 위험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외삼촌 라반에 의한 위험은 재산문제로 생겼기에, 드라빔 문제가 있기는 했으나 그 또한 가정사로 라반이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손을 쓰셨기 때문에 화친이 가능했지만, 그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위험이 바로 지척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형 에서가 장자권 문제로 복수의 칼을 갈며 20년 동안이나 야곱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결 안 될 문제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야곱에게는 아직 그런 하나님을 떠올려서 안심할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고향땅이 가까워질수록 야곱은 형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가 마르고 뼈가 오그라들 것 같았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 천사들(하나님의 군대)을 보내기도 하셨으나 야곱의 두려움은 커져 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미리 종자(從者)들을 형 에서에게 보내어 자기가 외삼촌 라반에게 더부살이를 하며 많은 식솔과 다수의 노비, 큰 재산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함으로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종자들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이리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생각한 야곱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식솔들과 종들, 가축들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형 에서가 한 무리를 치면 다른 한 무리라도 피하게 하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지요. 처자식과 재산을 한꺼번에 모두 잃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야곱을 보고 사람들은 약아빠지고 이기적인 그가 저 혼자 살아남자는 짓이라 하기도 하는데, 설마한들 그럴 리가요. 어떻든 그런다고 두려움이 가실 리는 없는 일, 기도라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라도? 말이 좀 과장된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믿음은 아직 그런 정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떠올려 아뢰며, ‘형 에서에게서 나를 건져 주소서. 처자식들과 내게 딸린 모든 무리를 지켜 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서지 못한 믿음의 기도이니 두려움이 사라질 리 없었습니다.

야곱은 그날 밤을 거기에서 새우며 형 에서에게 바칠 예물을 준비합니다. 말이 예물이지 그 양이나 규모로 보아 화해를 위한 조공과도 같은 뇌물이었습니다. 지척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태가 두려워 사지가 오그라들 지경이었으나 그는 도망치지 않고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준비를 했던 것이지요.

예물은 염소, 양, 낙타, 소, 나귀 등의 가축이 600마리 가까이나 되었는데, 가축이 주요 재산이었던 당시로서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번식을 위해 암수의 비율을 아주 적절하게 맞춘 것이었는데, 그의 목자로서의 유능함의 발로였고, 주도면밀한 치밀성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주도면밀함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염소 220마리를 보내고 다음은 양220마리, 다음은 새끼 딸린 낙타 30마리, 그리고 소 50마리, 마지막으로 나귀 30마리를 각각 사이를 두고 보냈던 것이지요. 양을 좀 더 많게 보이기 위해서였고, 불같은 성미의 형 에서의 마음이 점차로 수그러지기를 바라서였습니다.

야곱은 각 떼마다 종자를 딸려 보냈는데, 그 떼들이 하나씩 떠날 때마다 종자에게 ‘나의 형 에서를 만나거든, 야곱이 형님께 드리는 예물인데, 그도 우리 뒤에서 따라오고 있습니다’라 말하라고 단단히 일러 다짐해 두었습니다.

목자들이 가축을 이동시킬 때면 앞에서 인도하는 것이 상례인데,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고 종자가 떼의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에서에게 사람보다 먼저 예물을 보게 하는 것이 그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이처럼 야곱 그는 매사를 허술하게 다루지 않고 치밀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어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주인으로 하여 살아가게 하는 데에 일조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이스라엘로 가서

 

야곱은 먼저 예물을 얍복 나루에서 건너보내고, 일행과 함께 있다가 밤에 일어나 식솔들과 종들과 소유를 모두 건너가게 한 뒤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한판 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굴까요. 그 한바탕의 승부가 끝난 후 그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했고, 먼 훗날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천사’라고 했습니다. 어떻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라 할지라도 그 승부는 하나님께로부터 위임 받아 한 일임이 틀림없으니 그때의 그는 하나님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씨름’이라 불리는 그 ‘승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야곱의 기도로 보는 것이 거의 공통된 견해이지요. 기도를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나 입으로만 하는 그런 일반적인 기도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하는 기도, 땅에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 같았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연상되는 기도였습니다.

씨름은 하나님께서 거셨으나 사력을 다해 그에 임한 건 야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지 못하다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고요? 그렇지요. 그러나 그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져 주기로 작정하시고 시작하신 씨름이거든요. 최선을 다하면, 죽을힘을 다하면 져 주시리라 생각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필요로 한 것을 모르셔서가 아니라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매달리므로 당신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야곱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 말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고요? 그렇다면 어린 아들과 씨름하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들을 이기기 위해 씨름을 하는 아버지는 없지요. 누군가는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왼손으로 공격하시고 오른손으로 도우신다고도 하는데, 이제 좀 납득이 되시나요.

어떻든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습니다. 당연히 어장이 났지요. 좌골이 부러졌습니다. 야곱은 그대로 절름발이가 됐습니다. 병신이 된 거지요. 그런데 좌골은요, 몸의 중심부분으로 성경은 생명과 힘을 상징한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자신의 (잔)꾀에 의한 힘만을, 그러니까 머리와 인간적 힘만을 믿고 살아온 야곱을 여지없이 꺾어버리심으로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믿는다는 허다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 수단에 매달림으로 하나님을 배제 시키면서도 그 수단을 축복해 주시라 기도하는데, 야곱 또한 그런 부류의 뻔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든 야곱은 먼저 씨름을 시작한 그 사람이 보통 사람 아닌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그러니까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사력을 다해 매달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고 마는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뼈도 아니고 좌골 같은 큰 뼈가 부러지는 아픔에도 상대방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날이 새려하니 제발 좀 놓아 달라’ 하는데도,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보내 주지 않겠다’며 막무가내로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죽게 되면 죽는다는 각오로 하는 것입니다.

이에 그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사)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고 하는 의미의 ‘야곱’이라는 이름을 말하게 함으로써 이제까지 인간적 힘만을 믿고 살아왔던 자신을 고백케 했던 것이지요. ‘야곱입니다’라는 야곱의 대답에 하나님은 ‘이제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말입니다, 야곱이 하란의 외삼촌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에 있어서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아니 야곱 그의 전 생애에 있어서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지요. 속이기 잘하고, 빼앗고, 남의 발뒤꿈치를 잡는다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교활한 ‘야곱’을 ‘하나님과 겨루는 사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 되게 했으니까요.

사실을 말하면 야곱은 이제까지도 누구와 겨루든 진 적이 없이 늘 이기기만 했습니다. 무슨 일이 됐건 항상 자기가 주도했고,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져 목적한 바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아버지 이삭과도, 형 에서와도, 외삼촌 라반과도 그랬고, 이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과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은 사람들을 이긴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이긴 것이지만 하나님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져 주심으로 이긴 것이지요.

이제 야곱 그는 자기 힘으로는 누구도 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리 저는 절름발이가 누구를 이길 수 있으며 무슨 일인들 뜻대로 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어린 아들과의 씨름에서 져 주는 아버지처럼 자신을 사랑하셔서 져 주신 전능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의 믿기 전의 옛사람, 거듭나기 전의 옛사람을 야곱의 좌골처럼 못쓰게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자기, 육적인 자기, 그러니까 못된 자아, 성질, 구습 같은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까지 야곱의 기도(씨름)에 관해 생각해 봤는데요, 그 기도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야곱 아닌 하나님의 주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야 물론 하나님, 성령님께서 주도하셔야지요. 그러니 기도를 할 때면 그 모두에 그리해 주시라는 것부터 간절히, 정말이지 간절히 빌어야 합니다. 얍복 나루에서 한 야곱의 기도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리게 해 주시라고 빌어야 합니다. 모든 기도는 그렇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뤄 주시면 좋고, 아녀도 상관없다는 식의 기도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젖 먹든 힘까지 다하지 않으려면 기도하기보다 차라리 장대들고 하늘의 별을 따려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한나로 살기

 

저는 성경 인물 가운데 야곱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제 기도의 롤 모델로 하고 있는데요, 어느 쪽인가 하면 한나를 더 닮고 싶어 합니다. 물론 야곱의 좌골 골절의 고통에도 하나님께 매달려 간구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 열심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변화는 제가 닮고자 하는 기도임이 틀림없지만, 한나의 이루어 주시리라는 절대적인 믿음(신뢰)의 기도가 더 부러운 것입니다.

한나는 신실한 레위인 엘가나라는 사람의 정실이었으나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앗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여자가 시앗을 본다는 것은, 그것도 자식을 낳지 못해 그래야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슬프고 괴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태를 못해 자식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로 인함이고, 반대로 많은 자식을 거느리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의 결과로 여겨졌던 당시였으니 그녀의 가슴에 피멍이 드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시앗 브닌나는 자식을 쑥쑥 잘도 낳았거든요.

시앗 브닌나는 수태하지 못하는 정실 한나를 무시하며 모멸감을 주어 말도 못할 만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면 마음씨 곱고 정숙한 한나라 할지라도 속이 뒤집어져 격분될 수밖에 없었지요. 오죽했으면 사무엘상·하의 기자가 브닌나를 한나의 ‘적수(敵讐)’라 표현하여 썼겠습니까.

남편 엘가나는 자식을 낳지 못한 한나를 여전히 사랑했으나, 그것은 브닌나가 그녀를 괴롭히는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원한이 사무쳐 가슴에 맺힌 응어리는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도 커져만 가는 한나였습니다. 내게는 당신이 열 아들보다 낫다는 남편의 위로도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매년 식솔들을 데리고 실로에 갔습니다. 실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신앙의 중심지였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자식들을 줄줄이 거느리고 간 브닌나는 한나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한나에게 치우친 엘가나의 사랑도 브닌나의 고약한 심통에 부채질을 했던 것이고요.

제사를 마친 그들은 제물의 자기들 분깃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화목제의 제물에는 하나님께 속한 것과 제사장에게 속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제외한 것은 제사를 드린 사람의 것이었던 것이지요.

식사를 마친 한나는 성막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냥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응어리 맺힌 가슴을 안고 괴로움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 응어리는 흐느낌이 되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다가 기도가 깊어지자 소리는 없고 입술만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움직였습니다.

한나는 서원하며 빌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가련한 계집종을 굽어 살펴 주소서. 아들 하나만 주시옵소서. 그러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하겠나이다.’ 이런 기도를 애간장이 끊어지는 간절함으로 오래오래 소리도 없이 드렸습니다.

성막 문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제사장 엘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한나를 보고 술에 취한 줄로 알았습니다. 오랜 시간을 입술만 딸싹거리는 게 영락없이 술에 취한 것으로 보였거든요. 사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화목제 후의 같이 하는 식사에는 포도주가 곁들여져 과음하는 일도 없지 않았거든요.

‘언제까지 이렇게 술주정을 할 참이오, 정신을 좀 차리시오.’ 엘리 제사장의 이 같은 실언에 한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주님!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슴에 맺힌 게 많아 그것을 여호와께 아뢴 것입니다. 이 계집종을 그리 나쁜 여자로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너무도 서럽고 괴로워서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라고 얌전하게 대답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고 꾸짖는 실수를 했으나, 항변을 해도 될 억울한 일이였음에도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인으로서의 현숙함이 몸에 밴 그녀는 오히려 ‘주님’이라 부름으로 최대의 존경심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로 엘리 제사장은 자기의 실수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래, 알았소. 편안히 잘 가시오. 그대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뤄 주시기를 바라오’라고 기원성 덕담까지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의 엘리 제사장에게서 우리는 얻어야 할 교훈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남의 신앙을 판단하여 비난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특히 신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목사님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입니다. 그러고 또 하나 배울 점은, 그래도 엘리 제사장은 자기의 잘못을 바로 깨달아 그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권위의식으로 찌들은 오늘의 많은 지도자들과는 다른 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은 이런 유와는 다릅니다.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진정어린 따스한 덕담을 듣고 이에 감사의 말로 예의를 갖춘 뒤 물러나 자기네 처소로 돌아간 한나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더라.”

좀 전, 제사 후의 가족이 함께 했던 식사 때 브닌나의 고약한 심술 때문에 한나는 음식이 제대로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이루어 주셨다고 믿은 것이지요. 아직 수태한 것이 아니나 자기의 복중에 태아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확실하게 믿어버린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입으로 믿는다 한다 해서 믿는 것이 되는 게 아니지요. 마음속에서 실제로 믿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고 지켜 보호하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사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경우는 구한 것이 이미 받은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도하며 ‘믿습니다’를 연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도 ‘믿’의 발음에 힘을 주어 ‘믿—습니다’라 하는 사람이 많은데, 믿겨지지 않으니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데, 안 될 일이지요. 물론 큰소리로 하는 기도 자체를 나무라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혼자서 하는 경우에 한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의 기도가 방해를 받기 때문이지요. 이에 자기는 더 큰소리로 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목사님도 있는데, 그래서 그 교회는 주위로부터 민원이 끊이질 않지요.

가늘게 움직이는 입술의 소리 없는 한나의 기도를 듣고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평생을 기도로 살아온 제가 잘 아는 연로하신 장로님 한 분은 기도를 입술조차 딸싹이지 않고 무음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사지가 저려오기도 한다 합니다. 뒷골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심해짐과 동시에 팔에 마비증상이 오기도 했다 합니다.

건강에 이상증후가 나타났다면 그게 무슨 좋은 기도냐고요? 아니지요. 야곱은 좌골이 골절되어 불구가 됐고, 순교는 저주가 아니라 최대의 은총입니다. 장로님은 그런 기도가 한나가 그런 것처럼 믿어지는 기도가 되게 한다 했습니다.

한나는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끝까지 바꿀 수 없는 약속 서원을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지켰습니다. 믿음대로 수태하여 사내아이를 출산하자 그녀는 ‘여호와께 기도드려 얻은 아이’라 하여 이름을 사무엘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바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겠다는 서원을 그대로 지키는 데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고, 기쁨으로 감사하는 가운데 살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야곱 같고 한나 같이 사력을 다해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한나처럼 확신을 같게 하고, 그 확신은 이루어 주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됐듯, 일상의 삶이 한나의 그것처럼 산제사가 되게 합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삶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은 기도는 좋은 기도가 못됩니다. 기도의 성패는 그에 이어지는 삶의 변화가 말해 줍니다. 

임종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49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