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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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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8월 15일 (일) 12:48:32 [조회수 :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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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
갈 5장 13-15절
(광복기념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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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광복기념주일을 맞아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이자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념일들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기억하며 이념 간의 갈등이 없는 세상, 지배와 다스림으로부터 자유하길 바라는 그런 세상의 도래를 염원하는 날입니다. 마치 이사야서 말씀처럼 갖가지 동물이 어울리며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사11:9) 없는 세상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그런 날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저마다 실수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린 아이였고 어릴 적 숱한 실수를 반복하며 어른이 되어왔습니다. 어쩌면 실수는 인간이 기계나 로봇이 아님을 드러내는 증명서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 개인도 이러할진대, 여러 개인들이 모인 집단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복하지만 않아도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을 객관화하고, 입장을 바꿔보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둠의 욕망

오늘은 광복절이기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올해는 광복 7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일본의 압제를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픔을 경험한 분들의 이야기나 또는 교육을 통해 그날의 일들을 듣고 배웁니다. 하지만 신기하게 이 일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도 일본 압제에 대한 분노와 슬픔의 DNA가 새겨져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과의 운동 경기가 있다고 하면 선수들은 엄청난 투쟁심으로 경기에 임하고 또 응원하는 국민들도 열심을 다해 응원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끝난 올림픽만 보아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광복이란 말 그대로 ‘빛을 되찾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그 상태는 곧 ‘암흑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민족은 35년이라는 세월을 빛을 잃은 어둠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광복이란 말을 더 확장시켜보면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를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어둠의 욕망이다’라는 것 말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은 많은 부분 우리의 일상에 침투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나타날 수도 있고 또 부부나 연인 간에 또 직장 동료나 교우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욕망 없이 살 순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욕망이든 그 욕망이 자신의 영혼을 지배하고 다른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사건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일본의 식민통치가 끝이 났습니다. ‘태평양 전쟁(2차 세계대전의 일부)’에서 패배한 일본은 백기를 들고 통치의 권한을 내려놓습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강대국들의 통치도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심판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맞이한 이 광복의 역사는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진 수동적인 해방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광복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역사적 평가가 있습니다.

8.15 광복은 일본이 연합군이라는 큰 힘에 의해 백기를 든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의 영향뿐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 ‘자유를 향한 움직임(운동)’이 없었다면 일본의 패배가 과연 우리민족의 광복으로 귀결되었을지는 의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광복은 우리 민족이 가만히 앉아 연합국으로부터 주어지는 독립을 수동적으로 받은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렇게 내부에서의 자발적인 수고와 노력이 없었다면 되찾은 자유가 덜 기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의미에서 광복이란 연합국으로부터 주어진 ‘외부의 심판’과 내부에서 일어난 ‘광복을 향한 움직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유는 그렇게 바깥에서의 도움과 안으로부터의 수고가 만난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역사적인 사건의 맥락이 그리스도인의 신영 여정과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낍니다.

먼저 다가와 주신 하나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주셨습니다.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에게도 그랬고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먼저 다가와주셨고 욥에게도 그러했으며 바울에게도 빛으로 다가와주셨고 독생자 예수에게도 잔잔한 음성으로 다가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근심에 쌓여 있는 자에게 다가와 그의 편이 되어주었고 눈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한 이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우리는 늘 먼저 다가와 주신 하나님, 이미 다가와 계신 하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공교롭게 광복을 이야기하는 날 일본 소설가를 언급하게 됐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가의 신앙관을 참 좋아합니다. 영화 <사일런스>의 원작자이자 <깊은 강>으로도 유명한 일본 소설가 ‘엔도 슈사쿠’는 그의 책 <침묵>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소설 <침묵>은 17세기 일본에 전해진 선교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하나님의 침묵’을 다룹니다.

소설의 핵심 줄기는 간단합니다. '인간이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후미에’는 예수나 기독교 성인(聖人)이 그려진 나무, 금속으로 된 판을 가리키는데 이 ‘후미에’를 밟지 않을 경우 엄청난 고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후미에’는 곧 공포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믿음을 지키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는 배교를 합니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간’입니다. 이 혼돈의 시간에 선교사 ‘로드리고’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그는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후미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 침묵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얼굴은 지금도 이 어둠 속에서 바로 그 가까이에 있으며, 침묵을 지키고는 있지만 다정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 마치 그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도 곁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끝까지 나는 그대 곁에 있겠다.' (엔도 슈사쿠, <침묵>, 김윤성 옮김, 바오로딸, 2009, p.278)

어쩌면 무력해보일 수도 있는 이 하나님은 로드리고를 고통에서 해방시키진 못했지만 그가 겪는 고통에 공감하시며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를 위로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알건 알지 못하건 늘 우리 곁에 계셨고 늘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주셨습니다. 때론 침묵하시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우리가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인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한 노력

하지만 우리는 먼저 다가와 주신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라며 살 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 선재적(先在的)인 은총에 취해 그저 가만히 머물고만 있길 바라지 않으셨을 겁니다. 삶은 계속될 것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처음 믿은 그 감동에 박제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변덕을 부리기 일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받은 자(마16:19)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으며,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권한마저 부여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나약함은 베드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을 잊고 자주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그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은총을 망각하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훈련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계속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항구에 정착한 배처럼 그렇게 가만히 머물 순 없습니다.

제가 몇 해 전, 다녀온 산티아고 순례는 이런 맥락에서 시작된 여정이었습니다. 단독 목회를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신앙에 얼마나 거품이 많은지 알게 됐습니다. 함께 동역하던 멤버들이 사라지니,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목회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입니다. 그런 고민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힐 즈음,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제 믿음의 한계도 극복해보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지금 와 돌이켜보면 산티아고 순례가 뭐 그리 대단한 도전인가 싶지만 평소 저는 혼자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는 신중한 성격이었기에 스스로를 한계의 상황에 던져보고 싶었고 그 시도로 순례길을 가게 됐던 것입니다. 뭐 여담이지만 ‘그곳을 다녀오고 나서,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냐’고 묻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기대와 목표는 거창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한 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제게 산티아고 순례는 어딘가에 박제돼 계신 하나님이 아닌 피부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다음의 이 이야기를 하려고 좀 돌아왔는데요. 신앙이란 이처럼 두 개의 커다란 줄기가 함께 가야 곁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신 은총, 그 선재적 은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히 지내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과 동시에, 믿음을 지키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능동적인 수고와 애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감사’와 ‘훈련’이라는 신앙의 두 줄기가 균형을 잡을 때, 우리는 주님이 가신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

그럼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앙인’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요?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2)” 잘 믿는 신앙인은 진리로 인해 자유를 맛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진리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자유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자유에 관해,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서신이 그러하듯,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도 율법을 강조하는 거짓 교사들(거짓 신도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거짓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조금은 투쟁적이고, 격양된 어투를 담아 서신을 보냅니다.

그는 주님이 헐어버리려 했던 율법이 다시 세워지는 상황을 보며, 마음 아팠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을 일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여든 자들(갈2:4)’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예수 안에서 누리던 자유가 ‘덫을 놓는 자들’로 인해 다시 족쇄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 이 자유는 복음의 열매이자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

제한적인 자유

그런데 사실 생각보다 이 ‘자유’라는 개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자주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이 이 ‘자유’라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사전적 정의로는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유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함께 혹은 더불어’라는 말과 떨어질 수 없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사람에 맞춰 자신을 제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누리는 참 자유인의 모습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 22.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고전9:19-22)

그는 유대 사람을 얻기 위해 유대 사람같이 되었고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이 중요한 사람 앞에서는 스스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믿음 약한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생존을 위한 타협이 아닌 상대와 눈높이를 같게 하려는 철저한 자기부정을 거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유’란 이처럼 나 홀로 획득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자유’이며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란 육체의 욕망을 쫓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갈5:13-14)

바울은 우리가 받은 커다란 선물이 자유이지만 그 자유보다 더 상위 개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개념은 ‘사랑’,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 마디 말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일반적인 개념의 자유와는 다른 것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누려야 할 조금은 제한적이고 불편을 감수하는 자유인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펼쳐지는 자유

사회학자 이진경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바울이 말한 이 자유의 개념을 잘 풀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란 자기의 능력과 결부된 것이지만 그 능력은 자신을 포함한 ‘우리’라는 공동체와 떨어질 수 없는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길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자유란 (...) 유혹 앞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능력이고, 이런저런 제약과 구속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 '나만의 것'은 아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은 (...) 무엇보다 자신의 삶, 혹은 자신을 포함하는 '우리'라고 불리는 무리의 삶과 결부된 것이다. (...) 어떤 이의 삶도 멀거나 가까운 이웃, 생각지 못한 타자들, 뜻하지 않은 사건들과 무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기는 쉽지 않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꼭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로 인해 이웃한 타자들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그것을 위해 자신이 속한 세계를 '더럽힌다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후과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삶이 (...) 쉽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나 아닌 타자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알아야 한다는 역설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이진경, <삶을 위한 철학수업>, 문학동네, 2013, p.15-16)

결국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유란, 삶이라는 토대 위에서 펼쳐질 수밖에 없는데, 삶은 곧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유’는 이 관계망 안에서 해석되고 또 살아내져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인 것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던 바울의 자기 절제와 사랑으로 서로 섬기려했던 그의 철저한 자기 낮춤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자유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자유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테두리 안에서 ‘능동적인 선택’을 해나가는 자유인 것입니다.

광복을 통해 엿보는 자유

오늘은 광복 7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는 76년 전, 잃었던 빛을 되찾았습니다. 되찾게 된 빛은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하심이 승리한다는 증거였습니다. 물론 이 자유는 외부의 도움만 바랐던 그런 수동적인 자유는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만 바라지 않고 제몫을 다하려는 독립을 향한 작은 움직임들 덕에 광복이란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은총과 내부에서 수고하는 애씀이 만날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선재적인 은총과 주님의 편에 서고자 하는 능동적인 수고가 합쳐질 때, 우리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걷는 이가 누릴 이 ‘자유함’은 개인의 욕망 추구를 위한 자유가 아닌, 곁에 있는 이들을 소중히 대하는 주체적인 자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광복기념주일을 맞아, 우리의 일상이 되찾아야 할 ‘신앙의 빛’인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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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8-15 17:50:56
위선에 기댄 논리, 정신승리類에 기댄 논리는 정직하지 않다!
한국은 중요한 건국일은 빼 먹으면서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1945년 8월15일을 성대하게 지킨다. 잘 모르는 제3자들이 보면 마치 광복군이 自力으로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날로 오해하기 딱 좋다. 광복의 최고 수훈갑인 미국을 향한 감사의 표현은 일언반구도 없다. 첫째, 하나님의 은총과 둘째, 미국의 엄청난 피 흘림과 셋째, 아주 미약하나마 항일운동가의 노력으로 광복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게 정직하다.

중국 상해에 있었던 광복군 514명(1945년 3월 현재), 소련 극동에 있었던 최용건 일파 수십명, 미국 하와이에 있었던 이승만 일파 수십명 이외의 조선인은 납작 엎드려있었다. 8.15 일본천황 항복에도 불구하고 뭐가 뭔지 몰라 일본총독의 지시에 순응하다가 며칠 지난 후에야 뭘 좀 아는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 만세를 불렀다. 그 유명한 사진에 찍힌 만세 부른 숫자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만일 오매불망 광복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일본천황 항복 바로 그날 일본총독 관저를 점거하여 그를 축출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누가 일본총독을 그의 관저에서 쫓아냈는가? 조선민중이었는가? 총을 들이댄 美軍이었는가?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기까지 조선인은 변함없이 일본총독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했고 미군정이 들어선 걸 눈만 멀뚱멀뚱한 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과연 이게 광복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조선인의 태도인가? 대부분의 민중은 8.15 그날에 그 의미를 몰랐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그 의미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진정한 광복의 예를 들자면 1954년~1962년까지 벌어진 알제리독립운동이다. 프랑스를 상대로 피 흘리는 무력전쟁까지 불사하여 얻은 광복이었다. 알제리 민간인 사망자만 200만명(프랑스는 20만명이라고 주장)의 희생 위에 얻어진 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이다.

어느 날 갑자기 運좋게 얻은 날, 1945년 8월15일을 自力으로 쟁취한 광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도하게 기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반성보다는 자화자찬 식의 논리전개도 낯짝이 부끄럽다. 엄밀한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면 역사왜곡이다. 솔직해져야 한다. 행운의 날 성격의 1945년 8월15일을 미화하고 부풀리는 가식과 위선은 이쯤에서 멈추어야 한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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