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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수자, 어떻게 예수의 이웃인가
김혜령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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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7월 27일 (화) 10:51:30
최종편집 : 2021년 07월 27일 (화) 10:52:38 [조회수 : 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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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수자, 어떻게 예수의 이웃인가1)

 

김혜령 교수(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예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그래서 이웃사랑”이다. 이걸 부인하는 이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인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서로 다르게 정의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근거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이 기록된 성서이고, 특히 “사랑해야할 이웃이 누구입니까?”와 관련해서는 명백하게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의 명백한 이웃 기준이 있다. 그런데도 성수수자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그리스도인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르는 혐오를 사랑이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나는 예수가 만난 다양한 이웃들의 특징을 구분하며 성 소수자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사랑, 그래서 성 소수자 이웃도 사랑”라고 말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창기부터 고아나 과부로 상징되는 빈민구제에 탁월한 의지와 역량을 보여 왔다. 그러나 자성적으로 볼 때, 그 이면에는 교회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바라보는 전형적으로 편향된 시각이 감춰져 있다. ‘고아’나 ‘과부’는 자신의 의지로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부양자의 부재로 인해 안타깝게 가난해진 집단을 대표하는 이들로서 소위 가난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 ‘선량하거나 무고한 빈곤 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 말은 역으로 한국교회가 디아코니아 사역에서 조금만이라도 가난의 원인이 자기 자신의 내부, 즉 게으름이나 무지함과 같은 개인의 책임으로 지목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에 상대적으로 야박해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대사회에서 빈곤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정치적 구조의 불의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부분을 따지고 들면 곧 ‘사회정의’의 비판적 측면을 불편하게 논의해야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관점이 순수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집중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맞지 않는다고 피해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복음서에는 예수가 펼친 이웃사랑에서 고아와 과부가 직접 대상이 되는 경우는 아들을 잃은 과부를 가엽게 여겨 예수가 그 아들을 다시 살려준 경우(눅7:11-17)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찾기 힘들다. 예수가 고아나 과부를 돕는 일에 인색한, ‘마음이 완악한’ 사람이기에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에게, 또 그의 청중 유대인들에게 고아나 과부는 유대 율법이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히 돌보아야 한다고 지정했던 가장 기본적인 이웃이다. 그러니 고아나 과부를 돕지 않는 이가 있다면, 예수가 아니어도 이미 사람들이 알아서 손가락질하며 그 야박함에 질타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가 가르친 이웃사랑 명령의 혁명성은 바로 한 시대의 종교와 도덕, 사회법이 지정한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선량한 이웃’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고 미움받으며 공동체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환대하는 복음 사역에 있다. 한국교회에서 성 소수자가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를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여전히 기존의 도덕과 종교적 전통에서만 이웃의 자격을 따지는 좁은 시야, 누가복음 10장의 율법 교사와 똑같은 태도를 지닌 그 협소함이 성 소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꾸 밖으로 쫓아내고 있다.

예수가 사랑을 베푼 이웃 중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병자와 장애인으로 인해, 기독교는 의료와 장애인 복지에 큰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21세기 그리스도인으로서 병자와 장애인은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집단으로 봐야 한다. 예수의 시대는 오늘과 비교해 의학이나 과학적 사고, 나아가 현대적 의미의 인권의식이 전혀 없었던 시기이다. 이 말은 심각한 피부병자(나병)이나 혈우병자, 정신질환자, 나아가 소아마비 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 하지 장애인과 같이 외형적 모습이 소위 ‘정상’의 모습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병과 장애의 원인이 현대인들이 아는 바와 전혀 다르게 추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 과학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다른 인류와 다르지 않게 – 병과 장애의 원인을 신과의 관계에서 저지른 부정한 잘못이나 죄로 인한 운명적 형벌로서 이해하였다. 당연히 병자와 장애인은 치료나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신 앞에 신실하고 정결한 사람이라면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하는 사람, 즉 ‘죄인’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예수가 그러한 ‘죄인들’의 곁에서 말을 나누고 손을 잡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이 내린 형벌이라 취급받았던 병과 장애를 치유했다. 단순히 병과 장애에서 육체적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게 하여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그들을 괴롭혔던 사회적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예수는 병자나 장애인을 치유하시며 그의 죄나 부모의 죄가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으셨다.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병과 장애를 ‘신 앞에서의 죄’로 해석하는 관점은 무지와 편견의 결과물이다. 히브리 성서의 율법이 다양한 질병을 신 앞에서의 ‘부정’으로 규정했던 이유는 의료기술과 생명과학이 전혀 없었던 시절 공동체 구성원 다수를 미상의 질병이나 장애에서 지켜낼 방법이 ‘사회적 분리’, 요즘 말로 ‘사회적 거리 두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코로나 19의 예방과 치료방법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두고 각자 자기의 거처에서 분리되어있어야 했던 것처럼, 고대 유대 사회에서 미상의 질병이 발생하였을 때 할 수 있는 조치라고는 그가 다시 멀쩡해져 ‘정상’처럼 보일 때까지 공동체 밖으로 분리·추방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원 1세기 예수는 자신의 신유 능력을 통해 공동체의 무지로 인해 ‘죄인’이라 오인된 사람들을 치유하시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임을 제사장을 통해 확인케 하셨다(눅17:14). 이러한 관점에서 ‘병자’와 ‘이웃’은 유대 사회 내부의 구성원이지만 사람들의 비합리적이고 무지한 편견에 의해 ‘죄인’이라 낙인찍히며 사회에서 억울하게 차별받던 이들을 상징한다.

나는 한국교회에 성 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 말고, 그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은 주로 성 소수자에 대해 퀴어 사랑을 멈추는 것을 전제로 교회에서 이들을 ‘죄인’으로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관점 역시 ‘무지’로 인해 병자와 장애인을 ‘죄인’으로 잘못 판단했던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과 완전히 같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미 미국정신의학회가 1973년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제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하여 권위 있는 정신의학 전문가 단체들이 이 점을 여러 차례에 걸쳐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의료전문가를 자칭하는 기독교 계열의 반동성애 운동가들 몇몇이 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견들과 왜곡된 정보들을 정신의학에 조예가 깊지 못한 일반 교인들에게 진리인 양 유포하며 동성애 혐오감을 심각하게 조장하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에 기대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한 인류의 오래된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그래서 폭력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하지만 예수라면 그러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는 주류집단이 생산한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억압될 뿐만 아니라 차별과 배척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이 다시금 일상의 삶, 인간다운 삶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그의 능력을 집중하셨다. 예수는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정결법에 따라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이들에게 ‘하나님 앞에 깨끗한 자’라는 새로운 공적 인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 예수가 오늘날 다시 오신다면 21세기 사람들의 무지로 인한 新 정결법에 갇혀 삶이 파괴된 ‘성 소수자’와 함께 하실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낯선 새로운 이웃”인 성 소수자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만나야 할까? 나는 사마리아인을 만난 예수의 태도에서 그 대답을 찾는다. 예수가 만난 다양한 이웃들 대부분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다. 그러나 옛 북이스라엘 땅에 주로 거하는 사마리아인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들과 한 뿌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지만, 북이스라엘이 시리아에게 땅을 뺏긴 뒤(기원전 720년) 새로 이주해 온 이방인들과 혈통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혼합된 민족이 되었다. 그러니 바빌론에 끌려갔다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남유다 귀환 공동체의 관점에서 볼 때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과의 혼합을 금지한 율법을 어긴 ‘죄인들’이자, 그 어떠한 집단보다도 가장 강하게 미워해야 하는 이들로 여겨졌다. 유대 공동체 내부에서 침략자 로마인들보다 더 포용할 수 없거나 환대할 수 없는 완벽한 타자 집단이 된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율법이 사랑하며 돌보기를 명한 이웃이 누구냐고 물어온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하며 이웃의 개념을 유대 사회 밖으로 끌어낸 예수의 말씀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사랑해야 할 이웃이 절대 될 수 없는 사마리아인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사마리아인의 선한 사랑에 오히려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 전복적인 스토리 라인을 예수가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열린 입장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수가성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실제 대화(요 4:1-26)이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적한 시간에 물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목마름을 핑계로 말을 건넸다. 서로 상종하지 않는 두 민족 간의 오래된 역사적 갈등 차원에서 볼 때, 이 대화가 얼마나 예외적인 것인지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여인이 선지자처럼 보이는 예수에게 용기를 내어 사마리아인의 그리심과 유대인의 예루살렘 중 어느 곳이 예배를 드릴 곳인지를 물었고, 예수는 이 질문에 – 그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 예루살렘 성전의 우월적 지위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배의 핵심은 지역이나 혈통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마리아인에게까지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낸 예수의 사역은 그의 사랑의 범위가 가장 크고 가장 단단한 ‘우리’, 즉 ‘민족’의 경계선을 해체하여 가장 낯선 타자의 존재성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소수자, 나아가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드러내는 강한 저항은 결국 ‘우리’라는 말이 평균적으로 지시하는 ‘정상’의 정체성을 교란하는 ‘경계 밖의 낯선 타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적대감은 그들의 갑작스러운 도래(혹은 부각)가 ‘우리’라고 여겨졌던 집단의 안정적인 질서와 가치를 깨고 집단의 위기를 초래하는 ‘위험요소’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데리다의 지적처럼 위험이 하나도 없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환대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고통이 하나도 없는, 절대적으로 편안한 사랑도 없다. 오히려 이 위험한 환대가, 고통스러운 사랑이 ‘우리’가 지금까지 안전하고 평화롭게 여겼던 질서야말로 실제로는 ‘우리’라는 경계선 안팎에 존재하는 소수자와 약자의 생존 위험과 삶의 고통을 담보로 잡아 지켜져 온 불의한 질서임을 폭로한다. 이제 성 소수자에 대한 교회의 오래된 혐오와 폭력을 멈추고, 정말로 환대할 때가 되었다. 성서 해석의 문자주의가 주는 위험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목회자와 신학자라면, 이제 정말로 함께 목소리를 내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동환 목사 혼자 40도 아스팔트 위에 혼자 남겨두기에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정녕 부끄럽지 않은가?

 

 

1) 이 글은 2021년 6월 28일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연속포럼에서 필자가 발표한 “혐오 도덕, 예수의 이웃사랑 명령으로 해체”하기의 일부를 기사 지면에 맞게 요약 및 수정한 것임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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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7-27 17:11:30
버스 지나가고 나서 손 흔들기
고아, 과부 등 예수님이 각별히 여긴 사람들은 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小數者이다. 즉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조차 없는 인생이다. 예수님은 “나, 고아요!”, “나, 과부요!”라고 외칠 수조차 없는 힘없는 외로운 자들을 품으셨다.

예수님이 품은 소수자는 단순히 머리 숫자상의 소수자가 아니다. 양아치, KKK단원, 살인자도 소수자인데 단지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품는다고 한다면...

동성애자는 소수자이기는 하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이면서 동시에 소수자인 고아나 과부와는 다른 소수자이다. 동성애자는 언론, 국회, 정권, 사회단체 등을 움직일 수 있는 소수자이다. 社會的 弱者인 고아나 과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소수자이다. 머리 숫자만 소수자일 뿐 고아나 과부와는 달리 社會的 强者이다.

한국에서의 성소수자는 국회의원을 주물럭거려 입법청원도 가능하고, 각종 언론에다 자기주장을 펼칠 수도 있고, 그 무신 축제도 마음대로 열 수 있고, 성소수자 그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도 무척 많다. 교회법을 어겨도 억울하다고 피해자 코스프레하면서 버틸 수도 있고... 성소수자 문제제기는 그 순수성을 한참 벗어나버렸다. 첨예한 정치문제로 비화되어버렸다. 성소수자 문제가 좌파집권층에 기댄 좌파의 우파 공략의 무기로 변질된 바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우파의 마사다 전투式의 처절한 반격을 불러오게 되었다.

누가 성소수자 문제를 정치문제로 비화시켰는가? 이제 성소수자 문제는 논리싸움이 아니라 세력싸움의 영역에 들어왔다. 따라서 김혜령 칼럼니스트 식의 약자 코스프레 읍소작전은 상대편으로부터 경멸을 부를 뿐이다. 버스 지나가고 나서 손 흔드는 격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치문제로 비화되기 전에 김혜령 칼럼니스트 식으로 반대파의 심금을 울렸다면 모를까... 이런 신파조의 읍소작전은... 이미 유효기간이 만료된 불량식품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지금 <현재의 소수자> 행태를 보았다면 학~~을 떼고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고아나 과부가 그 당시 대제사장과 한통속이 되어 “나는 소수자!”입네 하며 정치행위를 하는 데 예수님이 소수자에게 오냐~ 오냐~ 했을까? 예수님은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소수자(과부, 고아)를 돌본 것이지 단지 소수자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나 소나 다 돌 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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