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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드림포럼6. 평화통일을 위한 자서전적 해석학: 인간학적 평화에서 신학적 평화로
유경동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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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7월 26일 (월) 21:54:47
최종편집 : 2021년 08월 05일 (목) 01:00:18 [조회수 :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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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드림포럼 연재

1 "화해와 평화의 좁은 길"
"예수와 사마리아인들과의 평화"
3. 한반도통일의 현실과 한국교회의 과제: 하나의 평화경제적 구상
4. 이숙진(준비중)
5 "48년 체제와 한국전쟁, 그날 이후 남겨진 ‘빗금 그어진 주체($)’들의 평화를 위한 윤리학

 

 

평화드림포럼6.

평화통일을 위한 자서전적 해석학: 인간학적 평화에서 신학적 평화로

 

유경동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1. 들어가는 말: 표상의 세계 내 전쟁-내 안의 적


“남조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네까?” 6.25 전쟁 당시 군사적 요충지였던 평강과 김화와 함께 철의 삼각지대 중 하나인 철원은 필자가 태어난 곳이다. 새벽 일상은 새벽 4시에 시작되는 이와 같은 대남방송 멘트와 함께 시작되었다. 어린 나이에 그 방송의 내용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너무 큰 확성기 소리는 새벽잠을 설치게 된 아이의 꿈속에선 곧 전쟁이 시작되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 탱크와 비행기가 동원되어 밀고 밀리는 교전을 치르지만, 대부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쫓기다가 부스스 잠에서 깨게 된다. 

의식의 세계에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로 향하면, 또 새로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학교 건물 전면을 엄청나게 큰 새빨간 글자로 도배한 이 아홉 글자는 이제 어린이의 의식을 지배하며 반공의 전선에 뛰어들게 한다. 수상한 사람을 보면 신고해야 해서 선글라스를 쓰고 마을을 방문한 도회지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했다(연필 두 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여름에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나면, 학교 운동장은 말 그대로 “탄피 반 흙 반”이었다. 폭발물을 보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만, 개천에서 멱감다가 불발폭탄을 발견한 이 어린이는 “경동이가 포탄을 주었어요!”라고 외치는 동료들의 함성과 함께 학교 교무실로 포탄을 들고 뛰어 들어갔다. 절대 교육개혁을 주장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 그저 선생님께 칭찬을 듣기 위한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교무실로 뛰어든 순간,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오기도 하였다.

전쟁은 어린아이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며 이제 자연스럽게 일상에서는 적과 아군을 나누는 전쟁놀이로 이어진다. 장난감 소총으로 무장한 이 어린이는 수없이 입으로 따발총을 쏘아대면서 하루에도 수 백구의 시체(?)를 넘고 넘어 고지를 탈환한다. 그러나 숨어있다가 먼저 보면 “땅”하고 입 총을 쏘아서 적을 제거하는 전쟁놀이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논에서 지뢰를 밟아 한쪽 발이 절단된 삼촌, 그리고 이 때문에 혼절한 할머님을 보면서 어린이에게 전쟁은 놀이가 아니라 끔찍한 정신적 트라우마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자서전적 회고로부터 출발한다. 전쟁이라는 외부적 현실을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위와 같은 성장기의 전쟁에 대한 간접 경험은 내면화의 과정에서 필자의 정신적 표상에 ‘반공주체’와 ‘공산객체’를 심어놓고 함께 늙어갔다. 이 표상은 전쟁의 공포와 탈출, 적군과 아군, 빨갱이와 친구,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이원론적 구조를 형성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한편, 전쟁이라는 표상은 의식 속에서는 치열하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항 담론을 향하여 몰두하게 하였기에 학위 논문으로 “남북통일”에 대한 주제를 다루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필자는 큰 틀에서 ‘인간학적 평화’와 ‘평화적 인간학’으로 구분하여 논지를 전개한다. 인간학적 평화는 6.25 전쟁을 극복하고 평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딜레마의 문제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반면 평화적 인간학은 기독교 신학에 근거하여 귀납법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상정하고 삼위일체론적인 평화윤리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변증법의 이론적 장점을 통하여 ‘불가능의 가능성’으로서의 평화론을 강조하도록 하겠다. 아울러 현실주의 이론을 보완할 수 있는 비폭력 무저항주의 이론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남북 평화의 주제와 연관하여 세 가지 점을 강조하면서 논지를 전개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각각 (1) 표상의 문제와 마주한 ‘삼중적 딜레마’, (2) 기독교 현실주의와 비폭력 무저항주의, (3) 공공신학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삼중적 딜레마’와 연관하여서는 정신적 표상에 형성된 반공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점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현실주의’의 문제는 정신적 표상에서 내면화된 전쟁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항적 담론으로서 기독교 평화주의 이론의 한 계보인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 현실주의의 핵심내용과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해석에 대하여서도 그 핵심 내용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공공신학’의 담론은 한반도 평화 정착에 관한 신학과 교회의 책임에 관한 제언으로 구성된다. 

 

   
 

2. 인간학적 평화: 삼중적 딜레마


필자가 미국 조지아(Georgia)주의 아틀란타(Atlanta)에 있는 에모리(Emory) 대학에서 수학할 때, 카터 센터(Carter Center)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난생처음 소위 ‘북한 사람’을 보았다. 나름 신학이라는 지적 작업을 통하여 평화의 주제를 탐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북한사람을 먼발치서 만난 필자의 첫 경험은 뜻밖에도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서로 총을 겨누고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닌데, 필자의 정신 표상 세계에서 함께 자란 반공주체는 그 원수(?)를 만난 순간, 전쟁을 준비하라고 나를 보채는 것이었다. 심리적 불안함과 거부감, 그리고 내내 이어지는 불신의 감정은 그 어색한 만남의 자리를 이내 피하게 하였다. 

6.25 전쟁은 필자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일종의 정신적 표상의 원천이다. 이 표상의 세계에 자리 잡은 반공주체는 필자의 자아에 구성된 또 다른 타자이며, 이 타자의 적은 공산주의와 연관된 공산객체이다. 지금이야 대학교 수업 시간에 종종 보는 탈북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필자의 표상에 오래 자리잡고 있는 반공주체의 자기주장이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다른 쪽에 위치한 공산객체를 늘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필자의 이러한 기억은 정작 평화 담론을 펼치기도 전에 여러 딜레마에 봉착한다. 필자는 이를 ‘삼중적 딜레마’라고 명명하며, 그 표상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딜레마는 ‘혼성적 정체성’의 문제이다. 소년기에 겪은 6.25 전쟁의 정신적 상흔과 연관된 간접 경험이 만들어 낸 반공주체의 문제는 남과 북, 전쟁과 평화라는 양가적인 인식 사이에서 혼성적 정체성을 유발한다고 본다. 이 주체는 내면화의 과정을 통하여 외부 대상인 6.25 전쟁과 연관되어 구축된 일종의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반공교육과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강화되었고, 필자의 정신세계를 주도하는 강력한 내면적 타자이기도 하다. 이 반공주체는 내면의 세계에서 공산객체를 적으로 간주하고, 실제 전쟁과 상관없이 현실세계에서도 이분법적 정체성을 유지한다. 공산주의 독재 대 자유 민주주의,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우열을 따지면서 반공주체는 적인 공산객체를 철저히 주변화하였다. 이 반공주체는 6.25 전쟁이후 7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에 직면하여 전쟁의 표상과 연관하여 자아와 타자, 그리고 주체와 객체의 인식은 서로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한다. 6.25에 대한 간접경험과 표상 내 주객의 분열은 결국 현실세계에서도 공산객체를 배제하고 주변화하면서 혼성적 정체성의 문제를 유발하는 것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힘(power)’에 대한 ‘동일화’의 문제이다. 타자화된 내면의 반공주체를 의식 속에서 이념적으로 정화하지 못하면서 반공주체를 무의식/의식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일화의 딜레마에 마주하게 된다. 반공주체는 힘의 논리에서 항상 공산객체를 제거하여야 하므로, 의지하는 수단은 우선 물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우선순위는 무력이다.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함선과 잠수함은 표상에 구축된 힘의 상징이다. 그 중에 핵무기는 당연히 탑재되어야 할 무기이며, 스텔스 기능을 장착하고 원하는 곳에 언제든지 요격해서 전멸해야 한다. 이 때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 관한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강대국이 도와주면 금상첨화이다. 따라서 표상의 세계 내 반공주체는 힘(power)을 우위로 공산객체를 항상 제거의 대상으로 특정하고 모든 물리력을 자신의 힘과 동일시하며, 그 힘의 매개물을 현실에서도 부단히 우선시하게 된다.

세 번째 딜레마는 ‘기억’의 문제이다. 앞에서 제시한 혼성적 정체성과 동일화, 그리고 힘의 딜레마는 표상에 저장된 기억에 의하여 야기된 것이다. 문제는 과거 기억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이를 교정하기 위하여서는 교육을 통한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6.25 전쟁과 휴전에 대한 선 이해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종전과 평화협정의 노정은 권력에 의한 정치적 아젠다(정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왜곡된 기억을 바로잡고 평화로 나아가기 위한 ‘집합적 기억’의 형성을 통하여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를 위한 행복한 경험, 그리고 남북 교류, 연대와 화합을 통한 새 기억의 생산은 6.25의 상흔을 치유하고, 보다 구체적인 평화를 구축하는 데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필자와 같은 전쟁 이후 1.5세대는 1세대의 기억에 의존하여 6.25를 표상 내 재구성한다. 6.25에 대한 1세대의 기억도 점차 사라지며, 1.5세대는 전쟁 경험이 없이 전쟁 후 남북 이데올로기에 의존하여 평화론을 펼치기 마련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2세대에게 평화는 기억도 경험도 전무하다는 것이다. 남북평화가 왜 필요한지 2세대에게는 그저 국사(國史)와 관계된 실용주의적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6.25를 회상하고 잊혀진 기억을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부단한 노력이 없이 기억에 의존하는 평화론은 극복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전쟁과 연관된 자서전적 회상을 통하여 정신세계 안에서 작동하는 전쟁 표상에 대하여 살펴보고, 반공주체와 공산객체, 혼성적 정체성, 무력을 절대시하는 동일화의 가능성, 그리고 오류 기억의 재구성 가능성에 대하여 분석하여 보았다. 필자는 이와 같은 방법을 ‘인간학적 평화’라고 전제한다. 이는 필자의 표상세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여, 기억의 회로 안에 갇혀있는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하는 것이다. 

전쟁의 간접경험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의식 세계 내 반공주체의 강화는 프로이드(Freud)적 오디프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현실에서 전쟁의 공포는 의식의 표상 세계 내 이를 극복할 강력한 반공주체를 설정하며 공산객체를 제거하기 위하여 전능한 힘의 매개를 요구한다. 그 힘은 다시 현실 세계 내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하여 강화되며, 자신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력을 전제로 한 군사력과 같은 물리력의 증강은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이는 일면 헤겔(Hegel)적인 변증법의 고리와 같다. 유한한 인간의 조건(Thesis)을 극복하기 위하여 반공주체(Anthesis)를 필요로 하며, 공산주체를 제거하기 위한 합리화의 종합(Synthesis)은 강력한 무력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이러한 합리화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mobius strip)’와 같아서 이러한 사고에 갇혀버리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6.25의 회상과 재구성의 과정에는 따라서 일종의 ‘뒤집기’가 필요하다. 주·객이 분열되고 타자가 부정되는 표상 세계의 정화(purification)가 없이는 평화는 기껏해야 전쟁과 연관된 병리적 현상을 탐구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필자는 ‘인간학적 평화’의 방법론을 뒤집어서 연역법적 관점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론에 주목하는 것이 올바른 평화론에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점에서 ‘평화적 인간학’의 가능성으로 ‘기독교 변증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3. 기독교 변증법: 평화적 인간학


칼 바르트(Karl Barth)와 본회퍼(Bonhoeffer),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와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근대 계몽주의가 기획한 낙관적 인간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기독교 변증법(Christian Dialectic)’을 소개하였다. 헤겔식의 변증법은 역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 이성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정(thesis)’-‘반(anthesis)’-‘합(synthesis)’의 과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이성이 진리와 합일하는 절대정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기독교 변증법은 이 정-반-합의 과정 중에 드러나는 소위 인간 정신의 실현 정점에 독일 군국주의(나치주의)와 인종주의(게르만주의), 그리고 헤겔식 관념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인간 정신의 실현(?) 결과는 세계를 피바다로 물들이고 유대인 대학살과 인종청소로 이어진다.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이성의 종국을 본 것이며, 이성의 실현이 아니라 패배를 경험한 것이다.

기독교 변증법은 정-반-합의 체계를 통하여 인간 이성이 절대정신에 다다를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처음서부터 유한한 ‘정(thesis)’을 극복하기 위한 ‘반(anthesis)’도 유한한 것이기에 그 ‘합(synthesis)’도 그저 유한한 것이다. 이를 착각하면 정(thesis)의 반(anthesis)을 통한 합(synthesisi)으로의 실현은 스스로 절대정신에 다다라서 신(God)의 자리에 서게 된다. 문제는 그 신의 자리에 선 인간 정신은 자신과 동일화하는 집단의 가치와 이념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이를 폭력으로 다스리게 된다. 이는 마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마24:15)”과 같은 것이 아닐까? 유한한 인간은 유한할 뿐 신의 자리에 설 수 없다. 

본회퍼(Bonhoeffer)는 인간 이성의 유한성을 인식할 가능성은 무한으로 질주하는 인간 로고스(logos)가 오로지 신적 로고스(Logos)에 의하여 멈추게 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 로고스가 앞에 선 신적 로고스를 만나는 바로 그 자리에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이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하나님 앞에서 인간 로고스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 로고스는 신적 로고스를 십자가에서 죽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만민의 심판주가 되셨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의 심판과 부활 외엔 없는 것이며, 그의 뜻을 따르는 길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 길이다. 그 길은 세상을 사랑하신 그의 뜻에 따라 우리도 세상을 사랑하는 것,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를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표상 내 반공주체의 제거 대상은 공산주체이며,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서는 무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우, 죄 값을 물어야 할 인간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며, 십자가의 고난은 자발적 희생이 된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자기 비움은 인간 세계를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요3:17), 구원하시기 위함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많은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마20:28) 오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요14:27)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의 몫이다.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구한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은 이 평화를 위하여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요14:16) 우리를 지도하신다. 

기독교 변증법은 평화의 출발점을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평화로 시작하는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평화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비록 그 평화와 사랑이 인간에게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관점에서는 ‘불가능의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지만,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누어질 때, 평화는 지속되는 것이다.

필자는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신적 사랑의 가능성을 추구한 기독교 변증법은 어거스틴(Augustine)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그리고 루터(Martin Luther)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잘 대변한다고 본다. 언뜻 기독교 현실주의는 퀘이커(Quaker)나 메노나이트(Mennonite), 그리고 하워드 요더(Howard Yoder)등이 주장하는 성서적 실재론에 근거한 비폭력 무저항주의와 다른 관점으로 비치지만, 필자의 해석으로는 각 입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본다. 기독교 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 전쟁론(Just War)은 근본적으로 비폭력을 전제한 이론이며, 현실주의 입장이 국가 간 폭력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개인(국민)이 없는 국가가 가능하지 않으며, 국가가 없는 개인(국민)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정당 전쟁론이나 비폭력 평화주의는 상호보완되어야 할 이론으로 필자는 평가하며, 다음에서 차례로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겠다.

   
 

4. 기독교 현실주의와 비폭력 무저항주의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전쟁의 가능성은 오로지 평화가 외부 세력에 의하여 깨어질 때,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하는 군사 대 군사 간의 대결이어야 하며, 정의를 수호하는 지도자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마틴 루터도 전쟁은 세속적인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승자나 패자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부득이 치러질 수밖에 없는 정당전쟁은 포로의 처우와 전쟁 후 복구에도 관심을 가진다. 정당 전쟁론은 전쟁을 허용하여 기독교 정신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주장하는 이면의 허구에 대하여 고발하는 장점이 있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허울뿐인 평화의 속성을 간파하였다.

[실라(Syllar)와 마리우스(Marius)의 전쟁에서] 어떤 이는 무장하지 않은 사형집행인들에 의하여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하였다. 살아있는 사람을 맹수보다 더 야만스럽게 취급하는 사람들이 버려진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것이 익숙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어떤 이의 눈을 빼고 사지를 갈래갈래 잘라내어 바로 죽여버리지 않고 살려두어 [고통을 당하도록 더 내버려 두었다]... 이런 일들이 전쟁이 끝난 다음 평화의 시기에도 일어났다. 좀 더 신속하게 승리를 쟁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가볍게 생각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평화와 전쟁이 누가 더 잔인한지 겨루었는데 평화가 전쟁을 눌러 버렸다. 왜냐하면 전쟁은 무장한 군인들을 격퇴하였지만, 평화는 무장하지 않은 이들을 살해하였다. 전쟁은 쳐들어온 이를 풀어주었고 반격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평화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살려주지 않고 오히려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죽음으로 내몰았다.

어거스틴이 분석하였듯이, 세상의 평화는 거짓 가면을 쓰고 무자비한 살상과 보복을 감행한다. 평화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을 속이는 기만술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평화의 허구적 속성을 간파하는 어거스틴적 기독교 현실주의는 전쟁이나 평화 모두 인간과 집단의 죄성에 의하여 펼쳐지는 이념에 불과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인간의 죄성을 직시하고, 그러한 인간의 집합적 욕망에 의하여 자행되는 권력의 폭력적 성향에 대하여 분석하며, 평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고발한다. 

물론 이러한 현실주의의 한계는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무력의 허용에 대한 기준이 분명치 않으며, 비도덕적 인간과 더 비도덕적인 집단에 의하여 자행되는 비인간적 행위의 귀결로 이어지는 수많은 전쟁의 참상에 대하여 그 해결 방안이 분명치 않다. 더군다나 현대의 전쟁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평화전이 아니라, 자국의 평화를 해칠 가능성이 있으면 먼저 선제타격하는 ‘선제공격형 전쟁(pre-emptive war)’이 대세이다. 국가 권력의 유지와 유한한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선제공격의 전술이 사용될 수 있어서 전통적인 기독교 정당전쟁론의 관점도 그 입지가 매우 약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불가피한 전쟁의 경우, 가장 인도적이고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기본 개념으로는 여전히 기독교 현실주의가 의미 있다고 본다.

한편 비폭력 평화주의는 그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용인되지 않는 성서적 실재주의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산상수훈(마 5:38-48)을 통하여 적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비폭력은 기독교 정신을 강조한다.

신약성서학자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는 온전한 크리스천이라면 위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고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헤이스는 상대적 근사치의 정의론에 근거한 정당전쟁론은 반기독교적인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헤이스에 따르면, 비폭력 평화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비폭력은 임박한 종말론적 상황을 전제한 이론이며, 자기 방어는 금지하지만 무죄한 제3자를 방어하는 것은 용인하는 것이며, 일종의 완전주의 윤리로서 인간에겐 불가능하고,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개인적인 원수들에 국한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헤이스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의 길 대신에 고난 받는 순종을 길”을 택하셨고 “마태가 산상수훈의 제자도를 불가능한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헤이스는 산상수훈의 비폭력 평화주의는 종말론적 비전이 아니라 실천과 순종을 통한 제자도의 길이며, 교회는 모든 민족으로 나아가 이 사명을 감당하여야 하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지상명령임을 강조한다. 

기독교 공동체의 무저항은 “적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로 회심할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는 것”이며 “복음서 기자들은 이스라엘이 적을 정복하는 대신 고난의 소명을 감당함으로써 이전까지의 모든 기대를 뒤집어 놓은 메시아로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본다.”고 헤이스는 주장한다. 헤이스는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일관성 있게 폭력에 대항하는 증거[를 통하여] 고난을 다른 이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공동체로의 부르심을 발견한다.”고 부연하면서, 신약성경의 비폭력의 산상수훈은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에서 근본적인 요인”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헤이스는 비폭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초점 이미지는 ‘십자가’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비폭력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제자도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 대가는 핍박, 조롱, 그리고 비효율성과 부적합성의 부담”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전제한다. 그러나 폭력에 의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폭력의 힘을 누르고 승리했으며,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을 미리 드러내[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어둠의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됨을 명심하여야 한다고 헤이스는 재차 강조한다.

필자는 위와 같은 성서의 비폭력 정신이 성경의 진리이며, 삼위일체의 윤리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약자의 비겁함이 아니라 세상의 폭력을 사랑으로 이기신 십자가 윤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정당 전쟁론의 현실주의 윤리처럼, 비폭력 무저항주의 윤리도 일종의 ‘중간윤리(interim ethics)’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비폭력 무저항의 윤리는 폭력을 수용함으로 폭력을 중지하여 더 이상 폭력이 재생되지 않도록 하는 고귀한 정신에 근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역사가 한결같이 증언하듯이 폭력은 그 대상을 제거함으로 일시적으로 중지되는 것 같지만, 또 다른 대상이 나타나면 폭력은 또 시작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폭력 무저항의 정신이 실현되기 위하여서는 폭력의 원인이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먼저 파악하고 그 인간과 집단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제도와 체제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현실주의는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집단이 되기 위하여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주장하는 것이며 비폭력 평화주의는 그 힘보다 먼저 평화주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기에 이 양자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필자는 이해한다.

지금까지 필자는 6.25 전후 1.5세대로서 표상 내 작동하는 반공주체와 혼성적 정체성, 그리고 힘의 동일화의 문제를 살펴보고 인간학적 평화에서 평화적 인간학이란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적 평화론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이어서 기독교 역사 속에서 형성된 현실주의 윤리와 비폭력 무저항주의 관점이 서로 보충되어야 할 이론임을 강조하였다. 이제 다음에서 남북 평화의 사안을 놓고 기독교 공공신학의 사명에 대하여 간략하게 제언하고자 한다.

 

5. 평화와 공공신학: 남북의 평화를 위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필자는 지금까지 남북의 평화 방안에 대한 정치적 거대 담론보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미시적 주제들을 통하여 나름 제3의 길을 모색하였다. 필자의 선행연구로는 국제 사회에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국제평화와 군사평화, 인권평화와 종교평화, 시민평화와 정의평화 등의 요소가 충분히 분석되고 그 내용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국제사회에서 군비를 축소하고 민간 분야의 활발한 교류가 요구되고 국가 간 인권의 증진과 상호 호혜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종교평화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평화에 집중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의 영역을 개인주의적인 차원을 넘어 국가와 민족으로 향하여야 하며 이는 복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위와 같은 기본적 평화안을 염두에 두고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제언하도록 하겠다.

첫째, ‘6.25 기억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방안이 중요하다고 본다. 전후 1.5세대인 필자의 경우처럼 전쟁에 대한 직접 경험이 없이 부모의 회상이나 간접경험을 통하여 전쟁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전쟁의 고통은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경험이 없이 전쟁에 관한 주제를 논하는 것은 단지 이론적 서술에 그치고 말 것이다. 전쟁은 현실이지 단지 관념이 아니기에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위하여 헌신하는 길은 먼저 올바른 역사 인식과 전쟁의 회상을 통한 ‘집단기억의 강화’가 우선 그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전쟁이 얼마나 잔인하며 끔직한 것인지를 이해하고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평화를 위한 일꾼이 되기 위하여 살아있는 교육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특히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둘째, 인간학적 평화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강조하는 삼위일체론적 계시 신학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평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이는 계시의 실재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폭력을 관통하고 부활로 현실화되었다. 하나님의 비움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그리고 성령의 진리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인간이 살아갈 모형(Example)을 발견게 한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은 동질적 또는 동일한 신적 실체(Substanz)나 주체(Subjekt)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영원한 교통과 사귐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에게 도덕적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실재로 우리 안에서 소통된다. 평화를 이루신 주님이 우리 앞에 서 계신다고 할 때 우리에게는 그 분을 따르든지 아니면 도망가든지 둘 중의 하나 밖에는 길이 없다. 제자도의 길에 선 우리는 오로지 평화를 사랑으로 이루시고 걸어가신 주님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 그리고 그 분과 사귐을 지속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기독교 현실주의와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상호 보완하는 방안으로 ‘정의로운 권력’을 위한 기독교의 공적 사명이 요구된다. 어거스틴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이 “최후의 심판으로 분리될 날”을 전제한다. 따라서 세상의 국가 권력의 올바른 역할에 대한 지적이 다소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법의 전통에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국가 권력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의하여 구속되는 임시적인 것이지만 자칫 현실의 체제를 하나님이 인가하신 제도로 그대로 수용하는 가능성이 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회와 국가의 이상적인 협조를 구하면서 교회는 사랑으로 그리고 국가는 정의를 실현하는 두 영역의 조화를 꿈꾸었다. 다만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가 강조한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사이의 수평을 치닫는 팽팽한 역설적인 긴장 관계에서 루터는 교회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후 라인홀드의 니버의 경우 기독교현실주의는 인간의 죄와 이성의 한계, 그리고 집단 체제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면서 ‘근사치 정의’로서의 세력 균형이론과 불가능의 가능성으로서의 사랑의 이론을 정치에 접목시키려 노력하였다. 

필자는 폭력의 궁극적 대안은 평화이지만 이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기독교의 공적 과제는 평화를 신장하는 ‘정의로운 권력’, 즉 ‘평화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현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교회는 노력하여야 한다고 본다. 성경의 말씀을 계시의 실재로 받아들이고 사회의 변화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 본다. 인간학적 평화에서 평화의 인간학을 향하여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제자도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 민족과 이 세계를 나의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전 세계의 수고와 고통을 당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나이다.”

 

*원문의 각주는 위 글에서 생략했습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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