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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줄로 생각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스가랴7장 1절~7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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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7월 26일 (월) 19:24:06 [조회수 :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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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줄로 생각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스가랴7장 1절~7절

 

 

1. 다리오 왕 사년

 

① (1절) “다리오 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 스가랴가 8가지의 묵시를 보았던 때는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슥1:7)’이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다리오 왕 사년’에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다시 예언하게 하신다. 스가랴가 또 다시 예언을 재계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리오 왕 사년’이 역사적으로 어떤 때인지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스가랴가 전하는 예언의 목적과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모든 예언은 역사 속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스가랴서의 시대적인 상황은 동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에스라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② ‘고레스 왕 원년’에서 ‘다리오 왕 이년’까지의 역사

▶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스 1:1~3)”,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 (스 3:8)”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고 기공식을 했다. 하지만 귀환한 유대인들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거짓상소 등으로 인해 성전건축은 무기한 중단된다.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치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를 내리기를 기다리라 (스 3:21)”,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 (스 4:24)”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왕 이년 6월부터 11월까지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니 (스 5:1)”

 

③ ‘다리오 왕 이년’에서 ‘다리오 왕 육년까지’의 역사

▶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으로 성전재건을 시작한 ‘다리오 왕 이년’에 바사제국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열 왕이나 백성이 이 조서를 변개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헐찐대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저희를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찌어다 하였더라 (스 6:11~12)”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조서를 발견하고 중단된 성전 건축을 재계할 것을 명하는 조서를 내린다. “유다 사람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다리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스 6:14)” B.C 516년 ‘다리오 왕 육년’에 마침내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B.C 586년으로부터 70년 되는 해다. 오늘 본문의 ‘다리오 왕 4년’은 성전건축을 재개한지 2년이 되던 해였고, 성전이 완공되기 2년 전의 시점이다.

 

 

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① (2절) “때에 벧엘 사람이 사례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 ‘다리오 왕 사년’은 한마디로 성전 재건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때다. 성전 재건이 형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에스라 6장에 기록대로 바사의 다리오 왕이 서적 곳간에서 고레스 왕 원년에 성전 재건을 명령했던 조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다. 스가랴가 묵시로 예언했던 말씀의 성취다. “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슥 6:8)” 다리오 왕이 솔로몬 성전의 금, 은기명을 돌려보내고 필요한 자재와 경비를 보내 지체치 않게 하고, 수용물을 소청대로 영락없이 날마다 주어 하나님께 제사하게 했다. 이는 학개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친히 행하신 일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6~7)” 따라서 오늘 본문은 성전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언약의 성취가 완수되는 가운데 스가랴를 통해 전하신 경고의 말씀이다.

 

② (3절)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 ‘오월 간’은 바벨론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된 날을 가리킨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십 구년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왕하 25:8~9)”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강제로 국권을 빼앗긴 날, 한일합방조약을 맺은 경술국치일과 같다. 한마디로 국치일을 기억하며 울며 금식하던 예식을 계속 해야 되는지에 관한 질의다. 사실 질문이 아니라 이제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었으니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백신 접종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으니 이제 마스크 벗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섣부른 주장과 같다. 코로나 팬데믹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방심하면 대유행은 어김없이 다시 시작된다. 어려울 땐 근신하다가 조금 형편이 나아져 살만하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양은 냄비 같은 근성이다.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손에 든 검을 꽂아선 안 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2~14)”

 

 

3. 외적인 성장에서 내적인 성숙으로

 

① (4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2년 만에 다시 예언을 재계하신 이유는 초심을 잃고 넘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전의 외형은 번듯하게 세워져 가는데 내면의 성전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던 까닭이다. 눈에 보이는 성전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도 함께 지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성전재건이 아니라 성전으로 지어지는 삶, 곧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을 요구하셨다. 스가랴 7장에서 14장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주신 새로운 특명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성장에서 성숙으로’의 변화다. 거룩한 새 성전에 합당한 백성의 삶, 외적인 성장을 넘어 내적인 성숙을 명하신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머리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0)”

▶ 출애굽기는 총 40장에 걸쳐 ‘구원의 장대한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1장~13장까지 열 가지 재앙, 유월절과 홍해를 건넘으로 바로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은 바뀌었지만 노예근성은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14장~19장까지 광야로 이끄신다. 20장~34장까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율법을 일러 주셨다. 그리고 35장부터 말씀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워 성막을 건축하게 하신다. 성막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척도다. 마침내 40장에서 완공된 성막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동행하신다. 출애굽기는 구원의 출발인 유월절과 홍해를 넘어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고 말씀대로 성막을 짓고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자리까지 나가는 구원의 대망을 증거 한다. 스가랴의 예언도 이와 같은 구원의 여정과 대망을 반복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약속의 땅으로의 귀환–16년간의 중단-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성전 재건을 통한 말씀의 준행-하나님의 임재’ 순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여정은 개인의 삶에서도 동일하다.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의 물세례에서 시작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말씀대로 준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까지 도달함으로 완성된다.

▶ 성장에서 성숙으로 이끄는 사명, 보이는 성전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성전을 완공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이 ‘또 한명의 모세’라는 별명을 가진 제사장 출신의 학자 ‘에스라(EZRA)’다.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스 7:1)”,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스 7:6)”,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스 7:10)” 에스라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된 후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때, 제2차 포로귀환을 이끌었던 영적 지도자다. 그는 고국에 돌아와서 이방문화에 빠져 율법준수로 타락한 신앙을 회복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일명 ‘에스라의 종교개혁’이다. 이것은 ‘EZRA 말씀학교’의 모델이다. 본 성경공부의 목적은 단순히 성경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양적인 성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질적인 성숙의 과정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데 있다.

 

 

4. 누구를 위하여 한 것이냐?

 

① (5절)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처럼 신앙생활은 자신에게 유익을 준다. 금식하면 나 자신이 절제와 겸손을 체험한다. 예배하면 내 삶에 은혜가 넘친다. 기도하면 내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해지고 새벽기도하면 나 자신이 날마다 은혜로 살게 된다. 헌금하면 내 삶에 감사가 넘치고 봉사하면 내 삶에 기쁨이 넘친다. 경건한 신앙생활과 말씀의 준행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② (6절)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 이 말씀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앙의 위선에 대한 경계다. 자신의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으로 가장하는 외식에 대한 경고다. 외식은 신앙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거룩한 직책을 ‘명예욕, 권력욕, 물욕’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행위와 업적)가 아니라 중심(동기와 목적)을 보신다.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하는지를 감찰하신다. 헌금이 투자가 아니듯 봉사는 자기만족이나 자기과시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외식하는 신앙에 대해 엄히 경계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토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리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희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1~16)”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은 하나님의 상급이 없다. 신앙생활의 ‘공로주의’는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떠나 도리어 자기과시와 자기자랑에 빠지게 한다. 오래 가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흔들린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신앙의 본질을 망각하고 도리어 타인을 정죄하는 오류에 빠진다.

 

③ (7절)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 ‘이전 선지자’는 이사야를 가리킨다. 이사야와 더불어 호세아, 아모스, 미가는 모두 동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가야의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사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함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이라 (호 1:1)”, “유다 왕 웃시아의 시대 곧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암 1:1)”, “유다 열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미 1:1)” 이사야를 비롯한 네 명의 예언자가 활동했던 ‘웃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는 한마디로 남 유다의 제2의 중흥기다. 영토는 확장되고 경제는 성장하던 형통과 번영의 때다. 하지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많은 예언자들을 한꺼번에 보내신 이유가 있다. 고난으로 넘어지는 사람보다 형통할 때 넘어지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열에 아홉은 형통할 때 넘어진다.

▶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약 5:13)’ 고난이 많을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즐거워 할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고난이 오면 절망해서 낙심하고 형통하면 우쭐해서 자만한다. 예언자들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렵다고 낙심 말고 잘된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의 본질은 ‘한결 같음’에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려울 때나 잘 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고난당할 때나 형통할 때나 변함없는 믿음으로 성숙해야 한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나가는 첩경은 ‘오직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준행하는 삶(시1:6)’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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