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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가 아닌 사랑에 살자
노재화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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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7월 13일 (화) 11:21:08
최종편집 : 2021년 07월 13일 (화) 11:23:38 [조회수 : 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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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난 형님 편이다. 형님이 나랑 다르다고 해도 그건 다른 거지 틀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든 형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내가 지켜줄게”

최근에 방영중인 드라마(마인, JTBC)에서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사의 일부분으로 동성을 사랑하지만 재벌가의 며느리가 된 손윗 형님에게 동서가 하는 말이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서 동성을 사랑하는 내용이 가끔 나오고 있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내 주변에 성소수자가 자기를 감추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잊혀지지 않는 두 기억이 있다. 
1998년, 신학대학원 입학시험이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는 현저히 떨어지던 그 때 고(故) 안석모 교수님이 목회와 상담 과목에서 동성애에 대한 문제를 냈다.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동성애자가 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상담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정확하진 않지만 목회자로서의 입장을 묻는 질문이었는데 정답이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였다. 그 때의 답안을 어떻게 작성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동성애자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교회는 환대의 공동체이기에 환대해야 한다“라고 썼던 것 같다. 23년 전 그 당시 나의 동성애,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낯설지만 그래도 ‘수용’하는 선이었다.    

성 소수자 이슈가 지금처럼 우리 사회, 기독교계에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그 당시 이런 내용의 시험을 출제한 것은 선견지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이슈가 딱 거기서 멈추고 더 나가지 못한 것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성 소수자들을 돌아보고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면 지금 우린 좀 더 진일보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다. 

두 번째 기억은 2001년에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시아교회협의회(CCA) 청년국(Youth)과 WSCF-AP(아시아태평양 기독학생연맹)에서 개최한 SELF(School for Ecumenical Leadership Formation)에서 만난 룸메이트에 관한 것이다. 

5주간 열린 기독청년학생을 위한 에큐메니칼 학교였는데 아시아태평양지역 15개나라 2명씩 참여했다. 학교가 시작되고도 내 룸메이트는 오지 않았다. 필리핀 친구이고 기독학생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 정도로만 전해 들었다. 이틀 정도 지난 후 몇몇 친구들이 ”네 룸메이트 게이라더라“는 말을 내게 전했고 걱정된다는 표정이었다. 그 당시를 회상해보면 걱정하며 전해준 이들에 비해 오히려 별거 아닌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막상 룸메이트가 오고 직접 대면하면서 더 편안해졌다. 나보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더 나가는 거구에 앳되 보이는 모습이 ‘동생’ 같았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들의 형, 동생 관계.  

”그가 너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해, 주의해“ 라고 여성 친구들이 얘기할 때 난 형제애(Brotherhood)로 대한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말라고, 난 이성애자라고.

같은 방을 쓰면서 그것도 싱글이 아닌 더블침대를 함께 쓰면서 우리에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남성의 몸이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생각하는 룸메이트와 예의를 지키며 잘 지냈다. 나와 열 살 차이나는 룸메이트가 필리핀에서 겪고 있는 성소수자로서의 차별과 아픔에 대해 빈약한 영어지만 잘 들어주고 걱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탁월한 그림 솜씨가 차별의 고통에 묻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던 것 같다. 

학교가 끝나갈 무렵, 나와 며칠 더 묵고 싶다는 룸메이트의 말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변명으로 안된다고 말한 것이 지금까지 걸린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고 헤어졌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내내 가시지 않는다.

 사람에겐 대상을, 그것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나름의 사랑하는 방식이 있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아니면 그 사랑은 존중받아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더 나아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는 사랑이라면 이성애, 동성애를 가리지 않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 지점에 이성애, 동성애 등의 구분이 중요할까!  

지금 우린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이 뜨거운 이슈의 한 가운데 서 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안에서 혐오와 반대가 극렬하다. 동성애, 이성애 등의 구분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제대로 사랑을 하며 살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 

예수님도 그 당시 사회의 약자, 소수자인 사람들을 찾아 가셨다. 공동체 밖으로 쫓겨난 이들의 죄를 사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교회는 오히려 혐오 선동을 하면서 차별에 동조하고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돌봤던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횐대하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기독교인에게 혐오는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언어는 혐오와 차별이 아닌 사랑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를 혐오가 아니라 호기심으로 바꾸고 알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혐오를 멈출 때 우린 다양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한 생명을 향한 진심어린 존중과 배려, 공감이 사랑으로 확장될 때 우린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차별과 혐오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실상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미국의 인종주의를 비판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무시로 저지르는 비백인계를 향한 인종차별은 지나친다. 그 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세력은 혐오와 차별을 조장한다. 예를 들면. 미국이 초기 이민자들을 받으면서 필요에 의해 중국인 이주민을 받았음에도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고 차별을 정당화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얼토당토 않은 비상식적 행위지만 백인의 우월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과학적 근거, 의학적 근거를 만들었고,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왜곡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사람을 백인과 비백인으로 구분하고 하나님-백인-비백인-동식물로 서열화하는 창조설로 차별의 근거를 종교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세상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혐오를 선동하고 차별을 방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빌어 내 욕심, 신념을 지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피리가 소리를 내려면 안된다. 피리부는 사람이 소리를 내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교회가 지금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지금도 세계의 흐름은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노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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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7-13 18:44:29
좌익정권에 부역하는 기독교인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 게 잘못된 걸까요?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東南亞인이 한국인과의 차별을 견디지 못하겠다며 ①多文化를 인정해달라고 호소, 요구하는 점진적인 방법이 있고, ②일부 정치권에 빌붙어서 한국인이 동남아인을 차별한 건 잘못되었으니 동남아人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만이 진리라며 한국인 아가리에 그 무신 차별금지법을 갖다 대면서 얼른 받아먹으라고 다그치는 급진적인 방법이 있다고 할 경우 ①은 순리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이고, ②는 막무가내 식입니다. 관행은 점차적으로 바뀌는 게 무리가 없지 급진적으로 바꾸려고 하면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유럽계 미국인에게 한국계 미국인을 똑 같이 대접해달라고 떼를 쓰고, 일부 정치권을 끌어들여 난리를 치고, 백인우월주의자에게 한국계우월주의를 인정하라고 난리친다면 곧바로 백인우월주의자의 반발에 부딪칠 겁니다. 노예해방 후 백인우월주의 관행이 점진적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습니다. 관행을 하루아침에 바꾸려고 들면 반작용으로 인해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마련입니다.

동성애에 관한한 대체로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좌익급진정권과 죽이 맞는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에 관한한 대체로 보수적인 한국인의 아가리에 동성애인정법(차별금지법)을 들이대면서 얼른 받아먹으라고 난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갑자기 들이대니 보수주의자들이 기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시끄러워졌습니다. 먼저 도발한 건 동성애자들입니다. 보수주의자도 응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이 급진적이고 치졸하여 도저히 수용할 수 없기에 보수주의자들도 들고 일어나게 된 겁니다. 먼저 도발한 동성애자와 그 추종자가 잘못 선택한 치졸한 방법 때문에 시끄러워진 겁니다.

교회 관련하여 하고 많은 일 중에서... 좌익급진정권이 보수주의자를 갈구기 위한 방편으로 택한 전술인 차별금지법에 부역하는 기독교인도 늘어났습니다. 일제에 부역한 기독교인, 독재정권에 부역한 기독교인, 좌익정권에 부역한 기독교인은 다 같은 부류입니다. 부역 기독교인의 선동에 따라가지 않는 게 잘못되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본문 글쓴이의 주장에 전적으로 박수를 칠 수 없는 이유는... 누가 먼저 도발했는가? 그 도발은 時急한가? 관행적 사고를 하루아침에 바꾸려드는 蠻勇은 타당한가? 좌익정치권과 결탁하여 보수적 교회人을 죽이려드는 작태가 과연 정당한가?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동성애와 반동성애를 동일선 상에 놓고 평가한 점 때문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유도하기 위한 방법이 지나치게 정략적이고 치졸하며 급진적이기 때문에 꼴통보수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열린보수주의자의 마음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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