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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영감설'이 민망하다성경은 없다?
신성남  |  sungnam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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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6월 14일 (월) 12:41:18
최종편집 : 2021년 06월 14일 (월) 18:57:42 [조회수 :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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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경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게 곧 성경과 하나님의 계시가 '동급'이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계시엔 오류가 없지만 현재의 성경(정경)엔 오류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적 보수교단에서 성장한 나는 본래 단 한 번도 "성경은 무오하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4개의 복음서 사이에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자체 오류와 모순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더구나 그런 오류들은 단순히 필사 오류나 번역 오류가 아니라 사실상 원문 오류였다. 그러니 그 후엔 기존의 성경관을 통째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무슨 군소리를 하던 현재의 성경은 오류 투성이다. 만일 어떤 신학자라도 이것을 부인하면 바보 아니면 양심 불량자다. 복음서들뿐만이 아니라 모세오경과 역사서에도 자체 충돌하는 오류가 아주 많다.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숫자가 다르고, 모세 장인의 이름이 다르고, 그리고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 다르다.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르고, 백부장 이야기가 다르고, 그리고 가룟 유다의 죽음이 다르다. 게다가 숫자나 연대나 나이 등이 서로 다른 건 너무 많아서 따로 책을 쓸 정도다.

이래도 일부 보수교단들은 성경엔 토씨 하나 틀린 게 없다는 '축자영감설'을 신봉하고 성경무오를 여전히 주장하며 신도들을 속이고 있다.

이건 마치 교황무오설을 믿으며 성경해석권이 오로지 교황에게만 있다고 주장했던 중세교회의 무모함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지금은 21세기이다. 이제는 교조적 화석 교리를 버리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어느 목회자의 지적처럼 현재의 성경엔 오류가 너무 많아 그걸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인 상황이다.

그럼에도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표현은 사실 정확한 진실이 아니다. 차라리 "현재의 성경이 모두 정경은 아니다"라는 표현이 더 옳을 듯 하다.

정경이 될 수 없는 고대 문서들 다수가 현재의 성경에 포함되어 있으니 거기에 인간에 의한 오류가 무더기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정경을 재분류하면 앞으로 진짜 정경은 몇 개나 남을지 크게 염려가 되기는 한다.

아무튼 교부 시대 이후로 제한된 지식과 자료를 지녔던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이 다수결로 결정한 고대의 정경을 단순히 교회의 정통성과 역사성만으로 포장하기엔 시대가 너무 많이 변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성경을 펴고 읽을 때마다 그 황당한 오류들로 인해 수시로 겪는 여러 성도들의 민망함을 이제는 종식해야 한다. 오류는 오류라고 정직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더 이상 손바닥으로 성경을 가리지 말고 진실과 대면해야 옳다고 본다.   

실제로 기존의 '#성경영감설'은 코걸이 귀걸이다. 세상에 하나님의 간섭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해서 매사를 "성령이 영감하셨다"고 주장하는 건 지나친 넌센스다.

내가 저녁 먹고 졸린 눈으로 일기를 쓴 것도 성령이 영감하신 것인가. 그건 마치 불경이나 천부경이 성령께서 영감하셔서 기록되었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오류 투성이 성경에 대한 성령 영감설은 종교적 기만이며 억지다. 그건 인간에게 이성을 고귀한 선물로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무식한 도전이다. 그래서 그 이성을 배제한 종교는 반드시 사이비가 되는 것이다.

진실과 결론은 단순하다. 하나님의 계시엔 오류가 없지만 인간들이 표결로 선정한 정경은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현재의 성경(정경)을 성서(문서)로 불러야 더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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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구 (59.15.218.206)
2021-09-05 21:25:47
예수, 십자가, 구원?
예수가 구원한다고?



기독교가 구원한다고?



교회와 기독교를 보아라.

그들 자신들이

무지몽매와 우상숭배에서

구원받아야 할 것들이지

누구를 구원할 만한 것들인지!



예수를 왜곡하고

성경을 비틀어서 만들어진

기독교와 교회가

과연 누구를, 무엇을

구원하겠는가?





진실을 말하자면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 사건에 인류 구원의 단초가 있을 뿐이다!



예수 사건이란 무엇이냐?



예수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 십자가 사건이란

사악한 권력의 압제 속에서

수탈당하는 민초들에게

임박한 하느님의 통치라는 주제로

위로하며 희망을 주고

그 하느님의 통치를 시연하려던

예수가

사악한 권력들에 의하여

그들이 만들어낸 가장 악랄한 형벌인

십자가형의 희생자가 된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을, 모든 인류를

두 종류로 혹은 세 종류로 분류하는

시금석이다.



십자가를 만들어

십자가에 달 사람을 고르고

그 십자가형을 실행하는 자.



십자가에 달릴 이유가 없음에도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을 받는 자.



그리고 또 한 가지 부류는

십자가에 무관심하거나

십자가를 방관하는 자.





사실, 인간의 역사는

다툼과 전쟁의 역사이고

이를 달리 말하면

십자가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이유 없이

십자가에 매다는 자들.



가끔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자들도 있기도 하고

또 가끔은 마땅히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그런 사악한 자들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고

낄낄거리며 웃는 자들과

십자가를 져야할 손톱만큼의 허물도 없지만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당하는 자들과

내가 만들지 않았고 내가 달리지 않았기에

그 십자가에 무관심한 자들.



예수 십자가 사건이란

곰곰이 따져보면

인간의 종류가 십자가를 기준으로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 사건은,

다시 말하여 예수 사건은,

인간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고

그 척도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는

인간 구원의 시금석이 된다는 것이다!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인생이냐?

(이는 구원을 포기하는 죽음의 인생이다!)



십자가를 스스로 지지는 못하나

십자가에 남을 달리게 해서는 안 됨을 깨닫고

십자가를 거부하고 폐기하는데 합력하는 자인가?

(이런 인생이 구원받은 인생이다!)



아니면,

아직은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므로

십자가에 달린 다른 이들을 애써 외면하는 자인가?

(이런 자들은 구원을 논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 상충되는 구라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었다는 그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십자가는 현실이고

나와 우리는 그 십자가에 의해

구분되고 있음이다.



십자가에 다는 자.

십자가에 달리는 자.

십자가를 외면하는 자.

십자가를 거부하려는 자.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여전히 인류는

십자가에 달거나 달리거나

십자가를 외면하거나 거부하거나 한다!



십자가는

내가 스스로 지지 않는 한

거부되고 폐기되어야 할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시금석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마땅한 구원을 위하여

상징이며 거울이며 시금석인 것이다!



이 외의 십자가에 관련된

기독교와 교회의 흔한 이야기들은

저들 밥벌이와 권력유지를 위한

구라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

예수의 십자가 사건,

예수사건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기독교와 교회가

아직도 유효하려면

예수사건을

제대로 해석해내고

예수사건의 진리를 충분히

실연하는 한에서인 것이다!









[출처] 예수, 십자가, 구원?|작성자 무릇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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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한산 (182.216.13.90)
2021-07-31 09:13:27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을 몇번 따라서 믿음의 조상이 된것입니까? 여호와의 선택이라는 운이 따라서 된것이 아닌지요? 이삭은 자기 장자도 구별못하는 아둔한 인물인데 야곱을 적장자로 삼으려는 여호와의 의도대로 된것이니까 아둔하다고 못하는 것이고, 야곱은 장자계승도 그렇고 삶에서 사기꾼인데 이들이 정말 믿음의 조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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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한산 (182.216.13.90)
2021-07-12 10:22:21
전에도 올렸던 글인데 한 번 더 올립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교회를 다니다가 불교에서 참선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불교는 박사이고 기독교는 중학교정도 수준, 노장자는 고등학교 수준이고 무당은 유치원수준이라고 봅니다. 불교에서 산신각, 칠성각, 용왕각을 수용한 것은 유치원과정 수준을 위해 수용했다고 봅니다. 예들 들어 산신각의 산신이 부처에게 '저는 부처님 가르침과 관계없으니까 절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 부처 대답'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는 유치원과정이니까 거기에 맞는 사람은 너를 찾아와서 기도하는 것이고 그 과정을 잘 마치고 윗단계로 와야하니까 너도 매우 중요한 과정이야, 종합학교에 박사과정부터 유치원과정까지 있는 것이니까 어느 과정도 다 소중한 과정인 것이야, 수학박사가 *-곱하기,나누기 배우는 유치원생에게 이건 수학도 아니야, 미적분을 배워라고 한다면 이치에 맞지않는 얘기인 것처럼,즉 미적분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4칙연산을 탄탄하게 배워서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 잘 믿으세요하고 산신기도를 중시하는 사람은 산신기도 즉 유치원과정을 잘 이수하도록 독려해야 하는 것처럼 다 필요하고 중요한 과정이니 산신아 , 너도 중요한 기초과정이니 그대로 자리하고 있어야한다. 그리고 산신기도하러 절에 왔다가 염불한번 듣고 부처얼굴보고 불경 한귀절 듣고가면 그것이 바로 박사단계로 올라오는 인연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니까 너의 역할이 중요한 거야, 알겠지?'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종교가 다 귀중하고 학교과정처럼 수준차이가 있는 것이며 최고 수준은 불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내 책임이고 ,자력을 중시하는 불교가 저는 편하고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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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한산 (182.216.13.90)
2021-07-06 07:50:17
고교때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신의 존재를 믿었는데, 신이 나를 항상 지켜보고 보호해준다는 안도감, 동시에 하나 하나의 행동에 대해 상과 벌을 준다는 두려움, 전지전능하여 믿을만한 위대한 존재라는 의지처라는 복합적인 마음이 있었는데, 재수하면서 참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여호와에게서 벗어났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알고 나를 극복하고 싶어서 참선을 시작하면서도 처음에는 여호와에게 '하나님, 제가 여기 절에 온 것은 철학과를 갈 것이라서 불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온 것뿐이니 오해마십시요. 믿습니다. 아멘'하고 기도하고 참선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당당하게 '여호와, 너는 꺼져~'라고 하면서 돌아선 자신감은 결국 체험이었습니다. 아래는 그때의 체험입니다.
'아직 화두는 모르고 있었고 나를 둘러싼 문제들은 깊이 분석하기를 통해서 다 해결되어 더 이상 생각할 일이 없어서 도선사 호국참회원 3층의 일요선원 좌선시간에 눈 앞 약 2미터 앞에 임의의 점을 찍어놓고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그 점에 집중,집중,집중하다보니 내 몸이 쑥쑥쑥 커지면서 어느 순간 우주도 내몸도 하늘도 앉아있는 호국참회원 법당 지붕도 없어지고 나도 없어진 듯한 경계가 왔다. 이러다가 내가 죽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하고 겁이 나서 어떻게 내 몸으로 돌아가나 걱정을 하는데 다시 도선사 호국참회원 지붕밑에 좌복을 깔고 앉아있는 나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점에 집중을 했더니 또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내 마음속에 무한한 뭔가가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했고 불교가 무속신앙 비슷한 저급한 종교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구나하는 느낌도 들었다. 5월 초순경에는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는데 국어교과서에 실려있는 이양하 선생님의 '신록예찬'에서 보았던 무념무상(無念無想),무장무애(無障無礙 )하여 몸과 마음이 쾌활 쾌활한 경지가 문득 느껴졌다. 즉 조선시대처럼 사형집행하는 망나니가 칼춤을 추다가 칼로 내 목을 친다 하더라도 떨어진 내 목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듯한, 내 몸에 대한 애착이 사라진 상태를 느꼈다.'
위의 두가지 체험(몸이 사라진 듯한 느낌, 몸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하면서 이 세상은 여호와가 만들고 주재하는 곳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더 넓은 , 더 자연스럽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여호와, 너는 꺼져!'라고 하니 큰 짐을 벗은 듯한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운 마음의 평안을 느꼈고 그리고 참선, 내가 나를 깨닫고 나를 극복하고 그리고 남도 편하게 하는 길을 가기위해 본격적으로 화두의심을 했습니다.그리고 불교교리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내 인생의 주인공은 오로지 나일 뿐이며 나에게 온 모든 길흉화복은 다 내가 만든 것이므로 극복도 내 노력으로 해야지 거기에 개입하는 신과 같은 어떤 존재는 없다는 당당한 자존감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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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선생님에게 (183.107.117.38)
2021-06-23 14:13:55
선생님 글을 읽고 생각 나눠봅니다.
성경에 대한 집사님의 생각을 조금은 알 듯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1. 성경영감설은 부정함이 옳은가?

제가 이해한 바로 집사님의 의견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 자체가 부정되며, 그 이유로 오류가 많은 책이기 때문이라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류가 없으나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시는 입장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무한한 신의 존재가 인간의 언어로 환원되는 순간, 무한을 유한의 인식으로 해석-적용하는 모든 과정은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류라 함은 '그릇되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기에 무한-무오의 뜻이 유한한 정보로 환원되는 일이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가지는 오류를 의미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과 영감이 성경저자에게 반영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기독교신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적극적으로 축자영감설의 경우 직통 계시의 글이라는 입장에서 소극적으로는 신앙공동체의 경험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의 축자적 해석을 오류라 비판하는 것도 무한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특정 문자적 의미에 묶이는 것을 비판하는 과정이지, 성령의 조명 자체가 무색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인간들이 표결로 선정한 정경"은 아마도 A.D 90년 경 위기 의식을 느낀 유대인들이 구약문서들의 정경화를 서두르고, 이후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의 권위와 구약경전의 동등화, 더 나아가 초대교회 서신들의 사도성-통일성-보편성의 기준을 통해 신약 정경화 과정아 아루어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A.D 90년보다 훨씬 전인 포로기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하는 성경의 요소들 역시 야웨신앙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들을 주장하고 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문화적-사회적 요소들은 오히려 당대에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적 요소들로 인해 그 정당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오히려 19-20세기 초반의 의구심들로부터 많은 부분이 해명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고대인들의 망상으로 생각되던 아시리아 제국의 흔적 등)

물론, 그것이 히브리 민족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기 위한 편집본이라는 주장은 수백년간 이어져 온 논쟁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결국 기독교신앙이 신앙고백이라는 비약적인 체계를 의존할 수밖에 없음도 인정하며 말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상이나 체계는 마찬가지로 그의 수용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성경영감설에 있어서도 그 전제는 초대교회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하나님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결국 어떤 전제를 수용하며 신학체계를 발전시키는 가의 차이일 수 있지만, 초대교회 사도들이 겪은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기억의 굴절(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역사 주장-인간의 기억은 온전치 못하다는)로 인해 저술된 요소들 중에 오류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신약성경이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분명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들을 더 나누고 싶으나, 사역중이라.. 여튼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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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6-18 20:02:36
과연 오류투성이 성경이라는 주장과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다는 주장은 兩立할 수 있는가?
참된 지도자는 지시내리는 것 이상으로 지시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었는지 확인하는 지도자다. 지시만 내려놓고 확인을 건너뛰는 지도자를 가진 조직은 결국에는 형편없는 조직으로 쇠락해지기 마련이다.

신성남 식의 주장은 결국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밖에 안 된다. 지시만 내려놓고 확인은커녕 지시사항이 날조된 것을 묵인하는 하나님은 과연 제대로 된 지도자인가? 하는 물음이 당연히 따르게 되고,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하다는 신성남 식 주장은 사탕발림의 립 서비스에 불과할 따름이다. 차마 하나님은 공격하지 못하고 그 대신 아랫것들을 대신 족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대통령이 책임질 일에 대해 아랫사람이 대신 책임을 지는 경우가 허다한 사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날조한 아랫것들을 묵인한 건 하나님의 책임인가? 바울이나 요한 등의 책임인가? 그런데 신성남 집사는 “당신은 이단!”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다고 한 자락을 깔고서 성경 記述 오류 따위로 아랫것들을 조지고 있다. 아랫것들의 지시사항 記述 오류에 대한 최종책임은 하나님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아랫것들에게 “너희들 편한 대로 내말을 記述하라!”고 하나님이 허락했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랫것들에게 ‘너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으니 너희 마음대로 해도 좋다!“라고 했든지...

20세기에 일어난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나치당이 1920년대에 히틀러 주도로 아무에게나 추파를 던지며 당헌당규를 제정하면서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유태주의 등 좌우를 아우르는 것들을 마구집어 넣어 잡탕 당헌당규가 되었다. 1930년대가 되자 사회주의 색채를 탈피하고자 하는 세력이 당헌당규를 손볼 것을 히틀러에게 요구하였고, 반대로 민족주의 색채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세력도 준동하여 날마다 당헌당규 개정의 목소리가 커졌다.

히틀러 曰 성경도 읽어보면 오류투성이다. 그러나 누가 성경에 딴지 거나? <아주 극소수>만 이를 문제 삼을 뿐 <거의 대부분>은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성경에 다시 손대는 순간 하나님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으로 비추어져 <거의 대부분>마저 기독교에서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똑똑한 극소수>의 비판을 모르는 채 하는 게 낫지 무식하게 다시 성경에 손대다간 기독교의 토대마저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나치당 가입자 가운데 당헌당규 읽어보고 고개를 흔들다가도 나의 연설을 들으면 몽환의 경지에 빠져 당헌당규 문제는 어디론가로 가버리게 된다. 그래서 90%의 국민이 내 얼굴 보고 총통으로 선출한 것이고 그 복잡한 오류투성이의 당헌당규 보고 우리당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당헌당규 개정에 반대한다. 다시는 당헌당규 문제를 끄집어 내지 말라! 오늘 개정하면 내일 또 개정하자고 할 것이 분명하므로 그대로 두어라. 아주 질기게 당헌당규 읽어보고 투표하는 놈들은 어차피 우리를 찍어주지 않는다. 그들이 몇%쯤 된다고 보는가? 그들에게 아부하는 대신 우린 당헌당규조차 모르는 대다수와 함께 지금 그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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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
한산 (182.216.13.90)
2021-06-18 14:18:30
집사님,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현재의 성경은 정경이 아니어서 성경은 없는 형편이고,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한데 그 완전성을 증명할 방법은 아직 모르겠다는 말씀입니까?
비판을 하셨으면 그 대안도 생각해보시고 알려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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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한산 (182.216.13.90)
2021-06-15 23:36:08
집사님, 정경이 없다고 볼 수 있는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려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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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한산 (182.216.13.90)
2021-06-15 23:09:52
집사님, 위의 글대로 생각하시면서 전도는 어떻게 하시려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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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
한산 (182.216.13.90)
2021-06-15 22:49:56
집사님,
-하나님의 계시가 오류가 없다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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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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