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절기이다. 부활주일부터 50일째 되는 날은 성령강림주일로, 구약시대의 표현으로는 오순절(五旬節)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다. 오순절이 중요한 이유는 율법을 받은 날로 기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 째 되는 날,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였다. 오순절과 성령강림일은 구약과 신약을 대표하는 영적 사건이다. 율법 선포와 복음 전파의 신비한 출발을 보여주는 놀라운 역사였다. 오늘 우리 자신을 포함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역사는 바로 성령강림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한 해의 교회력은 두 개의 사이클로 구성된다. 대림절부터 부활절 7주일째까지가 주님의 반년(半年)이라면, 성령강림주일을 기점으로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영원한 주일까지는 교회의 반년이다. 그리스도교에서 기억하고 축하하는 모든 기념일은 주님의 반년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성령강림 후 이어지는 교회의 반년은 무(無)축제 기간이다. 성령강림 후 첫째주일은 삼위일체주일이다. 

  성령강림을 표현한 미술작품들이 다양하다. 엘 그레코의 ‘성령강림’이 대표적이다. 화가는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마다 그 머리 위에 불꽃을 그려 넣었는데 “각 사람 위에 하나씩”(행 2:3)이었다. 성령강림은 집단 체험이나, 군중 의식이 아닌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단독자로서 하나님의 영을 체험한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빈(Wien) 국립도서관에 있는 작품 ‘성령강림절’(das Pfingstfest)은 주제의식이 다른 작품들과 차이가 있다. 비둘기 입에서 구름을 뚫고 내려온 성령의 불꽃이 모든 제자들 위에 하나씩 내려앉는 모습은 다른 것들과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성령강림의 현실 앞에서 열 한 명의 제자들은 감동은커녕 그 입술 모양이 비죽하게 아래로 처져 있다. 한결같이 실망과 의심에 찬 눈초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초대교회의 오순절 상황이 아니었다. 화가는 자기 시대의 불안한 성령부재의 현실을 비판한 것이었다. 제자들의 혼란스런 표정은 갈 길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12세기는 그리스도교가 유럽에서 한창 번성하던 중세기였다. 당시 교회는 황금으로 자신을 치장할 만큼 부유해졌다. 그럼에도 화려한 교회와 제도 안에 성령의 감동이 없었다. 

  교의학자 폴만(H. G. Pohlmann)는 자성의 목소리를 전한다. “현대 독일교회는 성령을 책으로 만들어 열심히 책장에 진열하고, 성령의 은혜를 전문목회자들에 의한 습득의 대상으로 삼으며 또한 예언을 사회와 잘 적응하는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성령의 불길이 꺼지고 재만 남은 상태이다.” 그의 예언자적 비판은 현대의 유럽세계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지닌 사람이다. 일 년의 절반인 성령강림절은 그리스도인을 영적 성장과 성숙으로 인도하는 신앙공동체의 훈련기회이다. 이를 교회의 절기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가난한 마음과 빈손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지 않는 교회라면 비록 겉모습은 멀쩡할지라도, 영적 생기를 잃은 존재와 다름없다. 교회가 늘 사용하는 ‘신령한’ 혹은 ‘영성’과 같은  언어들은 모두 교회의 진실함과 부요함을 드러내는 영적인 속살이 아닌가?

  성령강림절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에게도 영적성장을 위한 계절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동행하시어 삶의 연약함, 두려움, 혼란스러움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들고, 다시 견고하게 하신다. 인생의 오순절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 애쓴다. 바야흐로 성령강림과 함께 본격적인 열매가 움틀 여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