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더 파더》 (The Father, 2020)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년 전 치매의 초입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이제 막 치매의 초입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장인어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 무서운 병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까지 앗아가 버리면서 당사자 뿐 아니라 주위의 모두를 거리낌과 당혹의 끝까지 몰아붙이는 이 병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알츠하이머라는 고급스런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이 병이 가져다주는 비극성이 조금이라도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관계된 모두를 기약도 희망도 없는 순수한 절망과 불행 속으로 빠뜨리고 마는 질병, 치매는 이제 멀리서 드물게 일어나는 낯선 병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지극히 흔한 병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입니다.”(시 90:10) 인간의 평균수명은 칠십까지라는 성경의 선언은 이미 무색해진 지 오래다. 치매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이미 신체는 그 수명을 다했는데 의학의 발달로 연장된 수명에 정신이 따라가지 못해서 생겨난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만일 내가 치매를 겪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치매의 경과를 상상해볼 수 있을까? 《더 파더》는 바로 이 무서운 상상을 현실화하여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더 파더》는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플로리앙 젤레르가 자신의 동명 연극을 영화로 연출한 작품이다. 영화는 그 시작부터 혼란스럽다.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변하고 아파트의 모습도 수시로 변해간다. 하지만 영화의 정체와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팔십이 넘어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의 입장에서 사태를 보여주는 영화인 것이다. 지금까지 치매를 소재로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대부분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치매를 다룬 영화였다. 즉 치매에 걸린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영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 파더》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한다. 바로 치매 당사자의 시선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 병의 가능성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하게 벗어나 있지 못하기에 영화를 보는 일은 순수한 공포체험이 된다. 내가 겪을지도 모를 치매의 순수한 정체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치매는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다. 치매의 진단에 함께 흔히 따라오는 것은 우울증과 망상이다. 이 둘은 치매를 공포스럽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우울과 망상은 환자로 하여금 자신을 돌보는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기탄없이 공격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정성으로 돌보는 유일한 사람인 딸을 내내 공격적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당혹스런 표정에서 우리는 이 비극을 생생하게 읽는다. 영화 중간쯤, 스웨터에 머리와 손을 끼워 넣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아버지를 도와 딸이 옷을 입혀주자 아버지는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게 고맙다.” 어쩌면 유일하게 딸에게 제정신인 채로 말한 아버지의 이 말이 나는 왠지 모르게 가장 슬펐다.

영화가 끝난 후 생각해보면 아마도 주인공 노인의 치매는 수년에 걸쳐 상당한 시간 동안 악화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오페라의 아리아를 즐기는 노인의 모습은 그가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던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추락은 더욱 극적이고 더욱 비참하다. 영화 속에서 노인은 시계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의 시간은 갈수록 단절되고 삭제되고 뒤섞인다. 자신의 망가진 시간을 잃지 않으려는 노인의 슬픈 몸부림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끝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노인은 절규한다. “내 모든 잎들이 다 떨어진 것 같아.”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잎이 무성하다 못해 빽빽한 여름의 나무들을 보여준다. 마치 너는 지금 저렇게 잎이 무성한 나무일지 모르나 언젠가 네게도 그 잎들이 다 떨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을 하는 듯이, 너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이 떨어져 마침내 너 자신을 잃을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을 하는 듯이... 이 순수한 공포의 체험을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다. 이것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시 9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