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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한 내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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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5월 23일 (일) 12:36:02 [조회수 :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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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한 내 그릇
행 9:10-19
(2021/05/23, 성령강림주일, 존 웨슬리 회심 기념주일)

음성으로 듣기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웨슬리의 고백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성령강림절이자 존 웨슬리 회심 283주년 기념주일인 오늘, 빈들에 마른 풀 같은 우리 마음에 성령의 은총이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몇몇 개신교인들이 석탄일에 조계사에 몰려가 찬송가를 부르며 구원은 오직 예수에게만 있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교적 열정이라는 외양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은 몰상식의 극치일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한 몸에 짊어지셨던 예수님의 그 숭고한 삶이 그를 믿는다는 사람들에 의해 부정당하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예수 정신을 확고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님은 거짓 예언자들을 살피라 말씀하시면서 그 분별의 기준을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마7:20) 사랑과 일치, 정의와 평화의 열매가 아닌 혐오와 분열의 열매를 맺는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번 주 중에 저는 웨슬리의 찬송시집을 거듭하여 읽었습니다. 그것은 찬송시인 동시에 고백이었고, 고백인 동시에 기도였습니다. 그의 회심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리라는 중심에 가닿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던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꼭 말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부름 받은 목회자였지만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치열한 구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만큼 멀어지는 카프카의 ‘성’처럼, 진리의 깊은 세계를 맛보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번번이 좌절되곤 했습니다.

“오랫동안 저 주님을 섬겨 왔나이다, 노력과 수고로움으로 그러나 무익하게. 금식하고, 기도하고, 당신의 말씀을 읽고, 선포되는 것을 들었나이다 – 헛되이 // 자주 집회에 참여했고, 당신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갔나이다. 경건의 모양 제 모습이었나이다. 경건의 능력 그러나 저는 아는 바 없었나이다. 외적인 법에 신뢰를 두고 있으나, 그 법의 속 깊은 의도 깨닫지 못했나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와 너비 저 결코 알아채지 못했나이다 그리고 그 높이도.“(존 웨슬리 편집, <웨슬리 찬송시선집>, 나형석 옮김, kmc, p.172-3)

회심 이전 그의 영혼의 풍경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는 진리의 세계 앞에서 그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는 주님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영혼을 새롭게 만드실 은혜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능력 없는 경건의 모양, 이 고상한 연극이 사라지자, 죄를 자각하게 하시는 성령께서 불어오셨나이다. 그리고 모든 꽃들을 말라 시들게 하셨나이다. 저는 입을 다물었고, 부끄러움과 수치가 죄로 물든 제 얼굴을 덮었나이다. 속죄하신 어린양 앞에 무릎을 꿇었나이다. 그리고 저 은혜로 구원받았나이다.“(앞의 책, p.178)

자기의 비참함을 인정하자 성령께서 오시어 그의 내면에 불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그는 입을 다물었고, 죄로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의 은혜가 그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 즐겁게 행하고, 말씀의 인도에 따라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감리교 운동은 바로 이런 은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주변이 변하고, 주변이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새로운 인류는 그렇게 소박하게 시작되는 법입니다.

∙두려운 부르심
사울의 회심 이야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은 그 동안 굳건하다고 믿어왔던 그의 존재의 터전을 흔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 환한 빛 앞에서 그는 오히려 어둠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느닷없는 운명의 타격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환하게 보이던 길이 문득 사라지고,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아뜩함이 그를 엄습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건 의지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적절할 겁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는 아나니아를 등장시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던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나니아야!“ “주님, 여기 있습니다.” 마치 예언자들의 소명 이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그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십니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고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는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지금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9:12)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즉시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사울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어떻게 박해했는지, 그리고 그가 다마스쿠스에 온 것도 대제사장이 위임한 권한을 가지고 믿는 이들을 잡아 가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런 그에게 가라는 것은 위험 속으로 등을 떠미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어하는 마음을 모르실 리 없건만 주님은 그가 주님의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져갈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그를 일컬어 “내가 택한 내 그릇”이라고 칭하시며 사울이 미구에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일찍이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뜻을 나눈 사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기 위해 길을 가시던 주님은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창18:1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모스의 말도 떠오릅니다. “참으로 주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그 종 예언자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암3:7). 주님은 이처럼 아나니아를 신실한 친구처럼 대하십니다.

∙순명
마침내 아나니아는 그 두려운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입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돌발적인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약속의 땅 앞에 이르렀을 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갔습니다. 추수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 올라 있던 요단 강에 제사장들은 발을 들여놓았습니다(수3:15). 베드로는 “오너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마14:29). 길 없는 곳에 길을 낸 것입니다. 인생에 결정적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런 때일 것입니다. 일상은 대개 평범하고 지루한 일들의 반복입니다. 대충대충 사는 이들도 있지만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을 정성을 다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일은 마치 성례전처럼 정갈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현실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고 들어와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일들 말입니다. 전쟁과 같은 극적인 상황이 아니라 해도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사고, 질병, 실패, 재난, 예기치 못한 사태, 사회의 혁명적 변화 등을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사울의 경우 다마스쿠스 체험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강도는 다를지라도 아나니아가 처한 입장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결단 앞에 서 있습니다. 두려웠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신앙은 자기 한계를 돌파하는 경험입니다.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어느 순간 양력을 얻어 하늘로 날아오르듯, 우리 신앙도 비약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던 어부들은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아브람도 살고 있던 땅, 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는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익숙한 세계에만 머물면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더 큰 세계와 만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박해 그 자체가 복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박해를 통해 더 큰 세계와 접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로 받아들임
아나니아는 마침내 주님의 메신저가 되려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9:17) 세 가지 동사가 눈에 띕니다. ‘떠나다‘, ‘들어가다’, ‘손을 얹다’. 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련의 동작 속에는 어마어마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 긴장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형제를 뜻하는 헬라어 아델파스adelphos는 자궁을 뜻하는 ‘델피스delphys‘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한 태에서 난 사람들이 형제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자궁에서 태어난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마주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를 형제라 부릅니다. 이 극적인 변화의 한복판에 그리스도가 계심은 물론입니다. 현대 세계는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기근 그리고 테러를 피해 조국을 등진 이들이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돕니다. 그들은 어디서든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존중받지 못합니다. 가뜩이나 부족한 일자리를 빼앗는 적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혐오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인종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 인류의 고질병인 것 같습니다. 삶의 긴장이 높기에 우리는 낯선 사람들과의 사귐에 주저합니다. 유튜브나 소셜미디어는 알고리즘을 통해 서로 취향과 정치적 입장이 비슷한 사람들을 연결시켜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과만 만나고 소통합니다. 그럴수록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더 위험하고 형편없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만나 대화를 하기보다는 그들을 자기 편견에 따라 어떠어떠한 사람으로 규정짓곤 합니다.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나니아는 두려움을 딛고 일어나 사울에게로 갔고, 그를 형제라 불렀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일러주었습니다. 마침내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이 것이 떨어져 나갔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시력의 회복은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의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 앞에 있는 세상은 이전과 같은 세상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 세상을 바라보는 사울의 입장이 바뀐 것입니다.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았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를 통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이 이제 결실로 맺힐 찰라입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담장을 무너뜨려, 소통하게 만드십니다. 찬송가 436장 3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으키는 변화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찬송가436장 3절)

자기의 연약함과 어둠에 갇혀 방황하던 존 웨슬리를 변화시켜 신실한 일꾼으로 바꾸시고, 두려워하던 아나니아 속에 오셔서 용기를 불어넣으신 성령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한계를 돌파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잇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돛을 펼치는 선원들처럼,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비로소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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