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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그 두려움에 대하여
이진경  |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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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5월 10일 (월) 13:23:21
최종편집 : 2021년 05월 10일 (월) 13:24:37 [조회수 : 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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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와 동성애혐오, 이 두 가지는 최근 들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양대 키워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둘은 사회와 교회 안팎으로 어느 것이 먼저랄 것 없이 전 방위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모든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때 여성혐오와 동성애혐오는 우리말로는 ‘여성’과 ‘동성애’에 동일하게 ‘혐오’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형태이기에 둘 다 비슷한 성격의 혐오로 오해되기 쉽다. 혐오라는 동일한 사태에 여성과 동성애라는 다른 대상이 관계된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둘을 영어로 살펴보면 혐오의 성격에 있어서의 확연한 차이가 곧바로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영어로 여성혐오는 ‘미소지니’(misogyny), 동성애혐오는 ‘호모포비아’(homophobia)다. 우리말로는 동일한 ‘혐오’가 여성혐오와 동성애혐오에서는 각각 ‘미소’(miso-)와 ‘포비아’(-phobia)로 다르게 표현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여성혐오를 뜻하는 miso-gyny는 ‘미워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μισέω(miseō)에 ‘여성’을 뜻하는 γυνή(gynē)를 결합하여 만든 단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성애혐오를 뜻하는 homo-phobia는 원래는 ‘같은’을 의미했으나 특별히 성애와 관련하여 동성애를 뜻하게 된 그리스어 ὁμο(homo)에 ‘두려움’을 뜻하는 φόβος(phobos)를 결합하여 만든 단어다. 그러므로 여성혐오로 번역된 misogyny는 여성에 대한 순수한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이 증오를 작용시키는 것은 여성에 대해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무시해?’라는 감정을 담은 남성의 분노,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힘의 우위에 있는 남성의 분노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동성애혐오(homophobia)는 그 단어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포비아’가 의미하는 것처럼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는 동성애 또는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의미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호모포비아 이외에도 포비아를 붙여서 만든 모든 단어들은 미지의 존재나 상태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파생된 증오를 표현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외국인혐오를 뜻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 역시 ‘외국인’, ‘이방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세노스’(ξένος)에 ‘포비아’를 붙여 만든 단어다. 성경이 종종 이 단어를 ‘나그네’로 번역하곤 하지만 이 나그네는 결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낭만적인 나그네를 의미하지 않는다. 나그네는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낯선 존재,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는 언제나 잠재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특별한 덕목에 속하는 것이었다. 낯선 이방인이란 언제든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방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을 감수한 행위다. 환대는 언제든 배신으로 갚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소돔으로 향하는 천사들을 받아들인 환대나 소돔에서 롯이 두 천사를 받아들인 환대는 그런 종류의 비범한 환대였다. 오히려 소돔의 주민들이 천사들에게 보인 적대적인 혐오와 폭력이야말로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돔의 주민들이 보인 태도에서처럼 미지의 존재들은 대개 그 잠재적 위험성으로 인해 가능하다면 언제나 제거해야만 하는 존재로 취급된다. 그리고 전쟁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존재가 내부인보다 다수인 경우는 거의 없기에 힘의 열세에 있는 나그네는 언제나 ‘포비아’의 대상으로 핍박 받는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가부장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보호막으로서의 가장을 상실한 고아, 과부와 더불어 나그네를 사회적 최약자로 구별하고 하나님께서 이들의 편이심을 강조한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최소한의 법적 보호막도 없는 존재, 즉 언제나 수탈과 착취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은 이처럼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는 적대감이다. 이것은 얼마 전 대한민국 사회가 겪은 제주도 난민사태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난민(難民)이란 말은 꽤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이때에도 영어는 그 사태의 본질을 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난민은 refugee의 번역이다. 즉, 그들은 여러 사정으로 자국에서 도망쳐 나온 망명자들이지 돈을 벌기 위해 온 빈민들이 아니다. 그들이 한국으로 망명을 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이 난민협약 가입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망명을 신청한 외국인이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이때 공권력의 배타성보다 더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국민들의 혐오다. 대한민국국민들은 이 외국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이며 특히 그들의 종교로 인해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위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명백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때의 혐오는 두려움에 근거한 혐오다.

이와 거의 비슷한 논리가 동성애혐오에도 적용된다.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사회와 교회의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두려움이다.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시민들은 동성애를 인정하게 되면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소위 ‘정상’ 가정들이 해체의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동성애를 인정하게 되면 나중에는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기만 해도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의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포비아’, 즉 두려움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혐오는 힘의 우위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근거로 한 혐오는 그 어떤 타협이나 대화의 여지도 남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두려움의 대상은 제거되지 않는 한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려움을 근거로 한 혐오는 강력하고 철저하며 파괴적이다. 이 포비아의 혐오에서 그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일 4:18) 두려움과 사랑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기에 혐오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말이다. 싫든 좋든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소수자에 관한 숙고와 논쟁은 피할 수 없는 교회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교회 안에도 성소수자들은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소수자와 관련하여 고민을 시작할 지점은 교회 밖 사회와 세상의 성소수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을 그리스도인 성소수자들일 것이다.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해서 이들의 존재가 없어질 리도 없다. 그들이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성직자들이 누가 있을까? “목사님, 저는 성소수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교인에게 그럼 교회를 나가라고 말할 목사가 누가 있을까? 아무리 교회가 썩었다 말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목사는 냉혹하고 잔인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전투의 최전선에서 사랑을 고민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지금이야말로 교회 안의 성소수자들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아직까지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방법을 모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고민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교회의 역사에서 언제나 그러했듯이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출발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안의 두려움을 없애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큰 방법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요일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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