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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9세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사이비 사적 계시 Ⅲ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 교리 괴이하게 통과, 당시 이 교리 반대한 주교들도 적지 않아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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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1월 19일 (일) 00:00:00 [조회수 :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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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비열한 행위로 반대파 주교들 괴롭히고 억압

고대교회에서는 평신도인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했다. 예컨대, 제1차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는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에 의하여 325년에 소집되었다[는데 그는 세례도 받지 않은 평신도였다]. 그리고 제2차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도 역시 당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에 의하여 381년에 소집되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번째로 개최되었던 제6차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680년에 소집하여 그가 직접 이 공의회를 주재하고 사회까지 보았다. 그러나 이 관습이 중세교회 때부터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여 12, 13세기경 공의회의 소집권은 로마<교황>[주교]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교리(교의)를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선포하기 위해서 교황 비오 9세는 오랜 세월 이를 비밀리에 준비해 왔었다. 그래서 비오 9세는 1864년 12월 6일 처음으로 자신이 공의회를 소집 개최하려는 비밀 계획이 있다고 당시 로마 교황청에 거주하는 21명의 추기경들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이 계획에 대한 비오 9세의 함구령을 엄수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였다. 그들 중 비오 9세의 비밀 계획에 반대한 이는 2명, 주저한 이는 6명, 나머지는 모두 찬성하였다.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비오 9세는 1865년 3월9일 추기경들로 구성된 ‘공의회 준비위원회’를 지명하였다. 그후 비오 9세는 이를 더 많은 주교들에게 알렸다. 1867년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바울로. 바울)> [바울]의 로마 순교 1800주년 기념축제에서 비오 9세는 5백여명의 주교들 앞에서 공의회의 소집과 그 계획을 공포했다.

1868년 6월29일 공의회의 소집 대칙서가 전세계 주교들에게 반포되어 1869년 12월8일에 로마의 바티칸에서 공의회가 개최되기로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프랑스의 평신도 신학자 루이 버이요(1813-1883)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범위가 교황의 모든 직무와 그의 개인적 언행에까지 도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령님께서 교황의 일거수 일투족과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와같은 대단히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이며 과장된 교황주의자들이 많았다.

버이요와 그의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의 주장이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져 신조로 선포되는 것을 갈망하였다.

한편 반대자들도 많았다. 이그나츠 폰 될링거(1799-1890)가 그 반대자들의 선봉장이었는데 그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독일의 교회사가였다. 공의회 개최 직전인 1869년 7월에 될링거는 ‘교황과 공의회’(Der Papst und das Konzil)라는 저서를 내어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교리를 공격했는데 그 반향은 실로 엄청났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 등 그 밖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찬반 여론이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비오 9세는 이 문제를 공의회의 의사일정에서 배제했다. 마침내 제 날짜에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25일 4백명의 주교들이 이 문제를 의제로 추가해달라고 비오 9세에게 청원하였다. 그러자 136명의 주교들이 이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0년 5월9일 이 문제에 대한 심의가 시작되었다. 이 문제로 37<회>[차]의 회의와 140회의 찬반의 연설이 있었다. 당시 독일 주교들의 대부분이 이를 반대했다. 1870년 7월13일 이 문제에 대한 중간 표결이 있었다. 찬성한 주교들은 451명, 반대한 주교들은 88명, 조건부로 찬성한 주교들이 62명이었다. 최종 표결이 있기 전 소수파로 전락한 55명의 주교들이 저항의 상징으로서 로마를 떠났다.

1870년 7월18일 최종 표결이 실시되었고 찬성한 주교들은 533명이었고 반대한 주교들은 단지 2명이었다. 이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교리가 장엄하고도 성대하게 선포되었다. 이 시간 내내 바티칸에 심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리쳤다. 이 폭우에 대한 해석은 그때나 그후에도 의견이 갈라졌다. 즉 하느님께서 노하셨다와 그렇지 않다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으로 인하여 바티칸을 지켜주던 프랑스 수비대가 철수했고, 그해 9월20일 이태리인들이 로마를 점령하여 비오 9세가 그토록 포기하지 않으려던 교황령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한 달 후에 비오 9세는 공의회를 무기한 정회했다. 공의회 전부터 비오 9세는 공의회의 성공을 위해 오랜 세월 많은 사전 정지작업을 했었으나 막상 공의회가 개최되자마자 바티칸 안팎으로부터 극심한 반대가 있어 왔다.

공의회의 가동 중 비오 9세와 그의 측근들은 그들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시종일관 온갖 추잡하고 비열한 행위들을 서슴치 않고 그들의 반대파에게 자행했었는데 이들이 저지른 권모술수, 회유, 협박, 폭거 등은 예수회 신부인 클라우스 샤츠 교수의 ‘보편공의회사’(분도출판사)에 상세히 나온다.

하나의 예를 든다. 이 책 316쪽에는 “비오 9세는 이 저항에 크게 화를 냈다. 교황은 저항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않고, 본디 그의 스타일이었거니와, 오히려 더욱 엄혹하게 대처했다. 꾸준히 중재를 위해 노력하던 빌리오 추기경에게 화가 난 교황은 다음 날 그에게 극단적 무류성 옹호자들이 요구하던 정식적 표현을 끼워넣으라고 명령했다. -중략-.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소수파는 처음엔 몰랐다. 그들은 여전히 마지막 순간의 절충을 기대했고, 7월15일 대표단을 교황에게 보내어 ‘교회의 증언에 의지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첨가해 주기를 청했다. 비오 9세는 그 일을 모르는 척 회피하는 식으로 대응하면서 사람을 홀리는 기막힌 재주를 발휘했는데, 이것이 대표단이 환상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총회에서 소수파는 결정적 환멸을 맛보게 되었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 공의회는 레오 1세가 강도들의 공의회라고 혹평한 제2차 <에페소>[에베소] 공의회(449)보다 더 심한 불법을 저질렀다.

필자 주, 위 글 중 <...>는 교회연합신문 발행인 강춘오가 제 멋대로 내 원고를 삭제시킨 부분이고 [...]는 강춘오가 자기 마음대로 내 원고에 만들어 넣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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