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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9세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사이비 사적 계시Ⅰ사이비 사적 계시에 근거 제1차 바티칸공의회 소집, 라 살레뜨 동정녀 마리아 발현은 사이비 사적 계시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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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1월 18일 (토) 00:00:00 [조회수 :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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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 마리아 발현과 치유 기적에 맥 못춰

현대 천주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교리(교의)는 소위‘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이라는 교리이다.

이것 중에서 교황(로마주교)의 수위권에 관해서는 정통고대교부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 왔었으나 로마주교(감독)의 무류성이라는 것은 이 <분>[고대교부]들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 분들이 언급했었던 수위권도 역시 중세 이후 천주교회가 주장해 오고 있는 수위권과 전혀 다르다. 이것은 수위권이라기 보다는 우선권에 가까운 개념이며, 한스 큉 신부의 ‘교황의 사목적 봉사 수위권’과 여러가지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한스 큉 신부는 교황 고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사제직 수행을 정지당했다. 한스 큉 신부는 그의 ‘그리스도교-본질과 역사’(분도출판사) 579쪽에서 교황의 무류성은 1280년에 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한 사적 계시에 근거하여 주장했었던 것에서 최초로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수위권과 무류성은 서로 다른 것이나 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우선권과 수위권의 차이는 무엇이며 무류성은 무엇인가? 간단히 설명하겠다.

우선권은 교황인 로마주교(감독)가 사도 베드로의 사례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주교(감독)들 사이에서 상징적 대표권을 가진다는 것이고 수위권은 로마주교가 다른 모든 주교들에 대한 완전한 행사(치리)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무류성은 천주교회가 초대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사도 베드로 이래로 세상 종말 때까지 교황은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사에 어긋나는 말이다. 왜냐하면 교회사에는 사이비 이단설을 주장했던 교황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 공의회(보편공의회 + 지역공의회)에서 사이비 이단으로 정죄된 교황(로마주교)들까지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로도 무류성은 포기되지 않았으나 수위권은 많이 약화되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누구가, 언제, 그 무엇 때문에,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이라는 괴이한 교리를 공식적으로 처음 들고 나왔는가? 그것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던 교황 비오 9세에 의해서 였고 그는 라 살레뜨 동정녀 마리아 발현이라는 사이비 사적 계시에 근거하여 그렇게 행하였다.

‘라 살레뜨(La Salette) 동정녀 마리아 발현’이란 1846년 9월19일 오후 3시경 프랑스의 라 살레뜨의 한 마을로부터 약 3마일 떨어진 한 산에서 15세의 여자 목동 멜라니와 11세의 목동 막시민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발현했었던 사건을 말한다. 당시 마리아(?)는 멜라니와 막시민에게 메시지(사적 계시)를 주었다.

그 사적 계시의 내용의 하나는 신자들에게 개과천선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것만을 비밀리에 교황에게 보낼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멜라니와 막시민이 따로따로 받은 것이라 서로가 그 내용에 대해 몰랐다고 한다. 곧 이어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자들이 라 살레뜨의 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치유 기적들이 보고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해당 교구장 Bruillard 주교가 이 발현을 공정하게 조사할 하나의 위원회를 구성(지명)했고 그 위원회는 조사후 이 발현이 진실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무신론자(자유사상가)들은 이 발현을 비웃었고 심지어 성직자들도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Bruillard 주교(몬시뇰)는 1851년 11월16일 이 발현이 진실하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라 살레뜨에의 순례도 인준했다.

마리아가 그 두 어린이 각각에게 털어놓았던 특별한 두 비밀들은 Brillard 주교의 충고에 따라서 1851년 교황 비오 9세에게 직접 전해졌다.

이상의 내용은 미국 가톨릭 대사전의 것을 번역 요약한 것이다.

미국 가톨릭 대사전은 이 사적 계시 둘이 교황 비오 9세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어서 멜라니의 사적 계시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의 번역판이 있고 막시민의 사적 계시는 결코 출판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어서 막시민이 불행하고 방랑적인 생애를 보낸 후 그의 고향에서 1875년 3월1일에 죽었고 멜라니는 1904년 12월15일에 많은 방랑의 생애를 이태리의 한 마을에서 끝마쳤다고 <말>한다.

이어 이후 로마 교황청은 이 발현에 대한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늘날 두 교황에 의한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의 교리의 선포에 수많은 신자(성직자 + 평신도)들의 청원서가 큰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염시태’와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교리 선포의 뒷 배경에 사적 계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을 공식적으로 천주교회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의 고 오기선 신부가 번역한 돈 샤키의 ‘세기의 승리자-교회의 어머니’(가톨릭출판사) 52~55쪽에는 교황 비오 9세가 이 두 목동들이 받은 사적 계시에 근거하여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교리를 선포했다고 나와있다.

교황청에서 나오는 ‘Inside the Vatican’ 2000년 3월호는 비오 9세가 젊은 날 간질병을 앓았었으나 동정녀 마리아의 도움으로 치유되었다고 말한다. 한스 큉 신부는 자신의 ‘그리스도교-본질과 역사’ 632쪽에서 비오 9세가 “정신병 징후들을 드러냈다”고 주장하며 같은 책 570쪽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 초가 동정녀 마리아의 발현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비오 9세는 1792년에 이태리에서 태어나서 1846년에 교황이 되었고, 1878년에 죽을 때까지 교황직에 있었다. 그는 교회사에 최장의 교황재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 다음 기록은 교황 고 요한 바오로 2세이다.

필자 연락처 019-299-9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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