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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의 허세를 모방하는 그런 악마의 굿판은 이제 걷어 치워라동성애 반대 목회자들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하면서
남재영  |  goodpast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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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4월 29일 (목) 20:20:44
최종편집 : 2021년 04월 29일 (목) 20:24:12 [조회수 :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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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의 허세를 모방하는 그런 악마의 굿판은 이제 걷어 치워라

동성애 반대 목회자들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하면서

 

성소수자 그리고 200년 전 미국교회

 

성소수자 문제를 언급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할 점이 있다. 200년 전 미국교회가 흑인노예와 여성에 보인 태도이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이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봐야한다. 당시 미국교회는 흑인들과 여성에 대해서 매우 억압적인 태도를 가졌다. 자신들의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은 교회의 거룩성을 목소리 높였고, 성경을 아낌없이 끌어대며 오용했다.

이를테면 흑인노예제도에 대해서 교회와 백인 신학자들은 흑인들이 노예가 된 것을 자연적이고 성경적이고 필수적이라고 했다. 1861년 12월 조지아 주 오거스타의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지구상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에 보내는 미국장로교회의 총회 문서>에서는 “노예제도를 죄로 비난하는 것은 군주제나 관료제 하에서 가난을 죄로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 당시 미국교회의 저명한 신학자 가운데 하나였던 제임스 헨리 쏜웰은 “인간의 권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위계적 계급제도에 종속되어 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함의 후손으로 본성상 백인들보다 열등하고,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노예 신분으로 정해졌다.”고 주장했다.

백인교회와 백인 그리스도인들은 흑인노예제도를 성경적으로 당연시했다. 심지어 그들은 흑인 노예들에 대해서 과거 아프리카에서 생활했던 흑인 조상들의 상태에 비추어, 그리고 당시 흑인 노예들의 고향이었던 아프리카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형제와 자매들의 생활 상태와 비교하면서, 흑인 노예들이 그처럼 많이 미국에 와서 야만과 죄의 속박에서 구원된 것을 노예들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미국교회와 백인 그리스도인들은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노예 사냥꾼들에 의해 붙잡혀 미국에 노예로 팔려온 것을 ‘야만과 죄의 속박에서 구원된 것’으로 표현했다.

또 200년 전 미국의 교회는 흑인들을 억압했던 양식을 그대로 가져와 남성들이 여성들을 억압하는데 적용했다. 당시 남성들은 여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낙인을 찍었다. ➀여성이 성경에 처음 언급된 때부터 성경은 하와에게 내려진 저주를 통하여 여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➁여성은 도덕적 성품에서 열등하고, 온전한 백인 남성 기독교인들의 문명의 수준까지 올라올 수 없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감정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➂여성은 의지적으로 죄가 많고, 종종 성적으로 난잡하고 위협적이며 남성을 유혹하여 죄악에 빠트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사적으로만 표현하도록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교회 안에서 장식적인 여성상을 강요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공적인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을 배제시키는 것이 당연했고, 교회는 오직 남성들만을 위한 성역으로 간주했다. 200년 전 미국의 여성들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남성들의 역할을 보조하는 자리에만 반듯하게(?) 서 있도록 강요를 당했다. 1891년 남부장로교회 총회는 남녀가 섞인 모임에서 여성들이 연설하고, 기도를 인도하고, 공개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인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스스로 봉사를 위해 개 교회를 벗어나 노회차원의 더 큰 연합모임을 조직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 비성경적이고, 교회적이지 않고, 여성적이지 않다고 정죄했다.

200년 전 미국교회의 흑인노예들과 여성들에 대한 이러한 야만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는 그 당시에 교회의 거룩성을 지킨다는 대의명분으로-성서적으로, 신학적적으로, 교리적으로-포장되었다. 나는 오늘의 시점에서 그들의 입장이 얼마나 어이없는지를 여기서 구구절절 따지고 싶지 않다. 다만 200년 전 미국의 교회와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흑인들과 여성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과 신학과 교리가 야만과 폭력과 혐오의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오늘 동성애 반대자들도 200년 전 그들과 다르지 않다. 200년 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던 교회와 백인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은 오늘 전부 다 깨어졌다.

 

   
▲ 동성애 십자가-“우리는 슬픔을 바닥까지 아는 사람들이오.”그들의 슬픔을 죄악이라 하지 말자. 그들의 슬픔을 추하다고 하지 말자. 그들이 - 자신들의 슬픔이 너무도 억울해서 - 슬픔이 아니고자 하는 몸부림을 비웃지는 말자. 그들의 깊은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기를 ….(출처: 십자가 만드는 목수 김홍한 목사의 블로그)

받아들일 수 없었던 확신을 신앙의 적폐로 청산한 오늘 미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200년 전의 그 ‘과잉된 확신’은 이제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순리로 자리를 잡고 있다. 오늘 동성애 반대자들이 거룩성을 지키기 위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는 확신도-머잖아 반드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상식과 순리가 되는 방향으로 시대정신은 흘러가고 있음을 믿는다. 200년 전의 성경과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대면서 목소리를 높였던 백인교회의-흑인노예와 여성에 대한-확신이 오늘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상상해보게 된다. 거룩의 이름으로 성경을 끌어대는 오늘 동성애 반대자들의 확신은 50년 이후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이동환 목사는 고난의 짐을 지고 가고 있다

 

감리교회공동체 안에서는 동성애 문제가 두 진영으로 나누어 대립하고 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가진 진영과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진영으로 나누어져있다. 물론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이 더 크고 거칠고 더 큰 소리인 점은 사실이다. 그래서 성소수자를 죄악시하는 진영은 이동환 목사가 퀴어 축제에서 축복을 한 사실을 문제 삼아 고소하였고, 이 목사는 경기연회재판에서 담임목사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이동환 목사는 목사 안수보좌문제로 또 고슴도치처럼-동성애 반대진영으로부터-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나는 이동환 목사의 목사 안수보좌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안수는 감독이 하는 것이 감리교회이다.

원래 감리교회의 모든 교회는 감독(Bishop)의 관활 하에 있다. 천주교와 성공회에서는 우리가 감독이라 부르는 ‘Bishop’을 주교라고 한다. 감독과 주교의 차이는 번역의 차이일 뿐이다. 본질은 교구제와 파송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제도의 특성은 Bishop이 성직자를 안수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교구 안의 교회로 파송하고, 파송된 성직자가 Bishop을 대신하여 목회를 하도록 한다. 그리고 파송된 목회자의 생활비를 Bishop이 책임을 지게 된다. 이게 감독이 있는 교회의 성직제도의 요체이다. 이런 점에서 감리교회는 감독이 안수를 하는 것이 맞다. 안수이후 나머지는 감독이 나 몰라라 해도-감독제도를 두고 있는 한 감독의 목사안수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한번 안수한 것을 물릴 수 있나? 여기에 대해서는 변영권 목사의 글 <이동환 목사 안수 보좌 문제에 관하여>가 핵심을 제대로 짚고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

하여간 이동환 목사의 안수보좌 건도-동성애 반대자들의 정죄론이 워낙 우세하니 책임져야할 감독까지 강단을 내려넣고 한발 물러서버린 현실에서는 총회재판부에서 이를 다툴 수밖에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목사의 재판과 관련하여 법리적인 문제는 박경양목사가 쓴 <이동환 목사의 ‘목사안수 보좌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글에서 아주 잘 다루고 있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며 폭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진영과 성수수자도 영혼을 가진 인간이므로 존귀하게 환대해야 한다는 진영이 서로 대립하는 틈바구니에서 이동환 목사가 고난의 짐을 지고 가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내 입장이다. 언필칭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이들은 혐오와 차별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가진 이들을 마치 악마와 사탄의 세력으로 몰아세우며 정죄하는 것을-자신들이 교회의 거룩성을 수호하기 위한 전사로 나서는 것으로 대단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동환에게는 대단히 미안하게도-이런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이 횡횡하는 현실에서-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동환 목사의 재판에 대해서 법리적으로 변호하고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동성애 정죄‘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만큼은 분명하게 지적한다. 첫 번째는 형식적인 과정은 거쳤다 하나, 그 과정은 지극히 졸속적이었고, 합리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불행하게도 동성애 반대법은 탄생자체가 문제가 되는 법이라는 점이다. 동성애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에 눈이 멀어 그냥 밀어붙인 세력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렇게 통과시킨 법이 결국 감리교공동체를 상당하게 불행하게 만들고 있음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항문섹스‘와 ’에이즈‘라는 혐오를 선동하면서 통과시킨 그 법은 불행하게도 동성애 반대자들이 계속해서 감리교회공동체 안에서 물리적인 힘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도록 부추길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진영은 지금 감리교회공동체에서 반(反)동성애 법이라는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고 있다. 만약 저들이 들고 있는 몽둥이 앞에서 모두가 침묵한다면 감리교회는 200년 전 미국교회가 빠진 함정에 그대로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몽둥이를 쥔 그자들 앞에서 저항하면 그 몽둥이는 마침내 감리교회공동체를 피범벅으로 만들기를 불사하는 미치광이로 돌변하게 될 것이다. 반동성애 진영은 그 전조를 지금 보이고 있다.

 

“감리회는 원칙적으로 동성애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거짓

 

동성애 반대법이라는 이 불행한 법은 어떻게 통과되었는가? 그 법이 통과된 과정을 복귀해 보자. 2015년 10월 선한목자교회에서 열린 입법의회에서 삽입된 동성애 반대 문안은, 12월31일 전용재 감독회장이 공포했다. 동성애 반대법을 개정한 당시 입법의회 장정개정위원회(장개위) 김충식 위원장은 "(동성애 반대법이)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감리회는 원칙적으로 동성애에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넣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동안 성소수자 지지 활동을 해 온 감리회 목사나 신학생들에게도 소급 적용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앞으로 논란이 일거나 하면 다루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이 인터뷰의 내용으로 보면 이미 당시 김충식 위원장은 향후 이 법이 감리교회공동체의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음 충분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 2015년 8월13일 장정개정위원회(위원장 김충식 목사)가 주관으로 남부연회 하늘문교회에서 열린 제31회 총회 입법의회 장정개정을 위한 공청회 전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통과된 이유를 질문하는 기자에게 “감리회는 원칙적으로 동성애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말은 거짓말이다. 그 당시까지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감리교회는 한 번도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감리교회공동체가 어떤 원칙적인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공개적인 토론의 과정을 거쳐 공동체의 대의를 모아낸 적이 전혀 없었다. 혐오를 정당화하는 진영과 혐오를 반대하는 진영이 상식적이고, 지성적인 토론이나 합의를 거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점이 이 법이 가진 태생적인 불행이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이철 감독회장이 동성애 문제와 관련하여 감리교공동체가 합리적인 길을 찾기 위하여 양 진영의 입장을 서로 경청하고 토론하는 공론의 장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있다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감리교공동체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감리교회는 법을 개정할 때 입법의회를 앞두고 매번 관례적으로 장정개정위원회가 각 연회를 순회하며 공청회를 열었다. 정리된 입법안을 가지고 장정개정위원회 위원들이 입법 내용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구성원들의 비판과 의견을 수렴하고 경청하는 절차가 있었다. 당시 각 연회 공청회에서 동성애 반대 문안이 신설 될 것이라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왜냐면 당시까지도 장정개정위원회 논의 테이블에서는 동성애 반대문안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법은 입법의회에 참여한 반동성애론자들이 플로어에서 급조해서 통과를 시킨 법이었다. 일부 성소수자 반대론자들이 성소수자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드러낼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항문섹스’와 ‘에이즈’ 같은 혐오의 말들로 선동한 결과였을 것이다.

김충식을 인터뷰했던 뉴스엔조이 기자가 <당당뉴스> 심자득 편집인을 인터뷰한 내용에도 당시 이런 정황을 충분하게 읽을 수 있다. 심 편집인은 "감리회 내에서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하는 몇몇 세력들이 이번 법안을 주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성소수자를 지지해 온 감리회 목사들에게 악용될 소지 있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지적에는 "실제로 그렇게까지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주·흡연은 적발하지 않으면서 동성애 지지만 처벌할 수 없지 않은가. 적발할 수 있는 근거도 미약하기 때문에 실효성에는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심자득 당당뉴스 편집인의 낙관적인 전망과 달리 지금 그 법은 성소수자들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되었고, 그들이 마구 휘두르는 칼에 이동환 목사는 지금 극심한 상해를 입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는 이들에게도 “감리교회를 떠나라”면서 노골적으로 막말을 퍼붓고 있다.

 

사명감이 폭력이나 사회적 타살의 면허가 될 수 없다

 

나는 지금부터 이 글에서 감리교회공동체 안에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진영의 논리를 펴는 이들을 모두 통칭하여 이제부터 ‘A“라고 부르겠다. A는 그 진영에 속한 각각 서로 다른 사람들의 총합이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사람에 따라서 논리가 조금씩 다를 수가 있지만 모두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A가 동성애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언어와 논지가 있다. 첫 번째는 ”동성애=항문섹스=에이즈“라는 유치한 도식이다. 이 말로 혐오를 선동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동성애를 찬성하느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A는 ”동성애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가 죄악이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선 첫 번째 문제에서 성소수자들의 문제는 항문섹스와 에이즈가 전부가 아닌 줄 A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A를 너무 후하게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설령 성소수자들의 안에서 A가 선동하는 혐오의 모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성소수자들의 모든 문제를 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도 A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단정 짓고 규정하는 것을 일반화의 오류라고 한다. A의 문제는 스스로 자신들이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있으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이 큰 문제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성소수자들을 혐오하고 차별하지 말라는 내게 A가 들이대는 질문이다. “동성애를 찬성하느냐?”고. 이 질문은 번지수가 틀렸다.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다. 성소수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들의 성정체성의 문제이다. 성정체성의 문제로 아파하는 이들 앞에서는 찬성과 반대란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그 말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 2016년 4월28일 한국교회인권센터 주관으로 열린 김조광수 감독(가운데 모자 쓴 이)의 간담회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인들의 점거로 행사가 간담회는 중단되고, 참석한 김조광수 감독은 경찰의 경호를 받으면서 귀가했다.

'생물학적으로 크게 보아 남성과 여성 두 성이 있다.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명확하고, 자기 성정체성도 확고한 이들은 스스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성정체성에서 혼란을 겪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소수이지만 자신의 성정체성에 관한 혼란을 가진 이들이 엄연하게 실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인 성과 다른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겪고,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로 비난과 혐오와 조소를 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내밀한 두려움 가운데서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성장하고, 성장해서 스스로 성정체성에 대한 커밍아웃을 한 다음에도 차별과 장벽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했다.

얼마 전 트레스젠더로 자기 정체성을 찾은 다음 군에서 강제 예편당한 고 변희수 하사는 자살로 그 생을 마감했다. 변 하사는 자신 성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난 다음 계속해서 군 복무를 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군은 그를 내쫒았다. 군 복무를 계속하고 싶다는 변 하사의 입장을 지지해온 나는 변 하사의 자살은 군이 그를 죽음의 벼랑 아래로 내몰았다고 본다. 성 차별을 제도화하고, 성소수자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적 장벽 아래로 그의 등을 떠밀어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었다. 성소수자들이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내게 A는 이제 더 이상 “동성애를 찬성하느냐?”고 질문하지 말라. 그 질문은 자기 무지를 드러내는 질문이거나 아니면 번지수가 틀린 질문이라 대답을 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명토 박아 말하건 데 그 질문이 성정체성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자살의 길로 몰아세우는 사회적 타살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지난 얼마 전 교사요 정치가요 퀴어 활동가인 김기홍씨(38세)가 자살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너무 지쳤어요. 삶도, 겪는 혐오도, 나를 향한 미움도”라는 글을 남겼다. 그가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 성소수자 예비후보 임푸른을 위하여 아래와 같이 지지 연설을 했다.

“성소수자 사회에서 자살기도, 죽음의 소식은 특별한 일이 못 됩니다. … 마주하는 장벽이 그만큼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알려지면 연대라도 할 수 있는데, 알려지지 않으면 연대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드러냅니다. 임푸른 예비후보도 그래서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대를 통해 함께 국회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언론은 변희수 하사의 죽음과 김기홍 교사의 죽음을 자살로 보도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자살을 사회적 타살로 읽는다. A야 불타는 사명감으로 그런다고 하지만 그대들의 그 사명감이 아무리 고귀하다 하더라도-그 고귀한 사명감이 폭력이나 사회적 타살의 면허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A에게 전혀 그런 의도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의도 없음’의 결과는 A의 의도나 생각과 상관없이-결과적으로 영혼을 가진 이웃들을 사회적 타살로 몰아세우는 일상적인 위력이 되었다-는 것이 변 하사와 김 교사가 죽음으로 절규한 진실이다.

 

성소수자의 모습으로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실지도 모르는 예수님

 

세 번째 문제는 A는 “동성애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한다”는 논리이다. 솔직하게 이 논리는 매우 가증스럽다. 나도 그렇지만, 죄의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이다. 얼마나 자유스럽지 못했으면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아무 쓸모없는 자”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고발했고, 아빌라의 데레사는 스스로 “구더기 새끼”라고 고백했으며, 우리는 “이 벌레 같은 날 위하여 큰 해 받으셨나”라고 통탄의 애가를 올리는가.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영혼은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다. 내가 선 자리가 죄인의 자리이다. 죄인의 자리에서 피할 데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 영혼을 가진 우리의 존재성이다. 나는 성소수자들도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 죄를 씻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설령 그에게 혐오의 모습이 있다하면 그를 이웃으로 환대하고 품는 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의 차별성이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거룩한 본질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룩한 감리교회의 거룩성을 위해서라도 영혼을 가진 성소수자를 위한 목회적인 공간을 반드시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거룩한 교회가 가진 거룩성의 본질이라고 믿는 목사이다. 교회는 그들을 환대해야한다. 이 때 환대란-헨리 나우웬의 말처럼-그들이 우리 안에서 충분하게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거룩한 교회가 해야 할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들을 죄인으로 몰고, 마치 영혼 없는 개나 돼지나 짐승처럼 몰아세우는 지금 A의 행태는-아무리 그 잎으로 거룩성을 소리 높여, 거룩의 모양으로 말한 해도-그 행태는 으르렁거리는 야수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비록 성소수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존중받아 마땅한 자리가 교회의 울타리 안이어야 한다.

 

   
▲ 지난 2월4일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모임에서 발제를 하는 필자(사진: 당당뉴스)

 

교회는 그래야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聖體)가 될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사회적 차별을 당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당신과 동일시 하셨다. 오늘 감리교회가 지켜야할 거룩성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통해서 지키겠다는-폭력에 기초한 거룩성이 아니다. 그렇게 지킬 수 있는 교회의 거룩성은 없다. 감리교회공동체는 그런 폭력적인 행태로 지키는 거룩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의 모습으로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실지도 모르는 예수님’을 찾고 헤아리는 맑은 영성이 감리교회공동체에 필요하다.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겠다고 방방 뛰는 A에게는 참 안된 말이지만, 10수년 전 감리교사태를 겪고 난 이래로-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나는 감리교회가 공교회의 거룩성을 A처럼 그렇게 고민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우리의 거룩성이 회복되기 위해서

 

감리교공동체 안에서 극복되지 않는 양국화의 문제나,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금권선거 논란,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생활고를 외면하는 대형교회들의 비정함은-교회의 거룩성을 말할 때 성소수자들의 문제보다 먼저 앞서 고발해야할 과제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아파해야할 우리들의 상처요 아픔이요 죄악이다. 이런 우리의 허물들을 자고하지 않는 A의 동성애에 대한 단죄에 대해서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대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죄악을 옹호하는 집단’으로 낙인찍고 “감리교회를 떠나라”는 폭력적인 무례를 범해야만 거룩해 질 수 있다면, 나는 단연코 감리교회의 목사로 그런 거룩성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나는 A가 혐오를 내려놓고, 성소수자를 교회가 환대할 때 감리교회공동체는 거룩성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목사이다. 그래서 나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A에게 공개적인 토론을 제안한다. 그런 한편 나는 어떻게 생각하면-A처럼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교회의 거룩성 회복의 통로로 사고하게 되는지-A의 그 생각을 정말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입장이 명백하게 서로 다르다. 그런데 나는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이 정죄의 빌미가 아닌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해야할 우리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공개적으로 서로를 존중하면서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A와 함께 합을 맞춰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목사인 나는 전광훈이란 자가 목사라는 것이 대단히 굴욕스럽다. 동성애와 반공을 반대하면 어느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는 전광훈은 동성애 반대와 반공을 팔아가면서 악마와 손을 잡고 있는 게 내 눈에는 훤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전광훈을 정치적인 선지자로 호명하여 그를 후원하는 것이 소위 수구보수화 된 주류한국교회의 행태이다. 대단히 애석하게도 감리교회 안에도 전광훈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사실도 내 눈에는 보인다. 참 우울하다. 이런 현실에서 동성애 문제는 감리교공동체가 함께 길을 찾아야할 과제이다. 함께 지혜를 모아 찾아야할 과제를 앞에 두고-내 말을 안 듣는다면 교회 앞에서 집회를 열겠다는 협박은 전광훈이나 하는 짓이다. 감리교회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이 때에, 맑은 총기를 짜내어야할 이 비상한 판에서, 전광훈의 허세를 모방하는 그런 악마의 굿판은 이제 걷어 치워라. 그리고 토론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자. 정중하게 부탁한다.

 

빈들공동체교회 남재영 목사(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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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성도 (122.101.20.169)
2021-04-30 13:14:38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단순하게 생각들 하시지요.
그럼 동성애자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이 딱 나오지 않나요.
왜 성경적이지도 않고 비상식적인 것을 억지로 합리화를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별을 받는 부분에 대해서 약간 생각해 볼 여지가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대놓고
옹호하고 변호하려는 것도 제가 볼때엔 문제가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은 동성애는 아니라고 얘기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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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4-29 22:52:00
죽음의 굿판을 美化하는 것도 모자라 동성애반대론자를 唾罵하는 굿판은 집어치우라!
반대론자를 A, 찬성론자를 B로 한다고 했으니, 나는 A의 입장에서 B를 논박하고자한다! A 입장도 각양각색이고, B 입장도 각양각색이므로 나의 견해가 A를 대표하지 않는다. 단지 A와 관련된 나의 입장일 뿐이다.

1. 성소수자 옹호하는 게 그 무신 벼슬인가?

나는 동성애를 내심으로 혐오한다. 그러나 동성애를 혐오한다고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느 고장 사람을 내심으로 혐오한다. 그러나 어느 고장을 혐오한다고 표출하지는 않는다. 나는 가수 조영남을 내심으로 혐오한다. 그러나 가수 조영남을 혐오한다고 표출하지는 않는다.

이런 나에게 동성애, 어느 고장, 가수 조영남을 혐오하지 말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데 <나의 마음 속 생각>을 억지로 개조하기 위한 선전선동은 단호히 거부한다. 내가 내심으로 싫어하는 동성애, 어느 고장, 가수 조영남을 갑자기 좋아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더욱 더 단호하게 거부한다.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귀에다 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동성애나 어느 고장이나 가수 조영남을 공공연하게 옹호하지 않으면 ‘예수쟁이’가 아니라고 나팔 부는 데 학~~을 뗀다. 이거 홍위병 작태 아닌가?

<개고기혐오자>와 <개고기애호가>가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가만히 있는 <개고기애호가>에게 “짐승학대는 죄, 동물도 인권이 있다...”라고 매일 같이 개고기 먹지 말라고 고함치는 게 과연 정당하다고 보는가?

<동성애혐오자>와 <동성애옹호자>가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사회상규에 벗어나지 않는 한 이 둘은 상호 존중받아야만 한다. 어느 한쪽이 우리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법규를 위반하지 아니하는 한 서로를 존중해주어야만 한다.

<동성애혐오자>가 자기혐오를 밖으로 표출하는 건 자제해야하듯이 <동성애옹호자>가 동성애를 옹호하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질 듯이 당신들은 ‘예수쟁이’가 아니다 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개고기 혐오할 자유가 있다면 동성애 혐오할 자유도 있고, 개고기 식용할 자유가 있다면 동성애 옹호할 자유도 있다.

2. 하고 싶으면 실력으로 해라!

동성애하는 걸 실력으로 방해하거나 공공연히 차별하는 <동성애 혐오자>는 사회법규에 의해 처벌하면 될 것이고, <동성애 옹호운동가> 역시 그의 행위가 사회법규에 어긋나면 처벌하면 될 것이다. 이러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동성애 옹호자>가 입법을 추진한다며 일부 정치권을 등에 업고 우리사회에서 유지되고 있던 바로 윗글에서 언급한 ‘평온한 상태’를 파기하면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즉 성소수자 옹호세력이 현실에 불만을 품고 先制的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기독교인도 동참하기 시작하여 敎理상의 內戰을 일으켰고, 동조하지 않는 기독교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예수쟁이’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니 <동성애 非옹호자>도 반격에 나서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회도 시끄러워진 것이다.

이런 건 합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교리 해석은 제 각각인데 예수님이 나타나 “너가 맞는다!”라고 하지 않는 한 상대방이 굴복할리 없다. 기독교의 수많은 교파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면 어느 일방의 교리로 생각이 다른 교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직하게 이야기 하자! 애초에 정치권을 등에 업고 입법을 추진한 성소수자 옹호세력이 실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게 가장 깨끗한 방법이다. 뭘 꾸물거리는가? 실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집행하면 될 것 아닌가?

감리회의 現行교리에 불만이 있어도 감리회에서 '신앙생활'하듯, 임대차보호법에 불만이 있어도 ‘국민생활’하듯, 감리회법이든 사회법이든 간에 날치기로 통과시키든 뭐든 간에 하여간 통과되기만 하면... ‘교리와장정에 성소수자우대(차별금지)조항’이 있어서 불만이 있어도 감리회에서 ‘신앙생활’ 할 사람이 넘칠 것이니 뭐가 걱정인가?

과거에 中東을 침략한 십자군전쟁은 주둥아리 교리전쟁이 아니었고, 유럽의 종교전쟁도 주둥아리 교리전쟁이 아니었으며, 북미와 남미를 침략한 기독교인이원주민을 멸절시킨 것도 주둥아리 교리전쟁이 아니었다. 피를 철철 흘리는 무력투쟁이었지 교리나 주절거리는 주둥아리 교리투쟁은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이 히틀러를 물리친 것도 주둥아리 교리 투쟁이 아닌 기독교인으로서 총 들고 피를 철철 흘린 스탈린그라드 등에서의 무력항쟁이었다. 이런 선배들의 성공담으로 보건대 주둥아리 교리투쟁만 해봐야 백년하청이다. 지금 당장 총칼 뽑아서 국회로 진격하라! 성소수자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성소수자 옹호하는 기독교인은 전부 옥쇄를 하고, 단식을 하여 죽어버리겠다고 하면서 십자군旗를 높이 들어라!

성소수자를 위해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교인들이 그저 교리논쟁(이 교리논쟁은 백날 해봐야 끝이 나지 않는다)에 매달리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성소수자 옹호인지 성소수자 非옹호자를 갈구기 위해 성소수자를 이용하는 것인지 도대체 그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성소수자문제가 자기 교리 자랑질에 좌판을 깔아주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3. 변희수 하사 건에 대하여

남재영 曰 변 하사의 입장을 지지해온 나는 변 하사의 자살은 군이 그를 죽음의 벼랑 아래로 내몰았다고 본다. 성 차별을 제도화하고, 성소수자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적 장벽 아래로 그의 등을 떠밀어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었다. 성소수자들이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내게 A는 이제 더 이상 “동성애를 찬성하느냐?”고 질문하지 말라. 그 질문은 자기 무지를 드러내는 질문이거나 아니면 번지수가 틀린 질문이라 대답을 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차별당하고 혐오당하기만 하면 전부 자살했는가? 성소수자로서 차별 당했지만 자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사람에 대한 모욕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그렇게 가벼이 버리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죽음의 굿판을 미화하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유만큼이나 죽음의 굿판을 저주하고 동성애를 옹호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마지막으로, 동성애 옹호와 동성애 찬성이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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