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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공존 : 이 깻잎은 누가 땄는가?
이진천  |  춘천두레생협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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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4월 19일 (월) 14:01:11
최종편집 : 2021년 04월 19일 (월) 14:08:24 [조회수 :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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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천

사랑의 종교를 자처하면서 성소수자를 향한 공공연한 혐오와 차별을 자행하는 기독교. 연민의 축복기도조차 용납 못 하겠다는 감리교. 솔직히 고백하자면 별 관심이 없다. 교회의 못난 모습에 질린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감리교 평신도라는 껍데기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내게 기독교 비판은 관심사가 아니다. 애정이 딱히 없으니 비판도 안 하게 된다.

  이런 나에게, 친애하는 목사님께서 글을 부탁하셨는데 차마 거절을 못 했다. 목사님은 ‘차별받는 농업농촌’이라는 짧은 화두만 주셨을 뿐이다. 아마도 ‘차별’이 오늘의 기독교와 농(農) 모두에게 공통 키워드가 된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물론 충분히 일리 있는 관점이며, 이야기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대한민국 농(農)의 역사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차별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차별은 주류가 비주류를 향해서, 다수가 소수를 향해서 행사하기 마련이다. 차별은 대부분 옳지 않다. 도시가 농촌을 차별하고, 주력 산업이 농업을 차별해온 것은 팩트다. 세련된 도시민이 촌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문제점을 알고는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본의든 본의 아니든 농(農)에 대한 차별에 (지금 이순간도) 가담하고 있다. 풀자면 매우 장황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농(農)의 어둑한 그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떤 별(別)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해볼까 한다. 오늘 대한민국 농(農)의 세계에는 특이한 별(別)이 있다. 차별인 듯 분별인 듯, 배타인 듯 공존인 듯, 매우 기묘한 별(別). 외국인 농업노동자 이야기다.

  조금 과장하면, 외국인들이 대한민국의 농사를 짓고 있다. 그들이 없으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이니 허풍만은 아니다. 구체적인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합법적인 농업노동자는 4만명 쯤이라는데, 비합법적인 숫자까지 더하면 최소 6만명은 넘지 않을까 싶다. 농사가 1년 내내 하는 것은 아니라서 유동적이고, 코로나로 출입국에 제한이 있어서 더 유동적이다. 들쑥날쑥하더라도 대충 4만명 쯤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잠깐, 4만명? 하필 비슷한 숫자라서 눈길이 간다. 대한민국 20~30대 청년 농민이 최대 4만명쯤 된다. 분명히 모르고 계셨을 것이다. 4만이라는 숫자로는 농(農)에 희망은 없다. 생태·환경적인 ‘지속가능성’과는 다른 지속에 관한 문제다. 들판에는 대를 이어 농사를 지속할 다음 세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기특한 청년농부 한둘을 안다면 더 축복해주시라. 아무튼 청년 농부 4만명은 턱없이 적은 숫자다. 반면에 외국인 농업노동자가 4만명은 좀 많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작년 성탄절 주간의 사건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외국인 농업노동자가 비닐하우스에서 동사했다. 젊은 여성이었고 4년 가까이 농사일을 한 성실한 자매였다. 글로 옮기기 불편하지만 추위에 얼어 죽었다. 

  대부분의 외국인 농업노동자는 대부분 비닐하우스나 허름한 컨테이너에서 더위와 추위를 감수하며 머문다. 시골 허름한 모텔을 공동숙소로 쓰는 경우라면 나은 편이다. 늘 그렇듯 죽음 이후에 정부는 부랴부랴 개선책 몇 가지를 내놓았다. 외국인 농업노동자를 고용하려면 앞으로는 일정한 주거환경의 조건을 갖추라는 것이었다.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십수년 동안 잘 지켜지지 못한 일이다. 

  외국인 농업노동자는 주로 시설하우스 농장이나 축산 농장에서 일한다. 그런 농사를 하는 농민(사장님)들을 대변하는 농민단체들이 즉각 반발했다. 주거환경 개선에 비용을 더 투자해야 한다면, 가뜩이나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농사를 못 짓는다고 말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현재 개선책의 적용은 어정쩡한 상태로 보인다. 본격적인 농사철을 앞두고, 농촌 지자체는 외국인 노동력 수급에 허둥대며 바쁠 뿐이다. 주거환경은 다음 문제일 뿐이다. 대체로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외국인 농업노동자를 만났더라도 특별히 인사를 나누거나 한 적은 없다. 외국인을 상시 고용할 정도의 규모가 있는 농민들과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기는 하다. 그렇다고 소농들은 전혀 외국인을 쓰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품을 사서 집중해야만 하는 시기가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80살 어르신의 품이라도 사야 했지만, 지금은 거의 외국인으로 대체되었다. 

  대체로 외국인 농업노동자들은 농민들과 밥도 따로 먹고 잠도 따로 잔다. 농촌 인심이 야박하다거나 차별 아니냐고 비난부터 하려 들면 곤란하다. 기실 문화적으로 그게 서로 편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흰밥과 김치를 먹어야 힘이 나듯이 그들이 힘이 나는 먹거리는 따로 있기 마련이다. 또 그들의 종교와 취향도 다르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외국인 농업노동자 고용에는, 어떤 ‘잠정적 합의’가 존재한다. 물론! 결코 최선의 합의로 볼 수는 없다. 삶의 질은 대부분 열악하기 때문에, 급기야 가슴 아픈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나그네(외국인 농업노동자)들은 차별과 분별 사이, 배타와 공존 사이에 거하는 존재들이다. 소수자들이지만 아주 특별한 소수자들이다. 왜 특별한가? (대한민국 도시는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더라도) 대한민국의 농(農)은 명확하게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농업노동자는 서로 모셔가려는 귀한 존재들이다. 멋대로 차별하거나 섭섭하게 대했다가는 일손을 놓친다. 그렇다고 외국인 농업노동자들이 ‘갑(甲)’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갑(甲)이 얼어 죽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특히 불법적인 입국자의 경우는 이를 빌미로 마구 대하는 사례도 여전하다. 어쨌든 핵심은 외국인 농업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경제적 권력관계에서, 대한민국의 농(農)과 외국인 농업노동자는 서로 ‘기묘’하고도 ‘잠정적’인 ‘기울어진 균형’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 상태가 가능한 까닭은 필요(수요와 공급) 때문이다. 이 필요가 발생한 까닭은 대한민국이 농(農)을 오랫동안 차별한 결과다. 구조적인 문제든 지속가능한 농업이든 한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당장 일손이 절실하다! 노동력이 필요하다!
  
  별(別)은 환영할만한 사태는 아니지만 인간세의 불가피한 양상이다. 부정적인 차별(差別)은 ‘무지·배타·폭력’의 영역이다. 그래도 긍정적인 분별(分別)은 ‘이성·공존·평화’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분별(分別)의 세계는 큰 거부감 없는 사회적 통념의 세계일 것이다. 문제는 차별(差別)이다. 차별의 배타성이 반성과 성찰로 분별(分別)의 공존이라는 수준으로 포용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전개다. 

  오늘 대한민국의 농(農)이 외국인 농업노동자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기본적인 노동 대우가 차별적이고, 농촌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되지도 않으며, 주거조건 개선이 아깝다고들 하는 판국이니 말이다. 청년농부 4만명은 적고, 외국인 농업노동자 4만명이 많게 느껴지는 것도 차별 심리의 일종이다. 그렇다고 마냥 차별이라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서로 편하고 서로 필요한 선에서 암묵적 합의를 이루고 있으니, 분별적 공존이라고도 애써 평가할 수 있다. 심히 위태롭지만 말이다.

  어떤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형성되는 공존! 아시아 선교지·관광지에서 마음 열고 만나려는 그들과, 당장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당한 공존을 합의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인가? 혐오와 차별을 억누르고 기묘한 공존의 세계로 이끈 힘은, 사랑도 이성도 사해동포주의도 아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덕분이다. 이런 젠장!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소수자들은 대한민국 경제가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다. 애석한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차별은 오래갈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가 맘몬이나 바알에게 (혹은 구약의 하나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의 예수는 필요 따위로 사람을 가른 적 없으시니!

  글을 어떻게 맺어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이것 하나만 기억하셨으면 한다. 님께서 즐기시는 채소 말인데, 10번 드시면 그 중에 8번은 나그네의 손을 거친 채소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누가 깻잎을 한 장씩 따서 묶었겠는가? 소 사료는 누가 주는가? 돼지똥 닭똥은 누가 치우는가? 우리의 농(農)는 기묘한 별(別)로 지탱되고 있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별(別)의 세계 덕분이라 것을 알고는 먹자.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1달에 1끼쯤은, 나그네들에게 축복의 마음을 전해보자.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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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4-19 14:59:37
어디 한국만 그런가? 한국만이 유독 차별이 심한가?
中東에는 인력이 부족하여 東南亞 출신 ‘식모’를 고용하고 있는 데 이들의 인권에 비하면 한국에서 일하는 東南亞 출신 일꾼의 인권이 좀 더 낫다. 이 식모의 수가 십만명에 이르는데 그 참상은 한국에서 일하는 동남아인의 인권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도시에서 他鄕시골로 귀농해도 만만치 않다. 자기고향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同族인 한국인조차 타향시골 사람의 자리텃세로 학~~을 뗀다. 시골사람이 도시사람을 비롯한 타향사람을 차별한다. 시골 어른신의 눈도장 찍는다고 동네 머슴살이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시간이 좀 지나 서로 낯이 익어야 겨우 꼽사리로 얹혀살게 된다. 同族차별이나 異民族차별이나 차별은 매 한가지이다. 다만 동남아인이 차별을 피해 귀국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르지만, 한국인이 차별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는 그나마 쉽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北美와 南美의 경우 아메리카 토착 인디언과 주도권 경쟁을 벌인 구라파로부터 이주한 移住人이 토착인을 많게는 1억명을(북미의 경우에만) 학살하여 그 땅의 새 주인이 되었다. 처음 유럽인이 이주했을 때 일부 인디언이 텃세를 너무 심하게 부렸다. 이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주인이 아예 텃세를 심하게 부리는 토착인을 몰살시켜 반신불수로 만들고 혹시 이에 대한 반발로 텃세를 부리지 않은 인디언마저 흔들릴까봐 그들마저 박해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大선배였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간 무리들이... 일단 北美의 새 주인 되자 이젠 그들보다 뒤에 온 이주민을 갈구고 있는 데 뒤에 온 이주민은 아직 힘이 모자라서 現 주인에게 꼼짝 못하는 상태다. 이것이 미국의 가장 아픈 역사인데 미국이 이를 自虐하는가? 토착인을 학살하여 이룩한 새 질서를 미국이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며 여기에 그 무신 도덕이니 차별이니 하면서 부끄럽게 여기는가?

왜 우리는 성소수자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을 自虐까지 하면서 다루어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우리가 남에게 하는 차별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건만 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자학하면서까지 죽을죄를 진 것처럼 굴어야만 하는가?

유태인 학살의 최대 피해자였던 유태인이 팔레스타인人을 몰아내고 히틀러 뺨치듯이 아랍인을 박해하고 학살하고 있는데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유태인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이에 비할 바 없는 아주 쪼매한 외국인 차별 따위로 주눅이 들어 그 무신 죽을죄를 진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을 자학하지는 말자!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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