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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에 관한 한국교회의 현실과 극복과제
김상덕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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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3월 29일 (월) 22:55:20
최종편집 : 2021년 03월 31일 (수) 11:37:42 [조회수 :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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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에 관한 한국교회의 현실과 극복과제

김 상 덕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를 향해 제기된 문제의식 중 하나는 ‘사랑의 종교를 표방하는 기독교가 왜 혐오와 차별의 주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혐오와 차별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현안이 되었고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거리에서 외쳤던 교회가 이제는 반인권적 혐오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속으로는 정치적 욕망이 가려지지 않는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폭력에 가깝다. 

  오늘 한국의 교회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반대하는 일에 더 앞장서고 있으며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문제적 집단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일부라고 하기에는 그 양상이 다분히 조직적이고 집단적이어서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개신교 내부에서는 다시 찬반으로 양분화되어 또 다른 논쟁을 일으키거나 애초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도록 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한국교회가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하기도 벅찬 상황이지만, 어쩌면 진짜 문제는 교회 내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교회 내부의 입장들이 갈라진 채로 그 간극이 너무 커져버려서 더 이상 대화나 토론조차 어려워진 것은 아닌지 부정적인 생각마저 든다. 

  이 짧은 글에서는 최대한 소모적 논쟁은 피하고자 신학적 입장이나 성서학적 해석에 관해서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대신 혐오와 차별에 관한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논의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바라보는 이해의 폭이 조금이나마 넓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혐오와 차별의 개념을 소개한 후, 차별의 문제를 인권의 측면에서 살펴본 후, 혐오를 집단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것이다. 가장 먼저 혐오와 차별의 개념을 살펴보자. 


1. 기독교는 차별의 종교인가: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국교회는 혐오와 차별의 주체인가? 이 질문을 두고 혐오와 차별 두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혐오와 차별은 비슷하지만 구분하여 사용한다. ‘혐오’(hate)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말한다. 반면에 ‘차별’(discrimination)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뜻한다. 즉, 혐오는 미움의 감정이고, 차별은 그것이 가시화된 행위나 결과를 말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미워하는 감정만으로 처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실제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다르다. 거기엔 옳고 그름에 대한 의지적 판단과 윤리적 선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또한 차별의 행위에는 차별의 대상이 겪는 피해를 동반한다. 많은 국가들이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함과 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보호하기 위함이다. 

  먼저 차별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권’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 근대 사회의 발전은 인권 의식의 형성 과정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근대적 인권의 개념이란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며 행복할 권리를 말한다.1) 국가인권위원회는 차별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평등권 침해의 차별(差別)행위”란 합리적 이유 없이 종교, 장애, 나이, 신분, 학력, 이미 형(刑)의 효력이 없어진 전과, 성별, 외모, 성적 지향, 인종, 신체 조건, 국적, 나이, 출신 지역, 이념 및 정견 등의 이유로 고용, 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 임금 및 수당지급, 융자, 정년, 퇴직, 해고 등에 있어서 특정한 사람을 우대, 배제 등 불리하게 대우하고,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2) 

인권의 핵심은 인간으로서의 누구나 부여받는 권리 그리고 사람됨의 관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말아야 할 보편적인 존엄함을 가진다. 차별은 곧 인권의 핵심 개념이다. 이런 개념의 형성은 짧게는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길게는 서구 사회의 사상을 형성해 온 기독교 정신이 담겨 있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믿으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민족, 성별, 나이, 계급 등을 초월하여 온 인류와 피조세계를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로서의 현대 인권 사상의 기초가 된다. 

  차별을 폐하고 평등한 세상을 향한 가르침은 초기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을 시기에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주었다. 조선(朝鮮) 말기, 기독교는 신분이나 성별 등의 사회적 배경으로 인한 차별을 뛰어넘어 모두가 평등한 형제 자매이며, 천한 출신으로도 목사와 장로가 되고, 여성도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기독교는 특히 개신교(改新敎)는 그야말로 낡은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는 혁명적인 가르침의 종교였다. 한국에서 개신교가 사회적 변화를 주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복음의 본질이 추구하는 포용성과 더불어, 당시 영미권 선교사들이 가진 인권 사상과도 깊은 관련을 가진다. 따라서 교회가 차별이 아닌 평등한 사회를 위해 앞장서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가 차별의 주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한국교회가 근대적 인권의 개념을 반(反)기독교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일환으로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고 한국을 ‘기독교 국가화’하려는 목적의식을 드러내곤 한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근대화 이후의 세속 국가체제 및 다원주의 사회와는 어울리기 어려운 전(前)근대적인 사고방식의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근대 인권의 개념이 서구 기독교 국가(Christendom)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 형성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중세시대는 종교와 사회가 일치하던 사회였다. 당시 교회는 거룩함과 세속을 구분하고, 선과 악을 규정하고 심판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기독교 국가의 명과 암이 모두 존재했음을 증언한다. 한편으로 교회는 국가로 하여금 기독교적 가치와 질서 체계에 따라 사회가 유지되도록 사상적 체계를 제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배타적인 집단정체성이 강화되었고 그 결과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이교도 학살 및 십자군 전쟁 등의 배제와 폭력의 역사로 이어졌다. 기독교 국가 체제 속에서 기독교는 본래의 포용성을 버리고 선과 악을 구분하듯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우리’와 ‘그들’을 분리한다. 이 구조 안에서 종교는 타자를 차별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만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종교의 자유는 근대 인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종교를 포함하여 어떤 이유로도 차별 받지 않을 ‘인권의 정신’과 함께 근대 국가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오늘을 살아가는 민주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2. 기독교는 혐오의 종교인가: 국가주의를 벗어나야

  두 번째 질문은 ‘기독교가 혐오의 종교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어떤 종교도 혐오와 차별을 신의 뜻으로 믿고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용서와 화해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급진적 종교개혁을 추구했던 재세례파 교인들은 자신이 폭력에 희생자가 될지언정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증언한 평화주의자였다. 평생 한센병 환자와 함께한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지난 130여년 한국교회는 성서의 말씀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우며 함께 해왔다. 그런 한국교회가 왜 이토록 누군가를 혐오하는 주체가 되었는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혐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좀 더 냉정하고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차별이 행위의 문제라면 혐오는 감정의 문제인데 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부정적 감정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부정적이고 적대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배움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가 과거 중세사회처럼 직접적인 권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종교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은 중요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개인 및 집단의 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차별의 문제는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처벌이 가능한 반면, 혐오의 문제는 법적 정의로는 해결이 되기 어렵다. 따라서 종교는 성숙한 개인의 성품을 형성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사회적 자본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겠다. 문제는 종교가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차별의 폭력성은 이분법적인 배타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틀린 것’으로 여기고 배척한다. 이런 배타성은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 반면 이질적인 것은 동질집단의 정체성을 깨뜨리는 위협 요소로 여기게 된다. 여기서 혐오의 감정의 작동하는데 ‘이질적인 것’을 ‘비정상적’이며 자신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는 ‘위협’으로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혐오의 대상은 차별과 배제, 나아가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정당성이 성립된다. 독일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의 사역 후반기에 유대인 혐오를 부추기는 설교와 저술활동에 매진했다고 알려졌다. 안타깝게도 그의 저서들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유대인 혐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배타성은 근대에 들어서도 종교와 연관성을 가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세시대 기독교 국가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다름’을 구분했다면, 근대에 들어서는 그 기준이 ‘국가주의’의 형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원 교수는 서양 근대 역사 속에서 종교가 국가주의와 만나는 지점에서 혐오와 차별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국가 주도의 종교를 거부하는 개인이나 종파에 대한 제도적 차별과 배제, 처벌이 정당화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가치나 이상을 종교가 추인했을 때 국가주의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형성된다. 이에 반대하면 정치적으로는 체제 불복종자가 되고, 종교적으로는 비정통과 이단이 된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차별과 처벌은 법적 정당성을 띈다. 3)

최종원은 이 현상이 오늘 한국 교회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하는데, 한국의 산업화 시기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당시 국가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강경 보수 우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가 외치는 혐오의 발언들의 대상이 순수하게 성서와 기독교적 가치를 대변하는지 아니면 국가주의라는 망령에 휩싸여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인 선긋기와 혐오의 발언, 차별과 배제를 위한 조직적 운동을 하는 것인지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가며: 다시 기독교의 본질로

  한국교회는 이런 차별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가 ‘관용’을 버리는 순간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 사례로부터 배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가 제국의 지배를 용인하고, 남녀차별과 노예제도를 정당화했던 사례들로부터 말이다. 우리는 왜 과거 한국교회가 자랑하던 사랑과 포용, 희생과 봉사의 정신은 사라지고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주체가 되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덧붙여 현 상황 속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사안들의 성서해석의 다양성 그리고 모호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쉽고 일방적인 주장을 피하고 될수록 표현을 자제하고 포괄적인 사고와 유연한 대화의 자세를 취하는 편이 교회 내외부적으로 필요하다. 특별히 공동의 선이라는 관점에서 일반 사회와 대화할 준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신앙을 내세워 일방적 주장만 반복하면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교회를 향한 신뢰도와 복음전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기독교 혐오’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이 언론과 SNS에 등장했다. 국내 반(反)기독교 정서가 대중매체에 등장한 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일부 목회자나 대형교회의 스캔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의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코로나19 방역 정국 속에서 한국교회가 보여준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모습에 대한 실망이 자리한다. 대면예배를 강행하거나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는 ‘일부’ 교회들과 그리고 수차례의 교회발 집단감염 사례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남에 따라 교회는 더이상 신뢰나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라도 혐오와 차별을 멈추고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과 포용, 환대의 정신을 실천하자. 그게 살 길이다.  

 

각주)-----------------------------------------------------------------------

1) 현대 사회에서는 인권의 개념이 법적 지위나 권한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 사람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구조를 포함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2)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3항.
3) 최종원 외. 『혐오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서울: IVP, 2019),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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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3-30 01:11:02
저열한 군중심리에 기댄 기독교혐오 秋收主義(추수주의)는 노예근성이다!
일제시대에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에게 책임을 덮어씌운 사실, 중세시대에 악귀를 내쫒는다며 마녀사냥하면서 얼팍한 어느 누구를 화형 시킨 사실, 로마시대에 로마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기독교인에게 책임을 덮어씌운 사실, 무한폐렴창궐시대에 역병확산 책임을 터무니없이 이른바 극우 기독교인에게 전가시킨 사실...이 사건들은 선동가에게 선동당한 민중이 선동가과 합세하여 良民을 마녀사냥 한 사건이다.

자기 나름의 기독교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무한폐렴 확산 문제에 좀 문제가 있었던 기독교인과 무한폐렴확산의 主犯인 문재인 일당의 책임 중에서 어느 쪽의 책임이 더 중한가?

정부에서 대중을 선동하여 정부책임마저 몽땅 이른바 극우 기독교 운운하며 덮어씌워 마녀사냥한 건 아주 잘못되었다. 이에 대한 항의 없이 이른바 극우 기독교인의 잘못이라고 마녀사냥에 맞장구치는 기독교인이 그 무신 기독교인인가?

정부의 거짓선동에 항의하지 않는 게 참된 기독교인인가? 로마에 불 지른 건 기독교인라고 선동한 네로에게 박수치는 게 옳았는가?

정부의 선동행태를 엄중히 꾸짖은 기독교인이 기독교 內部 반성 차원에서 본문 글과 같은 주장을 한다면 납득이 가능하나... 선동당한 민중과 합세하여 자기는 ‘깨끗하고 도덕적인 기독교인’이랍시고 부당하게 마녀사냥당하고 있는 이른바 극우 기독교인에게 더 큰 돌을 던져대는 것이 그 무신 기독교인인가?

정부에 선동당한 민중이 기독교를 唾罵한다고 한술 더 떠는 행태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이번 무한폐렴 확산은 분명히 문재인의 主책임이고, 主책임자 문재인 일당에게 선동당해 분노한 민중이 속죄양을 찾다가 걸려든 게 이른바 극우 기독교인이라고 본다.

이런 불의에 대한 반격 없이 이런 불의에 굴복하여 “예, 기독교인이 죽을죄를 졌습니다. 예수보다는 민중의 힘이 더 세다는 걸 몰랐습니다. 위대한 민중님!, 제발 용서해주십시오.”라는 식으로 선동당한 민중에게 아부하고 추수하는 꼴사나운 기독교인이 한국에 득실거린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하게 확인하였다.

그 열정이 너무 지나쳐 무한폐렴 확산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이른바 극우 기독교인의 행태보다 大衆秋收主義에 집착하여 기독교의 본질마저 왜곡시키며 대중에게 아부하는 힘 있는 자의 불의에는 눈 감고 아주 만만한 힘없는 자에게 쌍심지를 켜는 기독교인이 한국교회를 더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목도하였다.

본문 글 글쓴이는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의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코로나19 방역 정국 속에서 한국교회가 보여준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모습에 대한 실망이 자리한다. 대면예배를 강행하거나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는 ‘일부’ 교회들과 그리고 수차례의 교회발 집단감염 사례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남에 따라 교회는 더 이상 신뢰나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라도 혐오와 차별을 멈추고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과 포용, 환대의 정신을 실천하자. 그게 살 길이다.”라고 결론을 맺었는데... 민중이 한국교회를 혐오하고 비난하는 데 겁먹고 빠삭 쫄아서 중언부언하고 있다. 민중이 선동당해 기독교가 져야할 책임 이상으로 과도하게 책임을 지운 그 主體에 대한 분노는 전혀 없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하니 깜빡 죽어가는 소리로 “예, 잘못했습니다!”라고 엎드리는 노예근성으로 무엇을 실천하고 무엇을 환대해봐야 말짱 도루묵이 아니겠는가?

좌판 깔고 생선 장사하는 생선 냄새 나는 어머니를 친구들과 합세하여 생선냄새 더럽다고 해본들 생선장수 아들이 아닌가? 작은 도둑과 큰 도둑이 있는 데 힘 있는 큰 도둑과 합세하여 힘없는 작은 도둑을 더 갈구는 것이 예수정신인가? 지금 누가 누구를 혐오하고 있는가? 글 속에 가시가 가득하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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