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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신 예수님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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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3월 10일 (수) 13:05:20
최종편집 : 2021년 05월 26일 (수) 21:51:05 [조회수 :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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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고, 하나님은 자기들만을 사랑하신다고 믿었다. 이런 선민의식으로 인해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그들의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고 멸시하거나 적대시했다. 이스라엘 민족, 즉 그들의 형제들만이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이웃이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3:13)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형제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별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4:7)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사랑하는 자들”은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을 믿음의 형제들로 한정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새로운 선민의식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눅 3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형제들만을 사랑하지 말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를 형제에서 원수로까지 확대하셨다. 이것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이며 이단적인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27-28절에 나오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에서도 이웃을 원수 사랑으로까지 확대하셨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이 그 질문자에게 율법에서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되받아 질문하시자 그 율법 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했다. 옳게 대답했다는 예수님의 칭찬에 고무되어서 그는 다시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다. 

그는 예수님이 이번에도 그에게 율법에서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실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의 이웃은 바로 그의 동족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대답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에게 묻지 않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서 그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를 설명하셨다. 

이 비유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사마리아인의 조상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 12지파가 둘로 나뉘어져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남유다가 되고 나머지 열 지파는 북이스라엘이 되었다. 우리는 남유다인을 유대인이라 부르고 북이스라엘 사람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른다.

열왕기하 17장에서 보면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그들은 이민족의 풍속과 규례를 따랐고 신당을 세우고 우상을 숭배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타일렀지만, 끝내 말을 듣지 않자 크게 노하셔서 그들을 호세아 왕 때 앗수르의 손에 넘기셨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을 때 지도층을 비롯한 많은 백성이 앗수르로 끌려갔다. 그리고 사마리아 지방에는 앗수르 관리들과 백성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 후 알렉산더 대왕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그곳에 마게도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시련을 겪으면서 사마리아인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잃었고 그들의 신앙도 이교도의 신앙에 오염되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과 동일시해서 그들을 멸시하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유대인 거주 지역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유대인들의 통행로였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에서 이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 것을 문제 삼으신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 같은 이방인이었다면,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죽어가는 그를 돌보지 않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다면 사마리아인이 그의 동족을 도와준 것은 화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율법 교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돕지 않은 유대인을 사마리아인이 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이 비유 이야기를 읽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는 율법 교사의 말에 주목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인물 설정을 들여다보면 그 이상의 의미들이 이 비유 이야기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 것은 죽은 사람을 만지면 부정하다는 그들의 정결법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행태를 통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동족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정결법에 묶여서 동족조차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상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왔다고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예수님은 이웃의 범위가 민족의 경계선을 넘어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구조한 것은 이웃의 범위를 확대시킨 것 이상이다. 

그 사마리아인이 그를 멸시하고 적대시하는 유대인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44절의 표현을 빌리면 “원수”를 사랑한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27-28절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그리고 모욕하는 자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데, 10장의 이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원수 사랑을 다시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에서 유대인의 이웃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셨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믿음의 형제만을 사랑하려는 우리의 이웃 사랑을 문제 삼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에는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개혁자들은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고, 바울은 주 안에 있는 사람만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통해서 이방인도,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요즘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서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신교에서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교회 밖의 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도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를 그들의 주장의 전거로 삼을 만하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를 확대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시지 않을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원수 사랑의 모범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적 근거를 마태복음 5장에서 찾을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5)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운 분일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가리지 않고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을 구원하신다는 구절도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보편적인지 아니면 선택적인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인들은 선택적이라는 편을 들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어느 한 편을 들고 싶겠지만, 성경에 두 가지가 다 나와 있기 때문에 하나만을 택하기는 어렵다.

어떻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하는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이 유명한 비유에서 이웃의 범위를 확대하시고 원수 사랑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과 외면하는 자들을 모두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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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범 (84.17.56.91)
2021-03-16 16:20:27
목사님, 감사합니다.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개방된 사고방식의 말씀에 많이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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