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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과 검찰의 탄생
박윤덕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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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3월 09일 (화) 23:47:01
최종편집 : 2021년 03월 09일 (화) 23:47:25 [조회수 : 3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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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과 검찰의 탄생

<법원과 검찰의 탄생: 사법의 역사로 읽는 대한민국>, 문준영, 역사비평사, 2010

저자는 한국 사법제도의 개혁을 고민하면서, 갑오개혁 시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법원·검찰 조직 및 사법 절차에 관한 법제의 변천을 추적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에 영미법의 일부 요소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우리 사법제도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 아래서 이식된 대륙법 체계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대한민국 법원과 검찰의 기원을 찾아서, 근대 유럽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형사 사법 체계, 이를 수용한 일본의 재판소구성법 및 형사소송법, 그리고 대만, 만주국 등 일본의 식민지 및 보호령에서 시행된 법률들까지 비교·검토한다. 

‘남귤북지(南橘北枳),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저자는 핵심적인 법 개념과 제도가 유럽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어떻게 변이하는지를 유심히 살피는데, 법의 정신은 그 법을 낳은 기후와 풍토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했던 몽테스키외의 주장을 입증이라도 하듯, 동일한 개념과 제도가 유라시아 대륙의 이쪽과 저쪽에서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프랑스혁명 이후 확립된 ‘공소관’, ‘예심절차’, ‘검사동일체의 원칙’ 등이 그러하다.
 
국왕이 주권자인 구체제 사회에서는 법관이 국왕의 이름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했다면,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인민주권의 원칙에 따라 “인민이 그들의 대표자를 통해서 스스로 통치하듯이 그들의 대리인을 통해서 공소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공소 제기는 기소배심이, 공소 유지는 주민에 의해 선출된 공소관이, 법원의 정당한 법률 적용과 판결 집행을 감독하는 기능 즉 검찰사무는 검사 역할을 하는 국왕대리인이, 재판 진행 및 판결은 재판관이 분담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나폴레옹 치세에 설치된 각급 검찰청에는 검사장의 지휘 아래 검사들이 배치되었는데, 배속 검사들이 해당 검사장의 이름으로 검찰사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해당 검찰청의 검사들이 집합적으로 ‘단일하며 동일한 인격’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다. 따라서 프랑스 검찰에서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전국의 모든 검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개별 검찰청 단위에서만 적용되는 원칙인데, 이것이 일본에서는 검찰총장 이하 모든 검사에게 적용되면서 상명하복의 검찰 통제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예심제도는 공판에 앞서 기소된 범죄가 재판에 회부될 만한 혐의가 있는지 예심판사가 수사하는 절차이다. 구속, 압수, 수색 등 강제처분권을 보유한 법관이 사법경찰을 지휘해서 수사하고, 혐의가 있으면 공소관인 검사에게 기소하도록 사건을 이관하게 함으로써 수사와 기소를 분리한 것이다. 이는 피의자·피고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기소 독점의 폐해를 막기 위한 제도였다. 기소편의주의에 따라 검사가 재량권을 행사해서 피의자를 기소하지 않는 경우, 피해자는 예심판사에게 소추 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직접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예심제도는 독립투사를 무기한 구금하고 고문할 수 있는 수사 절차의 일부가 되었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검사와 사법경찰관도 예심판사처럼 강제처분권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서 왜곡·변형된 채 이식된 근대 유럽의 사법 체계가 해방 후 인권 보호와 정의 구현을 위해 개혁되기는커녕, 남북 분단과 6·25 전쟁, 이승만 독재, 4·19 혁명과 5·16 쿠데타로 이어지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오히려 반공과 독재 정권 유지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동경의 연합군최고사령부가 일본을 무력화하고 민주화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던 것과 달리, 남한의 미군정은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하기보다는 동맹국의 포섭을 위해서 친일 세력의 온존을 용인하였다. 대부분이 친일파였던 150여 명에 불과한 법조인들은 해방공간에서 사법개혁에 매진하기보다는 정치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직능을 독점하였다(1980년대가 되어서야 변호사가 1천 명이 넘었다). 

이처럼 저자는 현재 우리 사법제도의 문제점이 어느 날 갑자기 드러난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에 깊이 뿌리 박혀 있고, 그 이면에는 언제나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세력들의 다툼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윤덕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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