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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믿음의 의미4복음서는 하나님의 육성이다.
김주범  |  iamoknap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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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3월 05일 (금) 16:58:35 [조회수 :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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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 믿음의 의미


신학적 의의
삼위일체 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동일한 한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즉 주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에서 출발한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신다. 삼위일체론은 성서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다루는 신학적인 해석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이루어진 궁극적인 진리와 실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1)( 황돈형(보쿰대 신학박사), “삼위일체와 현대신학의 과제.” 한국북음주의신학회 논문 자료중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 본질, 한 실체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안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실이 곧 신적인 본질과 동일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2) Ibid.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밝혀지는 신앙의 새로운 현실을 알려주는 언어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예수라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재 가운데 인간과 스스로 연관적이게 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의 언어임을 의미한다.3) Ibid.

인간의 인간성은 결코 그 자체로 그 존재의 근거와 목적을 갖지 못하며 철저히 하나님의 신성을 통해서 새롭게 근거와 참된 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간성은  비록 창조의 사건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이미 긍정되고 우리에게 수여되었다고 할지라도 또 한 번 육신이 된 똑같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본래적인 의미와 완성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죄로 어두워지고 파괴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인간성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과 은총 가운데 그 분의 신성에 용납되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으로서 결정적으로 그 분이 계시하고 정한 바 새로운 실재 가운데 알려지고 개방되는 것이다.4)Ibid.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이름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자기전달이다.5) Ibid,
 삼위일체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가운데 드러낸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알려진 하나님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유의 완전성과 전체성(totus Dei 가 아닌 totum Dei)을 증거 하는 신앙의 언어인 것이다.6) Ibid.
 하나님 자신의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는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자기전달인 것이다.7) Ibid.
  

하나님의 육성으로서의 4복음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이시다.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자기전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말씀을 기록한 것이 4복음서이다. 따라서 4복음서는 신의 말씀, 곧 하나님의 육성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성육신이시다.8) 사복음서가 하나님의 친 육성인 것은 손병호 박사의 여러 첵들에서 가르침 받았다. 
 비록 부족한 제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육성과 그 흔적은 4복음서에만 있다. 따라서 4복음서는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유일하신 말씀의 권위를 가진다. 4복음서를 구약이나 신약중의 하나의 성경으로 보는 잘못된 시각을 바꾸어, 모든 말씀의 최종, 최고 권위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에 한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 바울은 십자가 대속으로 오는 은혜를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는 구원을 복음이라 하였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만을 복음이라 하였다. 
바울을 중심한 초기교회에서는 주후 33년 이후부터 70년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말씀된 복음이 교인들에게는 전혀 들려지지 않다시피 하였다. 신약성서 가운데 복음서가 맨 앞에 등장하지만 가장 먼저 저작되고 교회에 유포·회람된 책은 바울 서신이다. 신약성서 27권 중 바울 서신이 기록된 시기는 48년부터 58년 사이로 성서비평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마가복음이 60∼70년경, 마태복음 70∼80년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80∼90년경, 그리고 요한복음이 90∼100년경에 씌어졌다. 따라서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앞선 교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9) ( 남병곤,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 대탐구 (제2편). 정경화 작업 ③] 영지주의자 도전 계기 2∼3세기 걸쳐 27권 채택, 국민일보 미션라이프[2008.02.25].) 

주로 이방인들이 주축이 된 교회들 사이에 회람된 바울서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하는 선교 신학이다. 이는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에 입문시키는 기초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 바울이 정립한 바울의 복음이나 바울의 사상이나 신학이나 바울의 신앙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처럼 동일시되었다. 

이런 구약적 회귀와 바울적 복고와 영지적 역행의 혼란속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대단한 용기와 각오와 수고로 바울이 말하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한 복음서를 내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별 되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바울처럼 유추하거나 스스로 정리한 것이 거의 없이 사실적이며 역사적인 복음을 중시하였다.10)( 손병호, 기독교와 복음(서울: 유앙겔리온, 2000), pp. 337-344.)
 
하나님이 바로 성육신 하시어 친히 말씀하시며 새로운 구원 역사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진리와 생명의 복음이 온 인류와 모든 만물을 멸망치 않고 영생하는 유일한 구원의 원리와 법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없이도 되는 기독교와 교회는 어불성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영원무궁하시고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인류의 마지막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11) Ibid., pp. 345.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일시하면서, 교리와 신조와 신경으로 애를 썼으나 무리와 억지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은 역사성과 사실성에 대한 책임이 없다. 말하는 자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이런 것을 복음과 구분치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달리 추가를 하거나 수정을 하거나 보완을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말씀, 곧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구약과 바울과 혼합되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다. 때문에 구약과 바울의 기초 하에서 2천 년간 지탱되어온 기독교를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새 기초를 놓아 새집을 지어야 한다.12) Ibid., pp. 346-347.
  
신앙을 위한 예수에 대한 복음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역사적으로 말씀되어진 대로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는 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나 공상이나 유령이나 영상으로 말하여도 무방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복음서가 나온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으로 망각되고 제외되고 실종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되찾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구원 역사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13) Ibid., p. 349.
 
예수가 구약의 왜곡을 걷어내기 위해서 오셨듯 이제는 복음서가 바울을 걷어내야 한다. 바울은 복음서가 나오기 이전에 이미 교회와 서신서 들을 통하여 기독교를 만들고 형성하였다. 그래서 복음이 높이 올려 진 것이 아니라 유대교적 기독교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구약과 바울로 가려지고 덮혀지고 묻혀져서 보이지도 않게 되고 들리지도 않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의 복음이 이제는 기력을 완전히 잃었다. 가감할 수 없는 복음만이 교회와 기독교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주신 인류 구원의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나머지는 예비요 준비며 서론일 뿐이며 부수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직 성서” 안에 들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14) Ibid., p. 353.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길이라는 말은 곧 도를 말한다. 도는 진리와 생명의 도를 말한다. 도는 이치(理致)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는 어떤 제한적인 전제가 전혀 없는 우주 만물의 객관성을 말씀하신 것이고, 인류가 멸망치 않고 영생하는 도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객관적인 윈리를 말씀하신 것이지 주관적인 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15) Ibid., p. 362.
 도에는 자기 욕심이나 사심이나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나, 지위고하, 성공실패, 전쟁, 대적, 승리 같은 것이 없다. 
유대교나 로마교나 기독교는 그런 도에 이르지 못하였다. 진리를 알기 원하기 보다 자기 구원을  위하여 열심을 다해서 빌고 바라고 바치며 안간힘을 쓰며 혈기를 부리며 집단적인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불사한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죽거나 없어지거나 줄어들거나 실패하거나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과 상관없이 더 강하여야 하고 언제나 이겨야 하고 전능하신 신과 함께 사는 신앙인들을 말한다. 아플 때는 낫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다가 죽음이 오면 죽지 않기를 바라서 기도하고 애쓰며 정한 이치로 돌아가는 순리와 정도를 역행하는 것이다.16) Ibid., pp. 363-364.
 
구속신학은 인간들의 최대 염치 없는 사리 사욕이며 이기심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죄 값을 떳떳이 치루지 못하는 비열한 인간들이며 죄없는 짐승을 잡아서 신에게 바치는 것은 짐승의 원한을 살 일이며 하나님을 물질로 보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음으로 주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사하심을 받아 전에는 죄인이었지만 자기가 이제는 의인이 되었다는 대속론은 참으로 뻔뻔한 인간들의 망연자실이다. 도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도에 이르고 도에 거하기를 바라시는 그 이상이 없는 것을 모른다.17) Ibid., p. 364.


“독생자”라 믿는 믿음이 중요한 이유. 
복음은 하나님의 최후 계시이며 말씀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그의 다른 아들을 결코 주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일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끝내셨다(요19:30). 
복음은  “아들에 관한 말들(words about the Son)”이 아니라, “그 아들의 말씀(Word of the Son)”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모세와 토라는 유대교를 위한 기초이다. 교황과 법규집은 로마 카톨릭의 기초이다. 바울의 신학은 개신교의 기초이다. 코란과 모하메드는 이슬람의 기초이다. 더하여, 포스트모던 신학의 기초는 좋게 들리는 모든 것을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뿐이다.18)18) Ibid., 손병호 박사는 탁월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살려냈다. 
 
복음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신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신학, 교회신학, 성서신학들은 너무나 많은 이론들과 교리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고 꾸미고 수정하였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과 교리와 신조와 신학들로 교회 밖에서보다 교회 안에서 가려졌고 매장되었고 무시되기까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사람들에 의해 편집되고 이서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길과 생명과 진리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사도들과 사도 적 교부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수립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을만한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 그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복음은 다른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교부들이나 목사들이나 종교개혁자의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다. 바울의 서신도, 사도 신조도, 초기교회의 교리도, 로마 캐톨릭의 규범집도, 어떠한 개신교 신학들의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들과 덕인들 간에, 원수와 친구들 간에, 신자와 비신자간에, 세리와 매춘부들, 살인자와 강간범들 간에, 가난한 자와 부자들 간에 어떠한 구별도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은 복음을 듣고 깨닫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믿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그렇게 믿지 않은 기독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육성이다. 이 육성의 복음은 바울 이전에 이미 가르쳐진 복음이다. 바울과 상관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다. 대속과 상관없는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육성인 4복음서가 바울 복음 앞에 숨을 쉬지 못했다. 대속론을 대표로 하는 바울신학이 구약과 4복음서 해석의 중심 원리가 되어 버렸다. 모든 성경이 바울의 대속론을 위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4복음서는 하나님의 본질 메시지인데도 바울신학을 위한 부교재(副敎材) 정도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상관없는 바울의 가르침이 기독교를 점령해 버렸고 정통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이 바울 기독교가 바로 오늘날 인류의 생존을 방해하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건설적인 모든 가치를 왜곡시켰다.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원리를 왜곡시켰다. 억지 종교 교리만 남아있는 기독교를 만들고, 해독을 품어내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시대를 위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하나님의 친 육성을 바울 신학과 분리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 4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바울의 신학과 상관없이 오직 4복음서의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복음을 발견하는 길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냥 신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친부인 것을, 모든 인간들은 신의 피조물로서 신의 도구가 아니라, 친부 창조주의 친 자녀들이며, 형상이며 생명의 존재들이어서 창조주의 가능성을 그 영혼에 가지고 있는 존재들인 것을, 그래서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임을,  용서는 대속을 통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결국 죄사함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을, 그리고 내세 천국 구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창조 목적을 위하여 인간들 간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 원수까지 한 형제와 가족으로 사랑하여 아버지의 가정을 이룩하는 사랑의 나라인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였다. 
바울이 말한 대속 구원은 전혀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이 아니다. 내세 천국 구원의 유일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유일하다고 믿고 가르치기 때문에 모든 오해들이 발생하였다. 종교적이며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하였고,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 공생에 문제를 발생시켰다. 내세 천국은 현재 인간들이 사는 삶에서 단지 육체만을 벗는 의미의 삶이다. 육체 없는 삶이 죽은 후의 삶이고 내세의 삶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살 수 없는 실력이면 내세 천국에서도 천국다운 천국을 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천국 가는 오직 유일한 대속의 제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말씀하신 신의 육성으로서의 유일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신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는 절대 권위의 말씀으로서의 유일성이다. 누구도 절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변개 변조 시킬 수 없다. 친부, 친자, 인간의 본 생명,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희망, 아버지의 방식대로 원수까지 서로 사랑하며, 결국 아버지와 같은 형상으로 완성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절대로 인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다.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창조주 신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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