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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인가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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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2월 19일 (금) 14:10:03 [조회수 :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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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인가

― 초월과 비상식·비합리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다 ―

 

 

초월이 현실이 된 경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8-9 말씀으로 출애굽의 광야에서 있었던 일이다. 상식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사실(事實·史實)로 기록하고 있다. 사실이 아니라면 거짓이 되는 것이니 성경은 거짓의 기록이 되고, 따라서 기독교는 거짓 종교가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를 초월한다. 물론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과학적이며 상식적인 흐름의 진행 가운데 그것을 초월하는 현상도 나타나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천지를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세상만사, 인간만사를 다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며 필요에 따라 초월적 능력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이끄시기도 도우시기도 하신다. 살리시기도 죽이시기도 하신다. 순종에는 생명을, 불순종에는 멸망을 주신다.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인간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어 알고 계시는, 내면 깊숙한 데까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그분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전존재를 의탁하는, 맡기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럴 때 그분께서 나의 주(인),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당신의 능력에 나를 동참시켜 주신다. 내가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것이다.

인격?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것이다. 나의 인격? 그것이 무엇인가. 못된 인간적 냄새만 풀풀 풍기는 것이 아닌가. 나를 그분께 맡기고 순종함으로 그분의 철저한 종으로 내려앉으면, 종이 되어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면,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인격이 되면 나는 최상의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누더기 같은 나를 그분께 드리면 나는 보배로운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요즘 세상의 비난거리가 된 자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하지 말기 바란다. 보라. 그들 안에 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자기 배가 주인이 되어 탐욕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는가.

그래도 그들은, 아니 그들의 지도자라는 자들은 우매한 사람들을 죄악으로 이끄는 사단의 하수인이기는 하지만 이해가 가는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제 배를 따습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놀아나 제 호주머니를 털어 그들의 배에 기름기를 올리는 데에 기여하며 자기배도 따스워지리라 믿는 자들이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 말 몇 마디만 들어봐도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일인데,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나의 안에 하나님, 성삼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상태가 인격이 될 때 나는 최상의 인격자가 된다고 했는데, 진리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그 자체가 사랑이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큰 사항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서는 두 경우만을 말씀하셨지만 실은 하나부터 열까지가 모두 사랑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따라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 것이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했겠는가.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는 하나님, 예수님을 가리켜 사랑의 덩어리라 했는데, 그의 신앙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 하나는 제대로 봤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떻게 크리스천이, 교회가, 기독교가 사회의 지탄거리가 되겠는가. 크리스천도, 교회도 기독교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기야 어리석고 우매하다는 면에서는 이들과 같진 않지만 출애굽 광야 40년의 이스라엘 민족도 이해가 가지 않는 데가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낮에 덥고 밤에 추운 광야 길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은 홍해가 가로막아 진퇴양난이 되자 ‘애굽 사람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며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다.

그럼에도 음식이 궁해지자,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한다’고 불평을 쏟아냈다. 마치 고기를 실컷 먹고, 떡을 배를 두드려가며 먹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아니다. 고기를 삶다가 어쩌다 한 번 애굽 사람의 눈을 속여 실컷 먹어 본 적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국물조차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을 것이고 굶주림도 심했을 것이다.

불평과 원망은 모세와 아론을 향한 것이었으나, 실은 모세의 말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어 먹이셨다.

 

 

예표가 원형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이 가까워지자 지칠 수밖에 없었다. 40년 가까이를 그 열악한 환경의 광야에서 지냈으니 왜 아니겠는가. 거친 행로에 마실 물이 없어 고생하기도 했고 이방 민족들의 횡포도 심했다. 그런데다가 에돔 족속으로 인해 멀고 험한 우회로를 가야 했다. 그러자 본병이 또 도졌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고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나 아무리 피곤하고 지쳤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기나긴 광야의 노정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들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신 사랑을 실생활을 통해 몸으로 직접 경험한 그들이다.

불평의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물이 없는 것은 맞지만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자기들이 싫어 한다는 ‘하찮은 음식’이란 ‘만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꿀 섞은 과자’ 같은 맛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식물이라 할지라도 같은 것을 40년이나 가까이 먹었으니 식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얼마 안 두고 있던 때가 아닌가. 인내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들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모세에게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고 간청했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의 말대로 기도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모두에 든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세상의 이치로는, 합리적인 상식으로는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로 진리였다. 문제는 믿고 순종하여 실행하느냐 마느냐에 있는 것이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았고, 그러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더욱 귀중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 주(豫表)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4-15)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독뱀에 물린 사람이 모세의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그로 인해 죽지 않고 살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永生)을 얻는다는 것으로 예표(모세의 놋뱀)가 원형(십자가상의 예수)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놋뱀은 육신의 목숨을 살리는 데에 그쳤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서 쳐다본다고 하는 행위는 극히 단조롭고 간단하다. 믿는다고 하는 행위도 말만을 놓고 본다면 간단하다. 그러나 후자는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로 복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간단치 않다는 건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 성삼위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종의 자리로 내려앉히고 성삼위 하나님을 주인자리에 모시는 것이다. 어떻게?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들, 육적인 것들, 그러니까 물질이나 명예, 지위 같은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려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물질이 왜 나쁜가. 물질이 없이는 인간이 살아갈 수가 없다.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것이다. 물질뿐 아니라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런데 버릴 것은 또 하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옛사람, 바로 그것이다. 그것만 버리면 다 버리는 것이 된다. 옛사람 안에 세상적이고 육적인 가치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옛사람은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시시때때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세상적인 것들이 됐건 육적인 것이 됐건, 그리고 옛사람이 됐건 이런 것들은 곡식밭의 잡초와도 같아서 뽑아내도, 뽑아내도 줄기차게 돋아난다. 그러니 그러는 족족 뽑아내야 한다.

이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바울 같은 사도조차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한다.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죄성으로 인해 사망권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결과이다.

누군들 나는 아니라 부인하겠는가.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길로 들어서서 힘써 가기만 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다. 그러니 은혜인 것이다. 가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가기만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각오나 결단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믿는 사람치고 누군들 잘 믿어 보겠다 각오하고 결단해 보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도라고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기도는 고도의 영적행위이므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붙잡아 인도해 주시옵소서, 성령충만케 하시여 성령님의 주관주도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를 향하신 그분의 뜻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그 뜻에 따라 나의 전존재를 몽땅 당신께 바치도록 하는 기도를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령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와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드리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 번제의 연기처럼 향기로 피어올라 기쁘게 흠향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드리는 것이다.

 

 

기도가 말씀을 말씀되게 한다

 

기도는 말씀을 말씀되게 한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여 나와 하나가 되게 한다(肉化). 말씀은 하나님을 보여준다. 성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하나님의 뜻과 섭리, 그분의 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기도가 그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한다. 말씀이 말씀되게 한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한다는 말이다.

기도는 말씀이 말씀되게 하고, 말씀은 기도를 바르게 하도록 붙잡아 인도한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의 양대 축이 된다 하는 것이다. 물론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 말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말씀이 제대로 된 말씀으로까지는 되게 하지 못한다. 말씀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신학대학 교수들을 보면 알 일이다. 그들 사이의 불화와 불목을 보면 알 일이다.

전술한 것처럼 출애굽의 광야에서 독뱀에 물린 사람이 모세의 놋뱀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죽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행위는 역시 전술한 대로 모세의 놋뱀을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말씀은, 그러니까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에 관해 기록한 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핵심은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른 방법으로 믿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기도의 핵심 능력이라는 말이다. 말씀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방법을 제시하고, 기도는 그 길로 가게 하는 힘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를, 나를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길이요 진리이다. 영생으로 이끄는 길이다.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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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1-02-20 23:39:08
기도와 말씀을 가지고 횡설수설하고 있으니... 아주 시건방진 논리다!
본문 글에서 “기도는 말씀이 말씀되게 하고, 말씀은 기도를 바르게 하도록 붙잡아 인도한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의 양대 축이 된다 하는 것이다. 물론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 말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말씀이 제대로 된 말씀으로까지는 되게 하지 못한다. 말씀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신학대학 교수들을 보면 알 일이다. 그들 사이의 불화와 불목을 보면 알 일이다.”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太初부터 있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고, 기도는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인간이 그 무슨 권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기도로 補充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능력의 한계(또는 私心) 때문에 신학대학 교수 등의 불화와 불복이 일어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신학교수 등 인간 사이에서 불화와 불복이 일어나는가요? 인간의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안 되는가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에다 인간의 기도 따위가 더해져야만 완벽한 말씀이 된다? 그래서 그 전에는 뭔가 부족하다?... 아주 시건방진, 너무나 너무나도 시건방진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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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성도 (221.145.144.149)
2021-02-20 09:31:23
같은 사안이나 정책을두고 누구는 강력하게 비난하고 비판하면서 누구는 침묵하고 관대하게 대하는 친북좌파 임종석 칼럼리스트의 글이라 그런지 그다지 와 닿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즉 객관적이지가 않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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